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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김화영, 행복의 충격

배남준 2016. 2. 4. 06:23

 

 

 김화영, 행복의 충격, 문학동네, 2012

 

 

 

 

지중해안의 따뜻한 가슴, 프로방스는 완전히 절망한 사람이 올 곳은 아니다. 오직 행복한 자, 아무것도 소유한 것이 없이도 이 땅 위에 태어난 것이 못 견디게 기뻐지는 자들만이 올 곳이다. 아니 적어도 많은 절망의 한구석에 아직 저 필사의 모든 생명들이 공유하는 생명의 행복감, 우리들의 건강한 육체가, 죄 없는 육체가 아는 행복감의 씨앗을 아직 죽이지 않은 자들만이 올 일이다.
행복한 사람들, 행복해진 사람들이 서로서로 웃고 입 맞추고 손짓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이 마을에 절망한 자가 온다면 참으로 외로울 것이다.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은 남을 ‘위로’할 시간은 없다. 빛 속에 누려야 할 우리들의 행복의 시간도 촉박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슬픔뿐만 아니라 행복도 함께 나눌 수 있는 것임을 확인하게 된다.

                                                                                                                                  ---「지중해, 나의 사상」에서(pp.39~40)


강가의 나무에 매여 형벌을 받는 거역의 신 탄탈로스에게 물어 보라. 그는 대답하리라. 우리를 삶으로 치달리게 하는 것은 물이 아니라 우리들 영혼 속에 불타고 있는 영원한 ‘갈증’임을. 생명은 부유한 자의 소유가 아니라 위로받지 않으려는 자, 영원함 속의 굶주림을 간직한 자의 것임을.                                                                                                                                            ---「침묵의 공간」에서(p.71)


춤이 몸에 가득 차 박자가 빨라지고 비로소 몸이 음악에 실리면 춤이 몸을 춘다. 신명이 내리는 이 순간의 비길 데 없는 무아지경을 프랑스 말로는 ‘트랑스’라고 한다. 달이 가득 차 하늘에 솟으면 푸시는 트랑스에 들어간다. 영매의 상태, 실신의 상태, 그러나 산에 오르면 산이 푸시를 달빛에 실어준다. 아아! 트랑스만이 지각하게 하는 ‘가벼움’을 나는 니체와 바슐라르와 보티첼리에게 배웠지만 푸시는 그것을 제 몸으로 살고 있었다.                                                                                                                            ---「침묵의 공간」에서(pp.111~112)


그때 다시 가보고 싶다. 영원히 다시 가보고 싶다. 참으로 젊은 나의 땅을, 나의 바다를 영혼 속에 다시 껴안기 위하여.

                                                                                                                                     --「발레아르의 영원한 봄」에서(p.226)

당신은 혹시 보았는가?

시간이 검증하는 책이 있다. 조용히 스며들어 누군가의 한 시대를 잠식하는 책, 가까운 사람과 공유하고 싶은 책, 나와 네가 읽고, 그와 그녀에게로 퍼지는 책. 베스트셀러 코너에 놓이진 않지만 내 서재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하는 책. 어느 날 문득 떠올라, 내면을 고요히 뒤흔드는 책. ‘인생’에 영향을 미치는 책. 『행복의 충격』이 그러하다.


이 책은 1969년 처음으로 지중해 연안의 땅에 발 디딘, 한 젊은 학자가 느낀 ‘행복의 충격’을 담았다. 자유로이 국경을 넘나들고, “행복의 외침으로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이 열린 풍경, 아무것도 감춘 것 없는 전라의 풍경 속에서” 살아가는 삶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된 이의 거침없는 ‘청춘의 기록’이다.

경이로움으로 가득한 여행자의 눈에 비친 지중해의 정경을 시적인 문체로 그려낸 여행자, 그는 바로 문학평론가이자 번역가인 김화영이다. 김화영이 누구인가, 알베르 카뮈 전집 번역에 평생을 바치고, 장 그르니에, 생텍쥐페리, 미셸 투르니에, 앙드레 지드 등 아름다운 프랑스문학을 끊임없이 소개한 사람이다. 저서와 역서를 합해 100권이 넘는 책을 열정적으로 펴낸 이다. 『행복의 충격』은 이 원로 학자의 생애 첫 책이다. 지금으로부터 37년 전, 그의 나이 서른다섯에 세상에 나와 한 번도 절판되지 않았다. 꾸준히, 끊임없이 이 책을 원하고 찾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1969년 가을. 스물아홉의 김화영은 지중해로 떠난다. 지금처럼 떠나는 일이 손쉬워지고, 소비되는 시절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떠난다’는 것은 제법 큰 용기를 필요로 했을 것이다.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공포”를 무릅쓰고, “우리들의 모든 유익하였던 경험들을 무용하게 하는” 곳으로 가는 것. 어쩌면 ‘떠남’은 그의 말처럼 “항상 최초의 경험”일지도 모르겠다.


무방비 상태로 도착한 프로방스는 “행복이 완만한 속도로 꽃향기처럼 스며나오는” 곳이 아니었다. 그곳은 “내일의 행복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올 곳은 아니”었다. “지금 당장, 여기서, 행복한 사람”의 땅이었다.


떠나기 전까지 ‘행복’이란 말은 곧 ‘안정’을 의미하는 사회에 살던 그였다. 잘 보호된 세계, 닫힌 공간, “좋은 남편, 좋은 아버지였다”라고 회고될 법한 단란함이야말로 행복한 삶이라 여겼다. 머나먼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현재의 행복을 끊임없이 희생하며 살아가는 것이 삶에 대한 진지한 자세였다. 그것이 비록 ‘눈물겨운’ 행복일지라도. ‘어두운’ 행복일지라도.


그러므로 프로방스의 첫 얼굴은 단순히 문화적 충격을 넘어 그에게는 생래적으로 너무나 낯선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최초의 낯선 시간’을 견디며 처음으로 “슬픔뿐만 아니라 행복도 함께 나눌 수 있는 것임을 확인하게 된다.”

지중해는, 빛 속의 지중해는, 바람 속의 올리브나무 골짜기는, 모든 것의 출발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모든 것이 이르는 목적지이다. 그곳에 삶의 씨앗이 있고, 그 씨앗을 두꺼운 죽음이 감싼다. 모든 떠난 자들은 그곳으로 돌아온다. 모든 돌아온 자들은 그곳에서 떠나보낸다. 그래서 그 햇빛, 그 바람, 그 나무, 그 돌들의 시원 지중해는 덧없고 행복한 생명들의 ‘중심’이다. 모든 ‘중심’이 그러하듯 일몰의 시각이 다가오면 지중해는 둥글게 둥글게 익는다. 붉게, 뜨겁게 익는다. 그 생명의 과일이 익는 시각, 아! 우리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던 것을 마지막으로, 그리고 비로소 배운다.
                                                                                                                                     -「발레아르의 영원한 봄」에서(P.128)

그는 몇 년간 프로방스, 이탈리아, 로마, 베네치아, 스페인을 아우르는 지중해 연안을 여행한다. 아니, ‘지중해를 산다’는 표현이 맞겠다. “행복한 생명들의 중심”인 지중해는 그를 새로이 살게 했다.

알베르 카뮈, 반 고흐, 알퐁스 도데, 앙드레 지드…우연 같은 운명 속에 그들의 자취와 정신적 뿌리를 발견하다

그가 여행중이던 차가 고장 난 외딴 마을이 카뮈의 무덤이 있는 루르마랭이었던 것, 덕분에 카뮈의 무덤 앞에 수선화를 놓을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우연한 일이었을까. 그는 프로방스의 황혼을 바라보며 장 지오노를 떠올리고, 소유하기를 거부하는 여행자를 꿈꾸며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를 인용한다. 알퐁스 도데의 고장에 왔다는 것을 실감한다. 이십대에 토스카나를 처음 여행한 카뮈를 생각하며 피렌체를 여행한다. 30년이 지나 그의 여정을 찾아가본다는 데 기대감이 부푼다. 그런 그를 40년 가까이 지나 오늘날의 우리가 바라본다. 그의 눈길이 머무르고 정신이 뻗어가는 다방면의 풍부한 학식과 통찰력을 따라가다보면, 이런 기행이 그이기에 가능한, 그만이 할 수 있는 것임을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또한 그의 개성 넘치는 글쓰기와 어떤 유파에도 속하지 않고 자유로이 연구해온 그간의 궤적들이 자연스레 이해된다. 그가 받은 ‘행복의 충격’은 “이미 떠나지 않는 청춘, 문을 걸어 닫고, 책상다리를 하고 아랫목에 앉은 청춘, 잠들어버린 청춘”은 알 수 없는 깨달음을 준 것이다. “행복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라는” 사실 말이다.

“나는 그 젊음으로 거침없이 썼다” 행복은 우리의 하나뿐인 의무라는 것을!

“책을 읽으면서 줄을 쳐요. 줄 친 문장은 따로 타이핑을 하죠. 자주 보고 싶은 문장은 노트에 적어놓고, 매일 보고 싶은 문장은 사무실 벽에 붙여놔요. 김화영의 『행복의 충격』은 줄 친 게 너무 많아 타이핑을 못 했어요.”
                                                                                                                    -박웅현(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책은 도끼다』저자)

깊이 있는 독서로 무딘 감성을 깨우라 말하는 광고인 박웅현. 그가 어느 인터뷰(조선일보 2012년 2월 4일)에서 『행복의 충격』에 관해 언급한 대목이다. 그의 말처럼 이 책은 아름다움으로 가득하다. 우선 섬세한 감성이 그러하다. 또한 지적이고 열정적인 젊은 학자의 피 끓는 문체, 파도가 넘실거리는 듯한 장문은 요즘의 텍스트들에서 얻기 힘든 감흥을 준다. 시간을 들여 읽게 만들고, 행간에 서서 사유하게 한다.

모든 제왕들이 쓰러진 곳에 자라나는, 아직도 자라나는 시프레나무와 그 위에 풍성하게 흘러내리는 초록의 저녁 빛은 그의 아름다운 침묵으로 끝내는 승리한다. 이 삶의 지극한 기쁨과 지극한 슬픔이 마주치는 곳에서 내 두 눈은 프로방스의 저녁 평원에 버려진 풍차의 채광창이 된다. 내 심장 속에서 돌아가던 제분기가 잠시 멈춘다. 우주에 가득한 고요, 모든 것이 멈춘다. 내 맥박 속에서 세계사도 멈춘다. 그때 문득 나는 영원의 얼굴을 만난 듯싶었다.
                                                                                                                                               _「침묵의 공간」에서(P.100)

무엇보다 그의 ‘젊음’이 아름답다. “떠난다, 문을 연다, 깨어 일어난다, 라는 동사들 속에는 청춘이 지피는 불이 담겨 있다”라는 그의 외침이 아름답다. “청춘은 그 자체가 자기 스스로의 정당화가 된다는 특권”을 갖고 있다. 이 특권을 거머쥐지 못하는 것은 곧 늙기 시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두 번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절에 대한 아쉬움, 이미 늦은 후회, 해보지 못한 것들의 가짓수가 늘어가는 것이 늙음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 책이 오랜 시간 읽힌 것은, 현재를 생생하게 감지하며 살고자 하는 마음들 때문일 것이다. ‘다른 곳’을 꿈꾸면서 오지 않은 ‘미래’만을 위해 현재를 흘려버린 날들. 그러므로 바로 이 순간, 그리고 매 순간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에서 느낀 ‘행복의 충격’은, 지금도 유효한, 아니, 지금 더 유효한 메시지다. 행복해질 수 있는 곳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는 보통의 진리를 되새기며 책을 덮는 그 마음은, 분명 이전과 다를 것이다. 이전과 다른 삶의 태도로 한 걸음, 나아가게 될 것이다.

당신은 혹시 보았는가? 사람들의 가슴속에 자라나는 그 잘 익은 별을. 혹은 그 넘실거리는 바다를. 그때 나지막이 발음해보라. “청춘.” 그 말 속에 부는 바람 소리가 당신의 영혼에 폭풍을 몰고 올 때까지.
                                                                                                                                     -「발레아르의 영원한 봄」에서(P.229)

 

 

출처 : 세계를 읽어주는 나뭇잎숨결
글쓴이 : 나뭇잎숨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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