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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日경제 어려울 때 생각나는 / 포철 神話 박태준회장 & 겸손한 신앙

배남준 2019. 7. 11. 09:30



-[프레시안에 김민웅 목사가 기고한 추도문에서 발췌]


- 살아 생전에 전설

            중국 덩샤오핑의 탄식 "한국의 박태준을 수입해야"


                  [단독] '鐵의 남자' 박태준, 가족들에겐 한없이 따스한 남자였다


  박태준 회장님, 그 정정하고 총기 넘치시는 모습을 더는 볼 수가 없게 되었네요. 그러나 누가 보아도 범상치 않은 면모와 절도 있는 태도에 배어 있는 강한 의지와 투철한 정신은 이제 후대에게 감명을 남기는 위대한 전기(傳記)가 되었습니다.

생전에도 이미 "살아 있는 전설"이었던 생애는 공인으로서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지를 분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뿐입니까? 포항제철과 포항공대를 비롯해서 이 땅에 이루어놓으신 그 귀중한 업적은 두고두고 이 나라 역사에 빛나는 자랑스러움과 감사함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공(公)을 위해 사(私)를 뒤로 하는 멸사봉공(滅私奉公)의 평생은 오늘날과 같이 자기가

먼저인 시대에 더더욱 빛을 발할 것입니다. 그것은 "최고의 공인(公人)"이라는 찬사를 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평생입니다. 

군인, 기업인, 정치가로서만이 아니라 아버지로서, 그리고 종교인으로서 최선을 다해 사셨던 그 일생의 족적은 회장님을 기억하는

이들 모두에게 경탄과 그리움으로 가슴 속에 뜨겁게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그 모든 것들이 어디 그저 얻어진 것들입니까?

자신의 몸을 부수고 뼈를 깎고 희생을 한 결과가 아닙니까? 

그렇기에, 십 년 전 폐 수술을 했을 때 미국의 의사들은 그 폐 속에 가득한 모래분진을 보고 깜짝 놀라지 않았습니까?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그런 일을 감당할 수 있을까 싶은 나이 사십에 포항제철을 세우던 시절, 그 거친 모래바람을 들이키며

온 몸을 던진 그 세월이 남긴 흔적이 아닙니까? 

포항제철 세우며 마신 모래바람 

십년이 지난 뒤, 다시 병마가 재발하여 열어본 폐는 그 모래바람이 속에서는 멈추지 않아 딱딱하게 굳어져가고 있었던 것 아닙니까? 가족들과 함께 할 시간은 모두 국가를 위해 바치며 살아온 분의 삶은 그렇게 마무리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석화된 폐는 도리어 누구도 받을 수 없는 훈장이며, 이 나라의 발전을 위해 전력을 다한 존재에게 우리가 무엇을 빚지고 살아왔는지를 일깨우는 표식이기도 합니다. 

"제철입국(製鐵立國)"의 목표 하나에 모든 것을 걸고 젊음을 불살랐고, 일제 식민지 시대의 민족이 흘린 피의 값으로 세워진 포항제철이라는 인식을 철저하게 하신 회장님은 기업은 무릇 이윤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공적 책임을 지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 자신을

아낌없이 나누어야 한다는 철학을 몸소 행하셨습니다. 그런 까닭에 이 땅의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회장님을 존경하고

귀하게 아끼며 자랑스러워했던 것이 아닙니까?

돌이켜 보면 벌써 20년이 가까운 세월이 되었습니다. 포항제철의 회장 박태준과 목사 김민웅으로 미국 땅에서 만나 그 고단했던 시절의 마음을 일으켜 세우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종교적 차원의 교우만이 아니라 국가에 대한 생각, 역사에 대한 견해를 깊숙이 나누고

가족 간의 관계도 다져왔던 것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손자들인 큰 따님(진아)의 자제인 재호와 수연이는 제 아이들과 성별도 같고 동갑으로, 아주 어릴 적부터 성인이 된 지금까지 평생의 친구로 지내고 있는 것도 모두 다 이런 인연으로 시작된 일이었지 아니었습니까? 역사는 이렇게 대를 이어나가는 걸 보게 됩니다.

고난이 축복이 되는 길을 깨닫다 

▲ 고(故)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 ⓒ뉴시스


정치적으로 낭인(浪人)처럼 되었던 1990년대 초, 회장님은 미국에 오셔서 병고를 겪고 계셨습니다. 그건 일종의 "유배지에서의 삶"이었습니다. 한때 그 힘찼던 모습도 찾아보기 힘들게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계셨던 때, 큰 따님은 신앙의 문을 열고 저와 만나게 되었고, 그 믿음과 사랑은 아버지를 위한 기도로 이어졌습니다.

워낙이 과학적 사고와 합리적 판단에 철두철미하신 분이라 종교에 마음을 열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주변의 생각은 오산이었고,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하늘의 뜻에 대해 남모르게 깊이 알고자 했던 회장님은 "고난이 도리어 축복"이 되는 길에 눈을 뜨고 자신이 선택한 종교에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사모님은, 불교신자로 기독교 신자가 되는 과정이 힘드셨는데, 제가 "사랑의 종교를 선택하는데 불교의 바다를 버릴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하자 기뻐하시면서 기독교를 자신의 종교로 받아들이셨던 것도 기억합니다. 

지금도 저는 그 모습을 기억하면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큰 아들벌 정도밖에 되지 않는 젊은 목사 앞에서 두 분이 단정하게 무릎을 꿇고 정성을 다하여 성서해설을 경청하면서 성경책에 꼼꼼하게 뭔가를 열심히 기록하시던 모습 말입니다. 그런 두 분의 겸손한 자세로 말미암아 평소 회장님을 존경하고 따르던 이들이 믿음의 대열에 속속 합류했던 시절을 떠올립니다. 







[출처:2011.12.14 뉴데일리]


박정희 靈前에 올린 박태준의 보고서  
  

  "박태준 보고서"


 다음의 글은 박태준 회장이 박정희 대통령 묘소에 올린 25년만의 보고서이다.
 박태준 회장은 1992년 10월 포항제철 4반세기 大役事(조강연산 2,100만 톤)를 완성한 직후 朴 대통령의 지시를 완수했음을 알리는 보고서를 올렸다. 25년만의 보고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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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하! 
 불초(不肖) 박태준, 각하의 명을 받은 지 25년 만에   포항제철 건설의 대역사를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삼가 각하의 영전에 보고를 드립니다.
  
 포항제철은 '빈곤타파(貧困打破)와  경제부흥(經濟復興)'을 위해서는 일관제철소  건설이 필수적이라는 각하의 의지에 의해 탄생되었습니다.   그 포항제철이 바로 어제, 포항, 광양의 양대 제철소에 조강생산 2,100만톤 체제의 완공을 끝으로   

 4반세기에 걸친 대장정(大長征)을 마무리하였습니다.
 
   “나는 임자를 잘 알아. 이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어떤 고통을 당해도 국가와 민족을 위해 자기 한 몸 희생할 수  있는 인물만이 이 일을 할 수 있어. 아무 소리 말게!“
 
  1967년 9월 어느 날, 영국출장 도중 각하의 부르심을 받고 
 달려온 제게 특명(特命)을 내리시던  그 카랑카랑한 음성이 지금도 귓전에 생생합니다.
 
 그 말씀 한마디에, 25년이란 긴 세월을 철(鐵)에 미쳐,   참으로 용케도 견뎌왔구나 생각하니 솟구치는 감회를 억누를 길이 없습니다. 돌이켜보면 참으로 형극과도 같은 길이었습니다.
 
 자본도, 기술도, 경험도 없는 불모지에서 용광로 구경조차 해본일이 없는   39명의 창업요원을 이끌고 포항의 모래사장을 밟았을 때는  각하가 원망스럽기만 했습니다.
  
 자본과 기술을 독점한 선진철강국의 냉대 속에서 국력의 한계를 절감하고  한숨짓기도 했습니다. 터무니없는 모략과 질시와 수모를 받으면서  그대로 쓰러져 버리고 싶었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저를 일으켜 세운 것은   '철강은 국력'이라는 각하의 불같은 집념,
 그리고 13 차례나 건설현장을 찾아주신 지극한 관심과 격려였다는 것을  감히 말씀드립니다.
  
 포항제철소 4기 완공을 1년여 앞두고 각하께서 졸지에   유명(幽明)을 달리하셨을 때는 '2,000만 톤 철강생산국'의 꿈이 
 이렇게 끝나버리는가 절망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저희는 '철강입국(鐵鋼立國)'의 유지를 받들어 흔들림 없이 오늘까지 일해 왔습니다.  
 그 결과 포항제철은 세계 3위의 거대 철강기업으로 성장하였습니다.
 
 각하를 모시고 첫 삽을 뜬 이래 지난 4반세기 동안 연 인원 4천만 명이 땀 흘려 이룩한 포항 제철은 이제 세계의 철강업계와 언론으로부터 '최고의 경쟁력'을 지닌 철강기업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제 힘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필생의 소임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이 순간,   각하에 대한 추모의 정만이 더욱 솟구칠 뿐입니다.
 
 "임자 뒤에는 내가 있어. 소신껏 밀어 붙여봐"하신  한마디 말씀으로 저를 조국 근대화의 제단으로 불러주신 
 각하의 절대적인 신뢰와 격려를 생각하면서  머리 숙여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각하!
 일찍이 각하께서 분부하셨고, 또 다짐 드린대로 저는 이제 대임을 성공적으로 마쳤습니다. 
 그러나 이 나라가 진정한 경제의 선진화를 이룩하기에는   아직도 해야 할 일들이 산적해 있습니다.
 
 '하면 된다'는, 각하께서 불어 넣어주신  국민정신의 결집이 절실히 요청되는 어려운 시기입니다.
 
 혼령이라도 계신다면,   불초 박태준이 결코 나태하거나 흔들리지 않고 25년 전의 그 마음으로 
 돌아가 '잘 사는 나라' 건설을 위해 매진할 수 있도록 굳게 붙들어 주시옵소서.
 불민한 탓으로 각하 계신 곳을 자주 찾지 못한 허물을  용서해 주시기 엎드려 바라오며, 삼가 각하의 명복을 비옵니다.
 부디 안면(安眠)하소서!
                                     1992년 10월 3일 불초(不肖) 태준(泰俊)올림



조배숙(전 검사, 국회의원)  박지만 담당 변호사님의 국민일보 역경의 열매에서


...선고날 지만씨는 실형을 각오하고 법정에 섰다고한다. 그러나 집행 유예가 선고되자 나와 약속한대로 교회에 나가기로 했다.

"어느 교회에 가고 싶으세요?"

" 박태준 전 총리께서 출석하시는 소망교회에 가고싶습니다.

그래서 당시 소망교회 장로이셨던 전상학 부장판사께 연락을 드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