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간증

잃어버린 영혼을 향하여 - CCM 사역자 송정미 사모

배남준 2018. 8. 12. 08:17





노래로 위로하는 선교사, CCM 사역자 송정미

‘잃어버린 영혼을 향하여, 하나님 가라 하시면 어디든지’


아마도 작심했지 싶었다. 자기 이야기는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눈앞에 자기 일만 보이는 사람이라면 도무지 이럴 수는 없는 것이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당신의 이야기를 듣겠다’고 찾아온 사람 앞인데,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들 이야기보따리부터 풀어내면 어쩌란 말인가. 12월 24일과 25일 이틀간 ‘포니정홀’에서 열 번째로 열릴 ‘송정미의 Christmas in Love 콘서트’ 소식도 들을 겸 만난 자리였는데, ‘이러시면 곤란하지’ 않은가 말이다.

북한 실상을 알리는 ‘언틸 더 데이’ 뮤지컬을 힘겹게 공연하는 어느 뮤지컬 배우가 있는데 그녀가 자기보다 먼저 알려지면 좋겠다는 이야기에 무려 20분, 중국에서 10명의 장애인을 입양해 키우는 선교사 부부가 있는데 그 자녀 가운데 얼굴 화상이 심한 아이가 있고, 그래서 수술비를 마련하는 콘서트를 열었다는 이야기에 한 10분, 중동지역에서 소문도 내지 못하고 사역하는 선교사들이 공개 전도는커녕 검열 때문에 인터넷도 마음대로 활용하지 못해 안타깝다는 이야기에 또 10분이 흘러갔다. ‘이러다 오늘 이 인터뷰, 과연 될까?’ 싶은 염려가 슬그머니 밀려오는데, 송정미 씨는 태연스레 “저 요즘 이러고 살아요” 한다.

그러다 어찌 어찌 간신히 ‘수습’, 초등학교 시절로 돌아가는 데 성공! 어린이전도협회 수련회에서 예수님을 영접한 이야기와, 노래하는 선교사가 되려고 들어간 연세대학교 성악과 3학년 때인 1988년 극동방송 주최 제8회 복음성가경연대회에서 대상을 받고, (결국 한국에서 가장 유명해진) 여자 찬양사역자의 길로 들어섰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쯤에야 ‘이제야 어느 정도 짐작하고 기대했던’ 송정미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라 생각하며 안심하게 되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내가, 우리가 알고 있던 송정미는 ‘그런 것’이 다가 아니었다. ‘잘못 알았다’ 또는 ‘섣부른 예단이었다’라고 말하는 게 어쩌면 더 옳겠다 싶어졌다.

한국 CCM(Contemporary Christian Music)계의 디바 (diva), 심지어 대모(大母)로까지 불리는 송정미의 행보가 눈에 띄게 달라 보이기 시작한 때는 대략 3년 전부터. 12년간 봉직해온 숭실대학교 교회음악과 교수직을 사임하고 예수전도단의 로렌 커닝햄과 전국의 소도시로 소규모 공연을 다니거나, 소리 소문도 없이 러시아의 작은 독립국가들을 다녀오거나, 최근 11월에는 동남아시아의 선교사 컨퍼런스에 다녀오기도 했다. 뿐인가.

사당역 부근에 살면서 눈썰미 있는 이라면 주중에 2,4호선 지하철 사당역 7번 출구 앞에서 행인들에게 전도지를 나눠주며 ‘뉴욕의 거리전도자 지용훈 목사’처럼 노래로도 전도하는 그녀를 보았을 것이다.

남편이 코스타(KOSTA)의 국제대표를 역임하고 북한 어린이를 위한 푸른나무 NGO 대표이사이며 푸른나무교회를 담임하는 곽수광 목사라서, 부를 때에 ‘사모’를 꼭 붙이게 되는 CCM가수 송정미 씨. 그녀에게 그동안 무슨 일이 생겼던 걸까? 아니, 원래부터 우리가 알지 못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글 이한민 사진 주명규

-요즘 선교하러 다니시나 봐요?

올해만 해도 미국, 중국, 남아프리카 공화국, 싱가폴, 이스라엘, 두바이, 베트남, 말레이시아 등 해외로 많이 다니고 있는데, 지난 4월에는 ‘북 카스피 문화사역’이라는 이름으로 카바르디노 발가리아, 잉구쉬, 체첸, 다케스탄 같은 네 나라에 다녀왔어요. 러시아 남부 중앙아시아의 카프카즈(코카서스) 산맥 북부에 있는 나라들인데, CTS 스태프가 동행해서 8월에 ‘북카프카즈를 가다’라는 제목으로 다큐를 방영했고요.

체첸 같은 나라들은 아시다시피 러시아에서 독립하면서 분쟁과 전쟁이 끊이지 않아 난민들이 많고 경제는 피폐해지고 젊은이들은 문화에 굶주려 있는데, 모슬렘이 지배하게 되어 장기 선교사가 자유롭게 사역하지 못하는 나라들이거든요. 그곳에 송미니스트리와 트러스트무용단이 갔던 거예요.

-그들에게 우리말로 복음성가를 불렀습니까?

아니죠. 저도 복음송이 아닌 대중가요나 팝송을 부를 때가 자주 있어요. 러시아에 갔을 때도 그래야 했지요. 제 노래를 듣는 분들이 전부 크리스천이 아닌데, 전도가 금지된 나라에 가서, 그저 한국의 유명한(?) 가수라고 소개돼 노래하는 거니까요. 제가 러시아 말은 모르지만 발음은 비슷하게 배워서, 우리에게도 익숙한 ‘백학’(드라마 모래시계 주제곡)이나 ‘백만송이 장미’(심수봉 노래) 같은 러시아 노래를 불렀어요.

아리랑, 영화음악이나 팝송도 부르고…. 그런 노래들을 통해 그들의 마음을 열 수 있었어요. 어떤 목사님이 그러시더군요. 제가 가요나 팝송을 부를 때도 기름부으심이 느껴진다고…(웃음). 그 목사님이 저를 부르셔서 얼마 전 양화진에서 음악회를 열었는데, CCM가수를 부른 게 처음이지만 대중적인 곡들을 레퍼토리로 권하셨지요. 그래서 제가 대학생 때 작곡한 ‘축복송’은 앵콜송으로 부를 수 있었어요. 그 날 오신 청중들이 예수 안 믿는 지역주민들이었거든요. 참 의미가 있는 공연이었습니다.

-‘러시아 공연에서 기억나는 일은?

러시아에 갔을 때 잉구쉬에서만 공개 공연이 허락되지 않았고, 다른 세 나라에선 놀랍게도 우리로 치면 예술의 전당 같은 곳에서 콘서트를 허락해주었는데요, 제 생애 처음으로 크리스천이라곤 한 명도 없는 외국인 앞에서 노래한 거예요.

그런데 공연이 끝나도 일어설 줄 모르고 문화부장관 같은 분이 꽃다발을 주기도 하고, 한번은 한국 사람처럼 생긴 분이 무대로 냉큼 올라와 제 마이크를 뺐더니 “나는 고려인인데 이 나라에 한국인이 오게 해달라고 기도해왔다”며 울먹이시더군요.

다케스탄 공연 때는 어떤 부인이 대학생 딸을 따라 공연을 보러왔다가 “내 평생 영혼을 울리는 이런 노래는 처음 들었다”면서 눈물을 흘리며 손에 낀 백금 가락지를 빼주셨어요.

그 민족이 크게 감동받을 때 하는 풍습이라고 해요. 그러면서 “당신은 꼭 다시 와야 해”라고 신신당부하시더군요.

잉구쉬에선 대학교에 들어가지 못하는 대신 난민촌과 연결이 돼 아이들과 놀아주었는데요, 깊은 밤이 되니까 약과 술에 취한 부모들이 하나둘씩 나타나요. 공연장도 따로 없어 폭 2미터쯤 되는 난민촌 건물 복도에서 노래하고 춤을 추며 공연했는데, 밤늦도록 떠날 줄을 몰라요. 공연 후 선교사님들이 각 쪽방에 들어가 복음을 전할 때 많은 분들이 영접하시던 그날을 잊지 못할 거예요.

유일하게 종교가 허락되는 다케스탄에는 한국인이 헌금해 세운 교회가 있어요. 그 교회에 현지인 목사님이 계셨는데 극우 모슬렘의 총격으로 순교하셨어요. 홀로 된 사모님과 현지 교인들을 노래로 위로할 때 많이 우셨고, 그 지역에 퍼져 비밀리에 사역하는 선교사님들도 많은 위로를 받으셨어요. 그때가 부활절이었는데, ‘평안을 너에게 주노라’ 같은 찬양을 러시아어로 불렀습니다.

-송정미 씨가 하는 이런 사역을 무엇이라 정의할까요?

기쁨조가 되는 거죠, 선교사님들을 위한. 제가 큰 무대에서 콘서트를 할 수도 있지만 다섯에서 스무 명 남짓한 선교사님들이 모인 오지의 작은 콘서트도 사역의 현장이에요. 그 분들이 소명 따라 착한 일 하시는데, 선한 싸움 하시는데 낙망하지 마시라고요. 총알이 튀고 있는 현장에서 ‘내가 이거 뭐하는 일인가’ 싶어 포기하고 싶을 때, 그 사역의 이유가 사람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 다시 알려드리려고요. 그것이 제게는 선교이고, 제게 있는 것을 하나님이 쓰시는 일이고요.

제가 크리스마스 때마다 하는 ‘Christmas in Love’ 콘서트 객석의 10분의 1을 ‘오병이어 자리’라고 명하고 비워두거든요. 그 자리에 선교사님이나 성도 50명 이하 되는 교회 목사님 부부나 선교단체 간사님이나 탈북자 같은 분들을 모셔요. 하루는 어떤 사모님이 제게 편지를 주셨는데, 남편 목사님이 송정미 콘서트 티켓을 들고 오시더래요. “이런 게 어디서 났어요?”라고 물으니 “누가 주더라” 그래서 “우리한테 왜 줘요?” 하고 되물으셨대요. 그러자 목사님이 들은 대로 이렇게 말하셨대요. “우리가 선교사라서.” 그 말에 사모님이 펑펑 우셨대요. 잃어버린 자신의 정체성, 선교사로서의 사명을 다시 일깨워주어 고맙다고….

한국전쟁 때 마릴린 먼로가 위문공연을 왔다고 하지요. 그때 개런티도 많이 받았다지만 생명포기각서도 썼다고 해요. 죽을 수도 있다는 거지요. 저도 그것과 동일한, 어쩌면 그 이상의 헌신이 없으면 안 될 것 같아요. 선교사님들 손잡고 단지 제가 노래 하나 불러드리는 데서 끝나는 일이 아니거든요. 그 분들이 살아나면 그 지역이 살아나는 일이니까요.

어떤 선교사님은 공개적으로 사역을 보고할 수 있지만 어떤 지역의 선교사는 자신이 선교사라는 사실을 한국에서도 밝히지 못해요. 얼마나 힘들겠어요. 그 치열한 영적 전쟁의 최전방에서 무기력과 연약함을 느끼고 패닉상태에까지 빠질 때, 저 같은 사람을 통해서라도 “비록 지금은 아무 열매 없는 것 같지만 하나님이 일하고 계시고, 당신의 충성이 하나님나라에서 해같이 빛날 것”이라는 위로를 전해준다면 얼마나 힘이 될까요. 제가 아니라 누가 가더라도 위로를 받지 않으시겠어요? 하나님이 제게 그런 일 하라는 마음을 주신 거예요. 주님 오실 날 멀지 않았는데, 제가 콘서트 하고 앨범 내고 학생들 가르치고 문화 사역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제게 하나님이 또 새로운 사역을 보여주신 것이거든요.

-어떤 일이 사역의 방향을 바꾸게 한 것 같습니까?

바뀌었다기보다, 원래 절더러 하라고 시키신 일을 하고 있는 거겠죠. 제가 연세대학교 성악과 3학년 때인 1988년 CAM선교회 주최 복음성가대회 나가서 수상하고 이듬해 극동방송 복음성가경연대회에서 대상을 받았는데요, CAM 대회나간이유는 당시 제가 속한 SOUL선교회가 섬기던 폐렴 환자들의 겨울 생활비를 마련해보자는 것이었어요. 상금이 딱 그 돈이었죠. 그리고 이듬해 대회 나갈 때 받은 말씀이 시편 61편이었어요.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시 61:1,2).

제 대학 동기가 이한열인데요, 그가 시위하다 최루탄에 맞아 숨지면서 한창 어지러울 때였습니다. 당시는 경배와찬양 사역이 활발해질 때라 교회 가면 하나님이 계신 것 같은데 학교 가면 ‘혀 없고 손 없는’ 하나님 같다며 많은 친구들이 낙심했어요. 그럴 때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는 말씀이 사람의 관점으로 보면 매우 소극적인 태도 같지만, 사실은 가장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믿음의 표현임을 나누고 싶었어요. 그걸 노래로 표현한 것이 목사님이 되신 이유정 선배 작곡의 ‘오직 주만이’였고요, 그 노래가 제 마음과 맞았어요. 이 시대에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는 것이 요동치 않는 것임을 알게 해달라고, 그것이 가장 적극적인 믿음의 행동인 것을 나누게 해달라고 기도했고, 수상 소감 때도 그 고백을 했 었지요.

-그때 이미 사역자로서 기름부으심이 있었던 거네요.

1990년 제2회 선교한국 대회에서 고형원 선교사님이 찬양인도를 하시고 저는 싱어로 참가했는데요, 당시 주강사인 조지 버워 선교사가 각 지역의 이름을 부르며 헌신할 사람 일어나라시는데, 저는 어느 나라로 가야 할지 모르겠는 거예요. 그런데 버워 선교사님이 마지막으로 “어디든 상관없으니 하나님이 인도 따라 가기로 결단하는 사람까지 일어서라” 하실 때 일어섰어요. 그러면서 기도할 때 어떤 환상 같은 걸 보았는데, 많은 사람이 모여 있고 제가 마태복음 28장 말씀을 선포하며 노래할 때 수많은 사람들이 일어나 열방으로 나아가는 모습이었어요.

그 무렵 저는 이미 찬양사역자로 알려졌고 1집 앨범도 준비하고 있었는데, 샌디 패티처럼 멋지게 해보겠다는 생각일랑 다 접고 잃어버린 영혼을 향한 마음을 담은 앨범을 만들었던 거예요. 그것이 1집 ‘잃어버린 영혼을 향하여’(Heart for the Lost)였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고 선교사를 일으키는 콘서트가 이어지게 됩니다.

-콘서트를 통해 어떤 열매가 있었습니까?

류관순 기념관에서 첫 콘서트를 준비했는데,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올 줄 모르고 자리배정을 안 해서, 못 들어오신 분들을 이듬해 KBS홀에 다시 초청했어요. 놀라운 사실은요, 이번에 베트남 갔을 때 라오스에서 사역하는 여선교사님을 만났는데, 그 분이 그때 KBS홀 공연을 보고 선교사로 떠나기 전 두려운 마음을 다잡고 용기를 얻으셨다고 인사를 하셨어요. 저, 그런 인사 수도 없이 받아요. 하나님은 놀라우시죠. 20년이 지난 지금, 제가 그때 선포하고 격려하고 위로했던 분들이 현장의 베테랑 선교사가 되신 분들이 너무나 많거든요.

-10년 넘게 해온 교수 사역도 의미가 컸는데, 그만 두신 계기가?

하나님이 그러셨어요. 너 대학 보낸 건 그만 두라 할 때 그만 둘 수 있을 거 같아서라고. 저는 학생들에게 늘 이랬어요. 사람이 부르는 곳에서 노래하는 게 가수라면 사역자는 하나님이 가라 하시는 곳, 하나님 임재가 있는 그곳에 서는 사람이라고. 앨범, 콘서트, 사역만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 부르심을 부디 알라고. 그건 제가 늘 입버릇처럼 드리는 기도이기도 해요. 그런데 바쁘다보니 정작 제가 늘 그렇게 살고 있지는 못했던 것 같아요. 그러던 차에 겪은 몇 가지 일이 계기가 된 것 같긴 해요. 이라크에서 김선일 씨가 참수 당하던 날, 저는 홍콩에 있었는데요, 돌아오는 날 뜬금없이 추도식에서 조가를 부르게 해달라는 기도를 했어요.

그런데 부산에서 열린 장례예배에서 고 하용조 목사님이 설교하시는데 절 부르셨어요. 5집 앨범의 ‘평화가 있기를’을 부르겠다고 했더니 하 목사님이 “사람들 모르는 노래 하지 말고 축복송 불러라” 하셔서 (웃음) 고인을 축복했는데, 이듬해 1주기 때 친구와 가족이 저를 다시 부르셨어요. ‘평화가…’를 불러드렸지요.

배형규 목사님이 순교하고 그 일행이 돌아와 장례예배를 드리던 교회에서도 그 노래를 했는데, 유가족 대표 목사님이 은혜를 받으셨다며 생환하신 분들이 모여 있다는 모처로 저를 초대하셨어요. 그들을 위로하라는 마음을 주셔서 그 분들만을 위한 콘서트를 했습니다. 지금 그들 가운데에는 결혼하거나 중동 인근 지역에 다시 가서 자비량 사역하는 분도 계시죠.

-바라는 게 있다면?

저를 위한 중보기도입니다. 하와이 YWAM에서 사역하시는 선교사가 계신데 저의 영적 멘토이고 제가 엄마라고 불러요. 그 분이 저를 처음 만날 때는 제가 가수인 줄도 모르셨는데, 저를 위한 예언적인 기도를 하실 때 제가 ‘노래하는 새’(singing bird)라 하셨고, 둥지의 새가 아니라 이 나무 저 가지로 날아다니며 노래할 거고, 노래할 때마다 영적인 묶임이 풀리고, 그 나무들이 자라고 열매를 맺힐 때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 나무에서 쉼을 얻고 회복이 있을 거라 하셨습니다. 어떤 분은 제가 문화의 화살촉 끝부분이라고 축복하셨는데, 그 화살이 가는 곳마다 지성소가 될 것이고 하나님을 알고 예배하는 자들이 일어날 것이라고요. 그 말씀대로라면 제게 기도가 절실하지요.

하나님이 제가 초등학교 때부터 주셨던 말씀이 “더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내려라”고 하신 거예요. 그동안 그게 예배사역을 더 열심히 하는 것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이젠 불신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선교지와 선교사님들을 더 낮은 자세로 섬기는 일이라고도 생각해요. 지금도 ‘늪지’, ‘루디아’, ‘최묵수’ 등 저를 위해 중보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제 사역은 이제 저 혼자만의 일이 아니에요. 저는 악기일 뿐이고, 진짜 하나님의 상급을 받으실 분들은 저를 위해 기도해주시는 중보기도자들이신 거지요. 중보기도가 곧 선교거든요. 그 기도와 함께, 저는 어려서 다짐한 대로 선교사의 삶을 살고 싶어요.

                                                                                                       - 사랑 카페에서 옮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