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사회에서 ‘세속화’라는 말은 주로 탈(脫)기독교화를 뜻한다. 사람들이 더 이상 교회에 출석하지 않고 기독교 신앙을 가지지 않는 현상이다.
하지만 한국교회에서 세속화는 다른 의미로 사용돼 왔다. 바로 교회가 세상을 닮아가는 현상을 가리켜 왔다. 소금이 그 맛을 잃어 가는 과정을 세속화라고 부르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 5:13) 성경은 교회의 역할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수십 년 동안 한국교회는 세속화로 말미암아 시름시름 약해져 왔다. 물질주의와 외형주의, 성장주의, 이기주의로 병든 교회는 점차 앓아눕는 지경에 이르렀다.
성도들의 삶도 마찬가지다.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돈이나 권력, 성(性)을 은밀하게 때로는 노골적으로 추구해 왔다. 성도들은 교회에 다니긴 하지만 ‘실천적 무신론자’로 살았다. 여호와 신앙의 관습을 갖고 있으면서도 실상은 바알 종교에 빠져 살았던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과 유사한 모습, 다시 말해 교회에 다니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삶을 산 것이다.
성도들뿐 아니라 목회자들도 드물지 않게 그런 유혹에 빠지곤 했다. 이러한 세속화는 현재도 진행 중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한국교회는 ‘새로운 세속화’에 점차 물들어 가고 있다. 이전의 세속화는 천박한 기복주의가 성도의 삶을 지배했다면 새로운 세속화 시대에는 기존과 다른 가치가 추구되고 있다. 그것은 세상이 요구하는 정치와 문화, 과학기술이다. 교회가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건 때때로 요청된다. 교회가 문화를 완전히 배제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교회가 과학기술의 시혜를 입는 것도 좋은 일이다.
하지만 교회가 그렇게 세상을 존경하고 염려해 주며 세상이 바라는 바를 따르고 세상의 산물을 애용하는 가운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 세속화될 수 있다. 세상을 구원해야 하는 교회가 그저 세상으로 편입돼 그 일부가 돼 버리고 마는 것이다.
새로운 세속화는 이전의 세속화와 다를 바 없다. 교회의 본질적 사명을 상실하고 초월적이며 영적인 복음의 특성을 놓친다는 점에서 그렇다. 오히려 새로운 세속화는 더 위험하다. 이전의 세속화는 그것이 세속화라는 것을 적지 않은 사람이 감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새로운 세속화는 교회와 세상 양쪽에서 동경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새로운 세속주의에 빠진 교회는 정치 문화 기술 공동체는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의 근원적 악을 지적하고 방지하는 빛이나 소금의 역할을 수행할 수는 없다. 복음의 본질을 상실한 교회는 그 끝에 이르러서는 전적으로 세상과 동화돼 버린다. 그럴 때 사람들은 굳이 교회에 나갈 필요가 없다고 느낄 것이다.
세속화나 새로운 세속화의 처방은 한 가지다. 신앙의 본질을 회복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 하나님 나라의 주요 특징은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는 말씀이다.
그렇다면 존 파이퍼 목사가 말한 것처럼 기독교인이 투표하는 이유도 어떤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을 지지하는 것이 최종 목적이 돼선 안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나라의 의와 평강과 희락을 증진하기 위해 투표하는 것이다.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1) 이 말씀은 하나님 나라로 향하는 길을 보여준다. 복음이 가진 초월적이고 영적이며 종말론적인 성격을 놓친다면 그 끝은 교회와 세상에 모두 불행의 참사가 될 것이다. 그렇기에 영적으로 의식이 있는 사람은 교회의 세속화와 새로운 세속화 모두를 경계해야 한다. 오직 복음으로 돌아가 세상과는 다른 빛과 맛을 내야 한다.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닮아가야 한다. 그때 교회는 진정으로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공동체가 될 것이다. 그때야말로 비로소 세속화되는 교회가 아니라 세상을 대속하는 교회, 즉 ‘세속화(世贖化)’시키는 교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병훈 (고신대 신학과 교수)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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