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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국민일보 신춘 신앙시 최우수상/ 양화진의 비문을 읽다

배남준 2023. 3. 21. 12:41

 

 

 

(2023국민일보 신춘문예 최우수 당선작)

양화진의 비문을 읽다 

 

                                                                       -  박혜료 

거슬러 올라가면,

신분의 골격을 곧게 세운 벽이 가로막았다

오랜 인습의 내부에서 기와지붕과 붕당들의 싸움은 계속되었고

풀잎들의 구원은 흉년 안쪽에서 시들어 갔다

 

빗장을 걸어 잠근 긴 수염의 안개

열리지 않았다 고집 센 입 미간처럼 새벽의 문은,

그 문을 두드리며

바다 저 끝에서 이마의 주름살 같은 파도를 밀면서

들어오는 복음의 푸른 눈동자들

 

그들은 여명黎明을 끌고 들어왔다

예수 그리스도의 새벽별이 되어,

성문 밖에서 신분을 대물림하던

헐벗은 눈동자들을 보았다

 

허기진 배를 물로 채우는 아이들

짚 더미 속에 누워있는 여인은 뼈와 가죽만 남은 채

폐결핵을 앓으며 녹물 같은 핏덩이를 쏟아 냈다

바람이 나뭇잎 모아 허물어진 초가지붕 한 귀퉁이를 기워주듯

상처를 한 올 한 올 엮어 주었다, 바람이 되고 나뭇잎 되어

 

양화진 묘지에 가 보면 안다

 

길은 풀숲에 엎드려 오가는 사람들을 기억했고

그들이 심은 밀알은 민들레 홀씨처럼

묵정밭에도 바위틈에도 모래톱 속에서도 푸르게 자라

온 누리에 붉은 꽃등 피워 올렸다

 

양화진 묘지에 가 보면 안다

푸른 날 푸른 몸 다 내어주고 다 덜어 주고

제 몸의 혈청 영하의 수준으로 낮춰

안으로 안으로 켜 놓은 비문碑文 속의 사랑을

 

마지막까지 엄마를 제 눈 속에 담느라

동그랗게 뜬 눈으로 서서히 떠나가는 어린 딸을

낯선 이국땅에 묻고 짐승처럼 울부짖던

어린 엄마의 끊어진 탯줄 같은 그리움을

 

양화진 묘지에 이르면 보인다

그분들의 피와 살과 영혼이 꽃으로 승화된 것을

                                                    

                                             -2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