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3국민일보 신춘문예 최우수 당선작)
양화진의 비문을 읽다
- 박혜료
거슬러 올라가면,
신분의 골격을 곧게 세운 벽이 가로막았다
오랜 인습의 내부에서 기와지붕과 붕당들의 싸움은 계속되었고
풀잎들의 구원은 흉년 안쪽에서 시들어 갔다
빗장을 걸어 잠근 긴 수염의 안개
열리지 않았다 고집 센 입 미간처럼 새벽의 문은,
그 문을 두드리며
바다 저 끝에서 이마의 주름살 같은 파도를 밀면서
들어오는 복음의 푸른 눈동자들
그들은 여명黎明을 끌고 들어왔다
예수 그리스도의 새벽별이 되어,
성문 밖에서 신분을 대물림하던
헐벗은 눈동자들을 보았다
허기진 배를 물로 채우는 아이들
짚 더미 속에 누워있는 여인은 뼈와 가죽만 남은 채
폐결핵을 앓으며 녹물 같은 핏덩이를 쏟아 냈다
바람이 나뭇잎 모아 허물어진 초가지붕 한 귀퉁이를 기워주듯
상처를 한 올 한 올 엮어 주었다, 바람이 되고 나뭇잎 되어
양화진 묘지에 가 보면 안다
길은 풀숲에 엎드려 오가는 사람들을 기억했고
그들이 심은 밀알은 민들레 홀씨처럼
묵정밭에도 바위틈에도 모래톱 속에서도 푸르게 자라
온 누리에 붉은 꽃등 피워 올렸다
양화진 묘지에 가 보면 안다
푸른 날 푸른 몸 다 내어주고 다 덜어 주고
제 몸의 혈청 영하의 수준으로 낮춰
안으로 안으로 켜 놓은 비문碑文 속의 사랑을
마지막까지 엄마를 제 눈 속에 담느라
동그랗게 뜬 눈으로 서서히 떠나가는 어린 딸을
낯선 이국땅에 묻고 짐승처럼 울부짖던
어린 엄마의 끊어진 탯줄 같은 그리움을
양화진 묘지에 이르면 보인다
그분들의 피와 살과 영혼이 꽃으로 승화된 것을
-2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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