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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시절 십자가의 추억과 초록별 첫 사랑의 이야기

배남준 2023. 2. 15. 09:45

 

 

 

 

월남전쟁에 참전, 전우들의 죽음을 바라보며 인생에 대한 회의감과 어릴적 십자가에 대한 아련한 추억들의 그리움이, 내가 교회에 대해 선한 마음을 갖게하는 동기가 되었다. 교회에 나오는 것과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 나는 교회에 나와서도 오랜 세월 후에 하나님을 영접했다.

 

구원의 십자가가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 것은 나의 국민(초등)학교 시절이었다.

 

4,5,6학년을 부산에서 공부했다. 당시는 6.25전란 중이었고 내가 다니던 피난 국민학교는 영주동 박가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었다. 미군들이 쓰던 군용 천막이 소년들의 교실이었고, 눈앞에 펼쳐진 산언덕이 우리의 운동장이었다. 나무와 풀꽃, 산새들이 소년들의 친구였고 바람까지도 우리의 친구였다. 그곳은 어린이들의 꿈의 동산이었다. 한 여름에 천막 양쪽을 걷어올리면, 시원한 산바람이 우리들 이마 위에 땀을 씻어 주었다. 음악시간에 산 위에서 부는 바람 시원한 바람 그 바람은 좋은 바람 고마운 바람, 여름에 나무꾼이 나무를 할 때 이마에 흐른 땀을 씻어 준대요소년들의 신나 부르던 주제가였다.

 

4학년 처음엔 사과 궤짝을 책상삼고 가마니 위에 앉아 공부를 했다. 천막도 밤 도적이 벗겨간다. 그래서 우리는 분단별로 숙직을 했다. 소년들은 궤짝과 거적을 이용하여 아늑한 공간의 그럴싸한 이층집을 만들고, 그 속에서 촛불을 켜놓고 그 당시 흔한 건빵을 간식으로 씹어가며, 머리를 맞대고 옛날 얘기랑 귀신 얘기랑 조잘조잘 밤을 새우다, 누가 잠들기라도 하면 타다 남은 성냥개비로 사정없이 불침을 놓고 좋아했다.

소년들의 유일한 운동은 닭쌈(닭 싸움)이었다. 따로이 놀이 기구가 없던 시절이었다. 한 다리를 손으로 잡고 한 다리로 껑충 껑충 박가산 언덕을 종횡무진 누비고 다녔다. 덕분에 중학교를 입학해서, 우리 거의가 그 반에 닭싸움 챔피온이 되었다.

 

산밑 저 건너 아래로 넓은 바다가 내려다보인다. 밤에 불빛 야경의 바다는 휘황찬란한 장관이었다. 바다는 언제나 소년들의 희망이었다. 꿈이었다. 항구에는 많은 큰 군함들이 그림처럼 늘 머물러 있었다. 이따금 뚜우- 뚜우- 뱃 고동 소리의 긴 여운은 마치 색소폰의 저음처럼 아직도 가슴 밑바닥에 애절한 그리움으로 남아있다. 그 중에도 새하얀 병원선이 나의 시선을 끌었다. 선생님은 스칸디나비아 3개국이 우리나라를 돕기 위해 보내준 적십자선이라고 설명해 주셨다. 웅장하고 아름다운 자태의 그 배 맨 꼭대기 위에는, 녹색으로 십자가가 크게 그려져 있었는데, 그 녹십자는 한낮의 햇살 속에서 유난히도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십자가는 서서히 동화 속에 백의의 천사처럼, 영원한 구원의 빛으로 다가와 소년의 가슴에 따뜻하게 묻혔다.

 

6학년 때는 남녀가 한 반이었다. 수업 시간이 시작될 때마다, 반장은 맨 앞줄에서 일어나, 몸을 돌려 차렷 경례선생님께 인사 구령을 외쳤다. 그 때마다 항상 마주치는 소녀의 눈빛이 있었다. 그 애는 나를 부끄러운듯 빤히 보고 있었다. 티없이 하얀 고운 얼굴에 눈이 크고 아름다운 소녀였다.

김홍순! 오랜 세월 마음 판에 새겨져 잊혀지지 않는 이름이다.

중학교 입시를 앞두고, 매일 야간수업이 있었다. 그때는 힘든 시절이라, 간식은 아이들 거의가 굶거나, 겨우 건빵 정도였다. 달걀은 어쩌다 보는 귀한 음식이었다. 그런데 홍순이는 용하게도 늘 계란 한 개를 준비해왔다.

그 삶은 계란은, 그 애가 직접 뜨개질해서 짠, 조그맣고 따뜻한 주머니 속에 얌전하게 들어 있었다. 그 때 소년들 모두가 장난꾸러기였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몇몇 친구들이, 그애의 계란을 서로 탐내서 빼앗으려고 욱박지르고 겁을 주었지만, 그애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기회를 봐서 슬쩍 손을 내밀면 아무런 반항도 없이 수줍게 나의 손에 그 귀한 계란을 쥐어 주었다. 나는 이 일이 재미나서 자주 그애의 신세를 졌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미안스럽다. 그 귀한 계란을 자기도 먹고 싶었을텐데... 그리고 그소녀의 따뜻한 사랑이 아직도 향기롭게 가슴에 전해온다.

남자와 여자들은 서로 교실 반을 갈라서 앉았다. 오락 시간이 되면 남자는 여자를, 여자는 남자를 지적해서 노래를 시킨다. 그 때 마음속에 은근히 좋아하는 애들을 서로가 지적했다. 홍순이는 남자애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그애는 어김없이 나를 지적해서 이름을 불러주었다.

언젠가 수업이 파 한 후, 저녁 노을이 짙은 영주동 산동네를 소년들이 지나고 있었다. 산동네 집들은 그당시 모두가 하꼬방 집이였다. 판자와 가마니, 미군용 박스로 겨우 집을 지었다. 짖궂은 그들이 마침 가까운 그 소녀의 집을 일부러 들려, 숨어서 마당을 기웃거렸다. 한참만에 나온 소녀는 허드렛 물을 버리고나서야, 소년들을 발견하고 놀라서 얼굴이 빨개졌다. 그 때 나는 그 소녀의 하얀 목에 걸린 목걸이에서 작은 십자가를 보았다. 뉘엿한 석양이 수줍은 그녀의 얼굴을 더욱 빨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 때의 소년들이 전란의 불행속에서 더욱 끈끈히 맺어진 그리움의 정으로, 지금도 자주 모이고있다. 선생님도 가끔 찾아 뵌다. 인생을 살아 오면서 곤하고 지칠 때에, 소년시절의 꿈과 희망이 우리에게 늘 신선한 힘과 용기를 주었다. 자연의 교실속에서 순수하게 피어난 갖가지 추억의 꽃들이, 장면으로 떠오를 때마다 거기엔 바다위 병원선의 커다란 녹십자와 

수줍은 그 소녀의 작은 십자가 목걸이가, 신기하게도 늘 자리를 함께 하고 있었다.

 

중학교 입시를 앞두고 밤 늦도록 호롱불 아래 수업을 했다. 귀가하는 길, 밤 하늘의 달과 별들은 고난의시절, 우리들의

큰 위로자였다. 총총한 별들중 유난히 반짝이는 저 초록별은 나의 정다운 친구였다.

자연 시간에 배웠던 무한한 우주와 질서정연한 천체들의 신비,,,,,,,,.

누가 우주를 만들었을까? 그 창조주는 어떤분이실까?

엄마는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계셨다. 밤 하늘을 우러러 돌뿌리에 채이는 것도 잊은채 하늘의 신에게 간절히 기도했다. "창조주님, 우리 엄마 병을 제발고쳐주세요!"

한 여름엔 마당에다 멍석을 깔고 모깃불을 피워 놓고 밤늦도록 별들과 대화를 한다.

소년은 적은 우주의 지식을 통털어 제법 사색에 잠겨본다. 그순간 창조주의 위대한 능력의 손길이 소년을

엄습한다. 한참후 소년은 살포시 잠이든다.

그리고 피난시절 먹기 힘든 과자와 사탕을 준다기에 교회에 몇번 나갔다.

지금은 얼굴조차 전혀 기억이 없는 주일학교 여선생님으로부터 성경속에 요셉의 이야기를 들었다.

유리창을 통해 아침의 환한 햇살이 포근하게 펴진, 차디찬 마루위에 무릎을 꿇고 옛날얘기처럼 재미있게 들으며 무척 행복했다. 그 때 배운 찬송가 "피난처 있으니 환난을 당한자 이리오라."

 

6.25 전쟁이 끝나고 서울에서 중학교를 다녔다. 경기중학교는 안국동 화동 언덕에 위치해 있었다. 명륜동에서 학교까지 늘 걸어서 다녔다. 오가는 길에 긴 창경원 돌담길이 있다. 그 길은 예나 이제나 아름다운 낭만의 데이트 길이다. 사춘기가 들어 그 길을 걸으며 자주 어린시절 순이의 모습을 떠 올렸다. 그애에 대한 그리움이 늘 마음 한 구석에 자리하고 있었다. 돌담길 낙엽을 밟으며 인생의 고독을 일찌기 깨달았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국민(초등)학교 동창회가 남녀 공동으로 한번 있었다. 그런데 홍순이는 나오지 않았다. 연락이 안됬다고 한다. 기독학교로 유명한 J여고를 다니고 있었다.  여학생들의 수다속에 그녀가 그렇게 예뻐졌다고 하는 얘기를 슬며시 곁 들었다. 그이후 더욱 그녀는 나의 그리움의 대상이되었다.

대학교 예과 때 시화전에 나는 그녀를 주제로 작품을 출품했다. 그 이후 지금까지도 그녀 소식을 모른다.

그리고 그녀는 나의 하늘나라 초록별이 되었다.

 

'TV는 사랑을 싣고' 프로를 보면 그녀를 한번 만나고 싶다고 아내 앞에서도 웃으며 얘기한다.

6.25 전쟁중 특별했던 어린 시절 추억은 지금도 자주 생각이 난다. 그리움과 아름다움이 함뿍 묻어난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곳엔 그녀의 수줍고 예쁜 얼굴, 하얀 목에 걸린 십자가가 언제나 저녁 노을속에 빛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