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생활 40년과 사순절 40의 의미는
(이종남 목사)
우리는 성경 창세기 7장에 방주에 들어간 후 40 주야 동안 땅에 비가 내린 기간에서 40에 대한 의미를 접하게 된다. 출애굽기는 모세가 출생하여 40년 동안 애급에서 활동한 것과 미디안 광야에서 40년간 훈련을 받은 것과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한 후에 광야생활 40년을 하게 된 동기와 이유와 목적이 실려 있다.
“미디안”이란 의미는 ‘다투다, 서로 싸우다, 다스리다’라는 뜻을 갖고 있는데 죄와 사망의 법과 생명과 성령의 법이 서로 싸우며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이 다투는 곳이 바로 미디안이며 생명과 성령의 법인 하나님의 사상으로 다스림을 받는 곳이 미디안이란 의미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모세처럼 미디안 광야에서 훈련을 받지 않으면 애급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탈출할 수 없다.
모세의 처음 40년은 ‘나는 무엇인가 할 수 있다’고 자신만만한 생각을 했다. 그 다음 40년은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마지막 40년은 ‘나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인물이다.
또한 율법의 기초인 십계명을 받기 위해서 40일간 시내 산에 올라가 있었다. 그리고 가나안을 정복하기 전에 정탐꾼들을 40일 동안 가나안 땅을 탐지했다. 특이하게 출애굽기는 40장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출애굽기는 40이란 숫자에 이미지를 갖고 있다. 따라서 40이란 숫자와 출애굽기는 때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갖고 있다.
이스라엘 초대 왕인 사울은 백성들에 의해 왕으로 선택될 만한 인물이었는지를 시험하는 40년의 기간을 보냈다. 그 40년 동안 그는 백성들과 사무엘 선지자, 다윗과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죄를 범하고 말았다.
다윗도 베들레헴 광야에서 아버지의 양을 목양할 때 블레셋 사람들에게 40일 동안 훈련받았다. 베들레헴의 의미는 ‘떡, 전쟁, 싸우다’라는 뜻을 가졌는데 하나님의 정돈된 말씀을 받아먹으면 먹을수록 육신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서로 싸워 영적 전쟁이 일어나게 되는 곳이 베들레헴이다.
여기서 블레셋의 뜻은 “올바르게 심판이 되도록 굴러가게 하는 존재”가 바로 블레셋으로 다윗을 40일 동안 공격해 온 것은 육의 생각을 깨뜨리고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고 하나님의 법과 하나로 동침하도록 훈련시킨 것이다. 따라서 우리 주변에 블레셋이 마땅히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없게 해달라는 기도는 안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요나는 여호와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낯을 피해 다시스로 도망갔다. 그러나 하나님의 징계를 받은 후 니느웨 성에 들어가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고 외쳤다. 그렇지 않았으면 니느웨는 폭삭 멸망했을 것이다. 아담 이후 40세기가 지나서 비로소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으며 예수님께서 40일간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다. 또한 부활하신 후 제자들과 40일간 이 땅에 계셨다. 십자가 사건이 있은 지 40년 후 예루살렘의 멸망이 찾아왔다.
특히 사순절이 되면 특별새벽기도, 한 끼 금식, 40일 동안 예수님의 고난을 기억하며 40일 동안 유흥을 금하고, 자신의 몸을 연단하는 등 영, 육간에 성찰하는 기간으로 삼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기간 동안 영적으로 지향하는 신앙생활을 하다가 끝나고 나면 세상적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이다.
이렇듯 40이란 숫자는 성경에 자주 등장하지만 단순히 고난과 고통, 훈련 등의 개념으로 인식되고 있는데 히브리어로 ‘아르바임 솨냐’라는 의미는 질서 있게 정돈된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로 동침하기 위해 반복을 계속해 나간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정돈된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장소인 광야 [미 드바르-미(무엇이 임하는 장소, 드바르=따바르(정돈된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질서 있게 하나로 동침하기 위한 반복된 훈련을 40년 간 받게 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깨달아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급에서 나와 홍해를 건너면 모든 것이 해결되어 노래하고 춤만 추는 일이 계속 있는 줄 알았다. 예수님을 믿고 나서 구원을 받아 기쁨을 안고 춤만 추면서 천국 길을 가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겨우 젖만 먹는 어린 아이 단계의 초보신앙이다.
애급과 가나안 사이에 있었던 광야는 직선거리 일주일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40년 동안 걸리면서 까지 가게 하신 하나님의 의중은 무엇일까? 젖을 떼고 광야 안에서 40년간 걸음마를 배우고 키가 자라며 영혼이 살쪄 가면서 그리스도의 분량까지 장성한 자로 커가는 기간이 바로 40년이란 의미를 갖고 있다.
육신의 속성을 일주일 만에 깨트려지지 않기 때문에 40년이란 세월이 필요한 것이다. 장성한 남자만 60만이었는데 여자, 어린 아이, 노인들을 포함한다면 200여 만 명이 광야 생활을 했는데 그 중에 1세대는 거의 다 죽고 여호수아와 갈렙만 제외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것을 기억하라.
지금 한국교회 성도 수가 천만, 천이백만 이라고 자랑하지 마라. 교인 수가 70만, 10만, 몇 만이라고 자랑하지 마라. 또한 교인 수가 10명이 안 된다고 스스로 맥 빠지지 마라. 천국을 가고 안 가고를 떠나서 광야, 즉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장소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고 통과하느냐? 못 하느냐? 것이 관건이다.
지금 내가 광야로 가고 있는 길이 넓은 길이 아니라 바로 생명이신 그리스도가 인도하는 아주 좁은 길이다. 그런데 그 길이 모래 바람에 의해서 눈에 보이지 않는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통과하다가 닳아 없어져 처음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가다보면 사람들의 수가 줄어들어 길이 보이기 시작한다.
40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내 안에 받아 들여 질서를 잡고 정돈되어지며 말씀을 하나하나 삶의 현장에 적용하게 되면 육신의 생각은 불태워지고 영의 생각으로 채워져 영혼이 강건하여지면 부활의 생명으로 승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40이란 사순절은 그 기간 동안 주님의 고난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평생이 사순절이며 40년만 훈련받는 것이 아니라 평생을 훈련받아야 한다. 이 글을 쓰는 필자도 말씀으로 훈련받고 있지 않다면 육신의 속성이 과거보다 더 강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 광야훈련을 포기하지 마라.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는 결과가 된다. (갈 3:3)
예수님도 사십일 동안 광야에서 금식하며 마귀 사탄에게 시험받은 것을 생각하면 우리는 마땅히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하나 삶의 현장에서 적용하게 되면 육의 속성은 자연히 죽어지고 영의 속성으로 살아난다. 주의 말씀을 적용하지 않으면 육의 속성이 살아나 영의 속성이 죽게 되는 그것이 바로 죄요, 사망이다.
출처: 창골산 봉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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