기독교/간증

[펌] 삼일운동 뒤 돌아보며- 하남님 앞에 회개합니다

배남준 2016. 3. 1. 09:19

숨겨진 죄악을 회개합니다!


1946년을 시작하면서 북한교회들은 장대현교회에서 3.1독립운동을 기념하는 예배와 행사를 치루려고 대대적으로 준비하면서 공산당의 방해로 어려움이 많았다. 공산당도 3.1독립운동 기념행사로 사람들에게 지지를 얻기 원했지만 교회는 공산당과 타협을 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래서 해방 후 사사건건 교회와 공산당과의 충돌로 싸움이 그치지 않는 것이 궁금해 14살의 진원이는 아버지에게 물었다.
“3.1절 독립운동 때 무슨 일이 있었나요?”
“진원아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듣도록 하거라! 앞으로 네가 기억하고 있어야 하는 거이야!  내래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유학생으로 공부하던 1919년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되었단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18년 파리강화회의에서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14개 조항의 평화원칙을 선언하였는데 그 핵심이 민족자결주의였단다.”
“민족자결주의가 뭡니까?”
“말 그대로 모든 민족은 정치적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으며 외부의 간섭을 받아서는 안된다는 거야, 이 영향을 받아 동유럽의 체코, 헝가리, 폴란드 등이 독립했다는 소식에  자극을 받은 일본에 유학하고 있던 학생들이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고 거사를 준비했지.
1919년 2월 8일 오전 10시, 일본유학생들 600명이 동경의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 모였는데 팽팽한 긴장감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일본경찰의 삼엄한 감시 속에 은밀히 준비해 온 거사를 실행하는 순간이었어, 조선청년독립단의 실행위원이었던 최팔용사회로 백관수가 독립선언을 읽기 시작했어.
‘전 조선청년독립단은 2천만 민족을 대표하야 정의와 자유의 승리를 득한 세계만국의 전에 독립을 기성하기를 선언하노라. 4천3백년의 장구한 역사를 가진 오족(우리민족)은 실로 세계 고민족의 하나이라… 오족은 일본이나 혹은 세계각국이 민족자결의 기회를 요구하며 생존을 위하여 자유독립을 기성하기를 선언하노라.’ 이광수가 작성한 독립선언문이었다.
그리고 뒤이어 김도연의 결의문이 낭독되자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러자 윤창석이 감격하여 울먹이는 음성으로 ‘하나님이시여! 저희 민족을 인도하여 주시옵고 보호하여 주시기를 기원하나이다.’하고 간절히 기도드리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정말 심장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단다. 이것을 알게 된 일본경찰이 행사장에 난입하여 학생들과 충돌이 일어나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고 주동학생들이 검거되어 옥고를 치루는 사태가 발생했단다.”
“아버지도 끌려갔습니까?”
진원이는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을 마치 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들려주시는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는 주동자가 아니라서 끌려가지는 않았어, 그런데 2.8독립선언문을 송계백이 학생모자 속에 숨겨 비밀리에 국내로 가져왔고, 곧 바로 일본에 많은 유학생들이 귀국하였는데 나도 그 때 평양으로 돌아왔지...”라고 하시는 아버지는 그 때를 회상하듯 한 동안 생각에 잠기셨다.
“아버지가 평양에 돌아오니 일본은 전국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여 민간소유의 땅과 농지 그리고 임야를 빼앗아 버렸고,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로 시련 속에 있는 것을 보았단다. 이에 분노한 유학생들은 어른들을 찾아가 윌슨이 선포한 민족자결주의를 전하고 독립의 필요를 말했지만 좀처럼 사람들이 움직이려고 하지 않아 답답해 했다.”
“그렇게 침략을 당하는데 왜 가만히 있었어요?” 진원이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아버지에게 물었다.
“그것은 세계적인 안목이 없어 국외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알지 못했고, 독립운동이 사회에 미칠 영향이 어떤 것인지를 몰랐으며, 무엇보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게 탄압하는 일본인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이었어, 그래서 평양에 있던 우리 기독유학생들 가운데 몇 사람이 기독교인들의 힘을 모으기 위해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이 일어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셨던 길선주목사님을 찾아뵙고, 민족자결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며 우리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려고 하는데 사람들이 모일 수 있도록 목사님께서 힘써 달라고 말씀을 드렸단다. 이야기를 듣고 길선주목사님은 ‘우리 민족이 일본으로부터 독립이 되어야지’ 하시는 격려의 말씀을 하셨어, 그 내용을 듣고 유학생들은 평소 친분이 있는 목사님들과 장로님들을 찾아가 길선주목사님이 독립운동을 지지하고 참여하신다고 말씀을 드렸단다. 놀랍게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길선주목사님이 참여하신다면 우리도 참여하겠다고 말해주었단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아버지는 감격스러웠던 그 때를 떠올리며 힘껏 주먹을 두어 번 쥐고 흔드셨다.

 


“학생들이 길목사님을 만나 일본에서 있었던 독립선언서에 관해 전해드리자 길목사님은 이미 서울에 있는 함태영선생님을 평양에 초청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이야기를 전해주었다고 하더구나”
“아버지 그럼 기독교가 독립운동을 일으켰어요?”
“진원아 그런 것은 아니란다. 민족자존을 간절히 원하는 기독교의 신도들과 천도교도들이 중심이 되어 서울, 평양, 정주 등에서 독립운동을 추진하였지, 기독교의 이승훈과 함태영은 천도교의 최린과 손병희선생 등을 만나서 고종의 장례로 수십만의 민중이 모여드는 국장일 이틀 전 3월 1일 오후 2시에 파고다공원에서 모여 선언서를 낭독하기로 결정했단다. 그리하여 기독교 측 16명, 천도교 15명, 불교 2명 총 33명으로 구성되었고 그 대표를 손병희선생이 맡았다. 이처럼 독립운동의 핵심세력은 종교 지도자들이었고 전국적인 연락활동은 남녀 학생들이 맡았다.
3.1운동은 최남선이 초안한 독립선언서에 담겨 있는 대로 ‘조선이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세계만방과 자손만대에 고하여 민족자존의 정당한 권리를 회복’하는데 그 목적이 있음을 밝혔단다. 그런데 3월 1일 오후 민족대표들은 파고다공원이 아닌 인사동의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학생과 시민 2만 명은 파고다 공원에 모여 독립의 의사를 대내외에 천명했다. 파고다 공원에는 비밀리에 만든 태극기가 휘날렸고 만세를 외치는 군중의 함성이 서울 전역으로 메아리 쳤고, 고종의 장례일을 앞두고 서울에 모여든 군중은 시위대열에 합류하여 독립운동의 행진은 거대한 물결을 이루었다. 심지어 진압을 하려던 상당수 한국인 경찰들도 자신들의 복장을 벗어 던지고 시위에 합류하였단다. 같은 시간에 평양, 진남포, 안주와 의주, 선천, 정주 등 전국 곳곳에서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었고 독립을 염원하는 군중의 만세소리의 함성이 전국을 뒤덮었다. 평양에서는 숭실학교 교수, 졸업생, 재학생이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3.1운동은 한국인들을 결집하는 대규모의 독립운동이었다. 여기에 기독교 지도자들과 기독교인들이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던 것이고… 전국적으로 번진 만세시위 역시 대부분 교회를 중심으로 일어났단다.”
“와~아! 아버지 정말 기독교가 대단한 일을 했네요.” 자부심에 기뻐하는 진원이를 바라보시는 아버지의 얼굴이 그리 밝지 않았다.

“얘야~ 그런데 아버지는 그 대단한 3.1독립운동의 만세소리가 평양을 가득 메우는데도 2월 8일 동경에서 윤창남이 “하나님이시여! 저희 민족을 인도하여 주시옵고 보호하여 주시기를 기원하나이다.”라고 기도하는 소리를 들었을 때의 그 감격이 없었단다.”
“왜 그러셨어요?”
길선주목사님은 독립운동의 선봉에 섰던 이승훈장로님의 권유로 3.1운동의 33인 대표로 가담하였다. 그러나 거사당일에 사경회를 인도하신다는 이유로 지방에 있어서 불참하였고, 후에 체포되어 법정에서 ‘나는 인장(도장)을 이승훈에게 위임하여 독립선언에서 날인하였으므로 그 독립선언문의 내용을 보지 못하였으니 독립운동에는 찬동하였으나 활동에는 적극 가담한 적은 없었다.’고 대답하여 무죄석방되었단다. 이 때문에 길선주목사님은 사회와 교회의 비난을 한 몸에 받게 되었다. 길목사님의 법정비겁을 빌미로 장대현교회의 청년들에게 배척과 폭행을 당한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기도 하였단다.

그런데 나는 사람들에게 알려진 내용과 다른 이야기를 길목사님과 가까이 지내는 친구분이 할아버지를 찾아와 하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단다. 길선주목사님은 독립운동에 관심을 갖고 찾아온 학생들과 사람들에게 우리 기독교인들이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을 독립운동에 참여하도록 독려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사용했는데, 이 사실을 길목사님이 알았을 때는 이미 33인의 대표에 이름을 올리도록 허락한 상태였고, 도장도 모두 위임한 상태여서 그대로 있으면서 본인 스스로 적극적인 가담을 하지 않았다고 하셨단다. 그리고 스스로 자수하여 법정에서 선언서를 보지 못한 사실을 그대로 답한 것은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영예를 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는 진실한 종으로 서기 위해 그런 선택을 하셨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고 하셨어.”
“아버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해할 수 없다는 아들의 얼굴을 가만히 보고 계시던 아버지는 다시 말씀을 시작하셨다.
길선주목사님이 독립선언서를 직접 보지 않았다고 법정에서 진술한 것은 일본경찰이 무서워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한국의 독립을 전세계에 알려 이루려는 것 보다 민족의 주권자가 되시는 하나님께 아뢰며 독립을 위해 기도하기를 원하셨던 것이라고 하시더라, 그러니까 길목사님은 독립운동의 대표였던 16명의 기독교인들과 한국교회가 세상에 뛰어나가 민족자결을 주장하며 독립을 세계 열방에 알리기에 앞서 하나님께 엎드려 이 민족을 구원해 달라고 기도하기를 원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는 거지, 마치 윤창남이 2.8독립선언문이 낭독되는 자리에서 하나님께 저희 민족을 구원하고 인도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던 것처럼…”
“그러니까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는 말씀인가요?”

1946년 장대현교회의 삼일절 기념행사

“그 때 나는 젊고 생각이 깊지 못해 아버지와 친구 분이 나눈 말의 의미를 잘 알지 못했었는데, 27년이 지나 그 때와 똑같은 일들이 벌어지는 것을 보며 심히 걱정이 된다.”
“무슨 일이 27년과 똑같이 일어나고 있는데요?”
“진원아, 네가 말한 것처럼 지난 해 일제의 억압에서 해방이 되고 난 직후 평안북도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기독교 정신에 기초한 민주주의 정부를 세우고 사회를 개혁하자는데 목적을 두고 기독교 사회민주당을 조직하였다. 반공을 신학적 이념으로 삼았던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공산주의는 붉은 용이었고,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김일성을 추종하는 공산주의자들에게 기독교는 반혁명세력으로 비추어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 급기야 지난해 12월 이북5도 연합노회가 북한교회를 대표한 사절단을 연합국 사령관에게 파견하여 감사의 뜻을 표하기로 결정하자 김일성과 공산당은 이것을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기독교 세력의 노골적인 반대 움직임으로 받아들였다. 결국 공산주의는 기독교를 제거하지 않으면 북한의 공산화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교회의 탄압 말살정책을 시작했다. 북한공산세력의 교회에 대한 첫 번째 탄압은 종교재산의 몰수였다.
1946년 2월 8일 토지개혁을 공포하고 반혁명계급으로 희생당한 35만 명 가운데 기독교인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단다. 그래서 나는 기독교인들이 정당을 만들어 정치활동을 하면서 공산주의와 대치하는 것과 3.1운동시기 민족자결을 외치며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기독교인들과 같은 것으로 생각되어 걱정스럽다.”
“그럼 우리교회와 아버지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14살의 진원이도 점점 노골화되어 가는 공산주의의 교회에 대한 탄압이 걱정되어 아버지께 물었다.
“진원아, 너무 걱정하지 말고 우리 하나님께 이러한 환란을 잘 지나갈 수 있도록 기도하자.” 하시며 아버지는 불안한 눈빛의 진원이를 따뜻하게 안아주셨다.
“3월 1일 민족의 독립운동 삼일절을 기념하기 위한 행사가 장대현교회에서 있습니다.”
누군가 외치는 소리에 나가보니 3.1절 기념집회를 알리는 전단지가 교회 앞에 붙여져 있었다.
그러나 김일성정권은 교회가 이 행사를 단독으로 치르는 것을 금지시키고 공산당이 주도하는 평양역 기념집회에 전 교회가 참석할 것을 강요했다. 그러나 교회는 기념예배의 취소의 부당성을 주장하고 나섰다. 그러자 공산당은 기념행사를 하지 말라는 수차례의 명령에도 불복하여 기념행사를 강행하려 하자 2월 26일 새벽에 평양시내 박대선목사를 비롯해 60명을 검거해 삼일절기념행사를 사전에 봉쇄하려 하였다. 그러나 가까스로 검거를 면한 황은균목사는 각 교회에 밀사를 보내 장대현 예배당에서 기념식을 강행할 것을 알렸다.

1946년 3월 1일 금요일, 3천명이 모인 가운데 장대현교회에서 삼일절 기념행사가 성대하게 진행되었다. 소련군과 북한의 경비대가 겹겹이 포위하고 금지했으나 필사적으로 기념식을 마쳤다. 평양 창동교회의 황은균 목사의 설교가 끝나고 기도할 때 성도로 가장하고 들어온 20명의 적위대가 황목사를 총검으로 위협하고 강제로 끌어다 트럭에 태우려 하자 이에 분개한 성도들이 4~5명씩 인간방패를 만들고 태극기와 십자가를 흔 들며 ‘신탁통치 절대반대 소련국 나가라! 신앙자유를 달라!’ 를 외치며 소련군 사열부를 향해 항의의 시가 데모를 거행했다. 교회가 중심이 되어 거족적으로 일어났던 삼일독립운동을 기념하는 행사를 방해한 이 사건은 북한의 김일성이 기독교에 대해 비판적이라는 사실을 극명하게 드러내 주었다. 더군다나 공산당이 준비한 3.1절 기념대회때 수류탄이 투척되었다. 그러나 김일성은 죽지 않았다. 공산당은 그 사건을 기독교가 주도하였다고 확신하고 교회를 핍박하기 시작하였다.

우리의 죄악을 회개합니다!

“아버지! 아버지!”
몇 번이나 아버지를 불렀으나 대답이 없었다. 진원이는 예배당에 기도하시나 싶어 살금살금 걸어가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불이 꺼져 있어 캄캄한데 기도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였다. “아버지~ 아버지~ 어찌합니까…” 흐느끼는 울음 속에서 간간이 새어 나오는 아버지의 기도소리였다. 순간 진원이의 눈에서도 이유 없는 눈물이 흘러내리며 가슴이 먹먹해 왔다.
“아버지!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독립운동을 한다는 명분에 사로잡혀 하나님을 향해 독립을 호소한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민족자결을 외치며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것이 결국은 우리가 하나님 보다 앞에 있었던 것임을 오늘에야 알았습니다. 주님 이제야 알게된 나의 미련함을 용서하여 주시고, 나와 우리 조선교회가 하나님께 독립을 구하며 기도하기보다 우리들 스스로가 우리 민족의 주권자가 되어 외쳤던 죄악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그 때는 우리가 몰라서 그랬습니다.

그 죄악이 해방이 된 지금에도 계속되고 있음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거룩한 예배당에서 3천명이나 되는 성도들이 모여 ‘신탁통치 결사반대 소련국 나가라! 신앙자유를 달라!’ 외쳤던 우리의 죄악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하나님께 이 민족의 주권을 주시고 신앙의 자유를 허락해 달라고 기도해야 할 백성들이 소련국 나가라 공산주의 물러가라! 신앙의 자유를 달라며 세상의 주관자들에게 외쳤던 것이 죄악임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하나님을 무시하고 우리들 스스로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앞 뒤를 분간하지 못하고 죄악의 무덤을 파고 있나이다.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 민족의 주인이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하나님이십니다.
그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신앙의 자유를 주심을 결정할 수 있음을 믿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이 민족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이 나라의 교회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이제는 교회와 특별히 지도자로 세운 우리들이 정당을 만들어 공산당과 대치하며 그들로 우리를 핍박하는 원인을 제공하는 죄악을 범하지 않게 하옵소서. 민족의 해방을 주신 것도 연합국이 아닌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므로 연합군에 감사단을 파견하기에 앞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해방을 주셨던 것을 감사합니다.
하나님! 여전히 이 땅에 공산주의 세력들이 득세하고 있습니다. 우리로 신앙의 정절을 지키며 깨어 기도케 하시고, 영적인 분별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믿음의 선한 싸움을 끝까지 싸워가게 하옵소서! 우리로 어떠한 시련에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 믿음을 지켜갈 수 있도록 은혜를 주옵소서!”
 눈물로 토하는 아버지의 회개하는 기도소리를 들으며 진원이는 예배당 구석에 쭈그린 채 잠이 들었다. 기도를 마치고 돌아서던 아버지는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내 아버지가 일제시대 조선에서 믿음을 지키며 일어났던 역사에 많은 이야기를 해주셨지, 아버지는 미리부터 잊어서는 안될 조선의 역사를 내 마음에 써 놓은 것인지도 몰라. 우리 기독신도들은 하나님께 나가 기도했어야 했는데…” 읊조리듯 말씀 하셨다.

북한에서 강을 건너와 아버지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를 생생하게 들려준 윤진원 할아버지는 멀리 지나온 길을 돌아보 듯 긴 한숨을 내 쉬었다. 그리고 한마디 “한국에서 남북통일을 위해 세계교회에 호소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디요…” 침묵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