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간증

수원이 낳은 세계적 인물 김장환 목사의 은인 -칼 파워스 상사의 감동 일화

배남준 2018. 5. 27. 22:38


한동대, 김장환 목사 ·美 크리드 총장에 명예박사학위 수여

-김장환 목사-

'하우스보이' 김장환 목사 인생역전 이끈 칼 파워스 상사 별세

  -은인 칼 파워스 상사와 함께- 


[펌]

2000년 7월 5일 쿠바의 아바나에서 김장환 목사는 제19대 침례교세계연맹(BWA)에 취임했다. 침례교세계연맹 총회장은 서구 선진사회의 존경을 받을 뿐만 아니라 그 영향력이 매우 크다. 전 세계 1억6000만명의 침례교인 가운데 미국인이 5000만명에 이른다.

김장환 목사는 먼저 BWA실행위원회에서 총회장에 단독으로 추대된 후 BWA 총회에서 '총회장 당선'이라는 절차를 거쳤다. 총회장에 추대될 때 BWA상임위원회는 김장환 목사를 추대하는 이유로 여섯 가지를 들었다.
"세계 선교에 비전이 있는 자, 성공적인 목회자, 기도에 열심히 있는 자, 부지런히 섬기는 자, 화합시키는 지도자, 복음적인 설교의 능력자."

이는 평소 김목사를 특징짓는 말이다. 여기에 '사랑이 많다. 성공적인 아버지와 성공적인 남편, 경영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이 주변 사람들의 평가다.

김장환 목사는 미국과 유럽 이외의 지역에서 침례교 총회장이 된 최초로 인물로 아시아와 제3세계 출신 목사들에게 희망으로 떠올랐다.

김장환 목사가 수원의 작은 마을에서 세계적인 종교지도자로 되기까지 행운과 함께 많은 사람의 도움이 있었다. 김목사는 1934년 경기도 화성군에서 태어나 가난한 소작농의 가정에서 5남매 가운데 막내로 자랐다. 어려운 형편이라 늘 끼니가 걱정이었다. 하지만 밝은 집안 분위기 속에서 사랑 받으면서 나중에 정치가나 사업가가 되어 다른 사람을 잘 살게 해야겠다는 꿈을 키웠다. 대대로 토속 신앙을 신봉해온 집안에 기독교와 관계된 인물이 단 한 명도 없어 김목사는 17세가 되기 전까지 교회에 나가본 일이 없었다.

김목사가 4학년 때 광복이 되면서 살던 동네가 수원비행장에 편입되자 가족들은 수원의 못골이라는 곳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전학 온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하여 명문으로 꼽히던 공립 수원농림학교에 4대1의 경쟁을 뚫고 합격했다. 6년제 수원농림학교에 들어갔지만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학업을 계속하기 힘들었다. 어떻게든 공부를 하고싶었던 그는 서울의 철도고등학교는 전액장학금으로 공부할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1950년 6월 26일 혼자 서울로 향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했지만 알지 못했던 것이다. 용산에 있는 철도고등학교를 찾아갔지만 정문에 시험이 무기연기 되었다는 공고만 붙어 있었다. 그냥 돌아서려고 할 때 어디선가 펑펑 터지는 소리가 났다. 그제야 전쟁이 났다는 사실을 알고 인파에 휩쓸려 다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 수원으로 돌아왔다.

김목사의 가족들은 수원에서 전쟁을 고스란히 맞았다. 여유 없는 데다 가족이 많아 피난 갈 엄두를 내지 못한 것이다. 수원은 곧바로 인민군에 점령당했고 학교는 무기한 휴업에 들어갔다. 다행히 수원은 격전지가 아니어서 가족 중에 해를 당한 사람이 없었다. 그 덕분에 열 여섯살 소년에게 전쟁이 그리 큰 두려움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되고 인민군들이 물러갔으나 여전히 학교 문을 열리 않아 소년들은 산에 나무를 하러 다니곤 했다.

김장환 목사가 열일곱 살 되던 해, 1·4후퇴 때 퇴각한 미군들이 죄수들을 다 풀어주고 텅텅 비어 있는 수원교도소에 잠시 머물게 되었다. 그가 친구들과 담장 밖에서 구경을 하고 있을 때 한 미군이 여러 친구 중에서 김목사를 손가락으로 지목하여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미군은 그를 막사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더니 난로를 가리키며 불을 지펴달라는 시늉을 했다. 눈치 빠른 소년은 재빨리 논두렁에 박아놓은 말뚝을 뽑아와서 난로불을 피워주고 시키지도 않은 청소까지 깨끗하게 해놓았다. 신발까지 반짝반짝하게 닦아 놓자 영특하고 부지런한 그를 매일 오게 했고, 경북 경산으로 내려갈 때 그를 데려 갔다.

막내아들을 전쟁통에 타지로 보낼 수 없었던 어머니의 반대가 심했지만 그는 영어도 배우고 일을 해서 돈도 벌고 싶었다. 일을 하고 받은 초콜릿이나 담배는 양키시장에 내다 팔면 바로 돈이 되었다.

미국인 칼 파워스 상사와 한국인 하우스보이 김장환

경산에 있을 때 군인들은 소년에게 '빌리'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빌리는 그곳에서 일생의 은인을 만났다. 다른 막사에서 인사 업무를 담당하던 칼 파워스 상사는 1950년 여름 한국에 오게 되었다. 당시 22세였던 칼 파워스 상사는 폭격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부모와 생이별한 어린이들을 보면서 자신이 단 한 명의 아이라도 이 전쟁에서 구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옆 막사에서 성실하게 일하는 빌리를 눈여겨보게 된 것이다. 칼 파워스 상사는 빌리에게 미국에 가서 공부를 시켜주겠다고 제안했고 늘 배움에 목말라 있던 빌리도 선뜻 따라가겠다고 약속했다. 여러 군인들이 미국에 데려가겠다고 약속하고는 말없이 귀국했지만 칼 파워스 상사는 빌리와 헤어져 전방으로 이동한 후에도 계속 빌리에게 연락을 했다. 1951년 5월 칼 파워스 상사가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 그린빌에 있는 밥존스 고등학교 입학 허가서를 들고 나타났다.

정말 가게 되자 빌리는 영어도 못하고 키도 작고 어머니가 못 가게 할 거라는 핑계를 댔다. 칼 파워스 상사는 직접 어머니에게 허락을 받겠다며 빌리를 데리고 수원으로 향했다. 환갑이 넘은 어머니는 고심 끝에 아들의 유학을 허락했다. 아들이 7년의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기 전에 세상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인지 어머니의 눈에서는 눈물이 쉴새없이 흘렀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종이봉지에 흙을 담아 주면서 고향생각이 날 때 다려먹으라는 당부를 했다.

1951년 11월 12일 빌리는 미국으로 가는 배에 올랐다. 전쟁중인 최빈국 한국에서 17세의 고등학생이 유학을 떠난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11일의 항해 끝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을 때 빌리는 놀라서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호롱불로 밤을 밝히던 수원에서 크리스마스 트리가 번쩍이는 신천지에 도착한 것이다. 아직 근무연장기간이 끝나지 않은 칼 파워스 상사 대신 먼저 귀국한 동료가 빌리를 마중 나왔고, 며칠 후 드디어 칼 파워스 씨가 사는 버지니아주 단테시에 도착했다.

마침 한국 복무를 마치고 돌아온 칼 파워스 씨가 빌리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빌리는 미국에 가서야 칼 파워스 씨가 그리 넉넉한 형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단테시에서도 한참을 들어가는 산골짜기에 사는 칼 파워스 씨는 곧 대학에 입학할 예정이었지만 자신의 결심을 실천하기 위해 빌리를 데려온 것이다.

빌리는 1952년 2월 사우스 캐롤라이나주의 기독교 사립학교인 밥존스 중학교 3학년에 편입하게 되었다. 기독교인이 아닌 칼파워스 씨가 빌리를 학비가 싼 버지니아주 공립학교 대신 기독교 사립학교에 넣은 것이 오늘의 김장환 목사를 탄생시킨 계기가 되었다. 군대에서 한 동료가 "밥존스가 외국학생들에게 관심이 있다"고 한 말 때문에 선택한 학교였다. 빌리를 조금이라도 편하게 해주려고 학비가 비싼 사립학교에 입학시킨 것이다.

밥존스 재단은 기독교 교육을 위해 밥존스 1세가 1927년에 설립한 학교로 매우 보수적인 학풍을 고수하고 있다. 근본주의 신학을 신봉하는 기독교 학교로 최고 수준의 교육을 받을 수 있는 명문으로 꼽힌다.

밥존스 재단은 유치원부터 대학원까지 한 울타리에 있는데 중학생부터 전원 기숙사 생활을 하게 되어있다. 엄격한 생활과 함께 매일 아침 채플에 반드시 참석해야 한다. 빌리는 말도 통하지 않는 가운데 학교생활을 하면서 어려움을 겪던 중 제리 메이저라는 신학과 학생의 전도를 받고 하나님을 영접했다. 지독한 외로움과 답답함에 시달리던 빌리는 한국말로 기도를 하면서 기운을 차릴 수 있었다.

선생님들이 돌아가며 방과후에 영어를 못하는 빌리를 따로 지도해주었고, 기숙사 동료들도 열심히 도와주어 첫 학기를 낙제하지 않고 통과할 수 있었다. 칼파워스 씨에 집에서 방학을 보내면서 빌리는 파워스 씨가 군인장학금으로 어렵게 공부하면서 자신의 학비를 댄다는 사실을 알고 더욱 열심히 공부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빌리는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영어가 익숙해진 데다 칼 파워스 씨를 실망시키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각오를 단단히 다졌기 때문이다. 반드시 뭔가 이룩한 뒤 한국으로 돌아가겠다는 일념도 한몫 했다.

미국 고등학교 영어웅변대회에서 1등 한 한국인

빌리가 더욱 자신감을 얻게 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 전국 고등학교 웅변대회에 참가하고부터였다. 전국 웅변대회가 열린다는 사실을 알고 칼 파워스 씨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 직접 원고를 써서 선생님께 지원하겠다는 결심을 밝혔다. 선생님은 동양학생이 지원한 것을 가상히 여겨 웅변연습을 도와주었다. R과 L 발음을 고치기 위해 입에 구슬을 물고 피나는 연습을 한 결과 교내대회에서 1등을 하고 학교 대표로 주대회와 전국대회에 나가 1등을 해 아이젠하워상을 받았다. 그 일로 빌리는 밥존스에서 일약 유명인사가 되었다.

방학 때 빌리가 1등 트로피와 부상으로 받은 텔레비전을 안고 칼 파워스 씨 집으로 돌아갔을 때 온동네에 화제가 되었다.

칼파워스 씨는 빌리의 학비를 대기가 버거울 때는 지역 신문인 '디킨스니언'지에 빌리의 사정을 알리고 모금을 하기도 했다. 많은 사람이 동양학생을 위해 성금을 보내주었고 빌리는 모금 문화에 대해 고마움을 느꼈다.

학교생활에 자신이 붙은 빌리는 과외활동에도 열심이었다. 하지만 사귀는 여학생이 없어서 의무적으로 참석해야 하는 학교 음악회에 언제나 혼자 가야했다. 키가 큰 미국 여학생들에게 호감을 느끼지 못했던 빌리는 고등학교 3학년 때 학교 식당에서 아르바이트하는 아담하고 예쁜 여학생을 발견하고 눈을 반짝였다. 용기를 내서 데이트 신청을 했을 때 트루디는 환하게 웃으며 빌리를 맞아들였다. 만능 스포츠맨인데다 학업성적이 우수하고 기숙사에서 벌점을 단 1점도 받지 않은 모범생 빌리는 이미 학교 내에서 인기스타였다.

두 사람은 음악회에 다녀온 뒤 편지를 주고받다가 2년 후 트루디가 고등학교 3학년 때 정식으로 데이트를 시작했다.

빌리는 고교 졸업 때 우등상을 받았고 그 소식은 빌리의 학비를 모금해주었던 디킨스니언에 보도되기도 했다. '빌리 김은 모히칸 문학단체의 일원이었고 스포츠 매니저이기도 했다. 또 학급 성가대원이었고 미국 미래교사회 밥 존스 고교 지부의 리더였으며 학생신문 '트라이앵글'지의 스포츠 편집자였다. 그는 사우스 캐롤라이나주 '민주주의의 소리' 웅변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고 빌리를 소개했다.

고교를 졸업할 때 빌리는 망설임 없이 신학대학을 선택했다. 미국에 와서 신앙을 갖게된 그는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의 신앙상담자와 신앙관련 모임의 리더로 활약하면서 믿음을 키워나갔다. 밥존스에서는 정기적으로 채플시간을 통해 바이블 컨퍼런스를 실시한다. 한국의 부흥회와 비슷한 형태인데 빌리는 그 예배를 통해 강한 비전을 받고 주말이면 대학생 형들을 따라 시골교회에 가서 전도도 하고 간증도 했다. 돈을 모아서 다른 지역에서 열린 빌리그레이엄 전도집회에 참석해 강한 도전을 받기도 했다.

신학대학 다닐 때부터 두각을 나타내

빌리는 대학교에서 한 학기를 마쳤을 때 파워스 씨 집과 가까운 롱브랜치 교회에 강단에 서게 되었다. 출석교인이 약 50명 정도 되는 작은 교회였다. 그 교회에 파워스 씨의 외삼촌이 다니고 있었는데 마침 부흥집회 기간을 맞아 서너 명의 강사를 초청할 때 빌리도 포함되었던 것이다. 빌리는 한시간 동안 한국 상황과 미국에 오게된 경위, 학교 생활, 앞으로의 꿈을 조리있게 강연했다.

그날 집회가 소문이 나면서 빌리는 단테시의 여러 교회에 부흥강사로 초청되었다. 뿐만 아니라 라이온스 클럽과 로터리 클럽에서도 빌리를 스피치 강사로 초청했다. 한번은 비행기를 타고 아칸소까지 가서 스피치를 하고 돌아왔다. 동양인이 거의 없는 지역이어서 한국에서 온 빌리의 흥미로운 스피치는 어디서나 인기였다.

빌리는 대학에 입학하면서부터 학비 이외의 경비는 스스로 마련하였다. 칼 파워스 씨가 공부에 지장이 있는 아르바이트는 하지 말라고 하여 주말에 강연을 하고 방학 때마다 동급생인 왈리의 집에 가서 일했다. 왈리의 아버지 왈도 예거 장로는 오하이오주 톨레도에서 닭과 칠면조를 가공하는 회사 코트랜드를 운영했다. 예거 장로는 미국 기독교실업인협회 회장을 3년간 역임한 신실한 크리스천이었다. 빌리는 방학 때 왈리집에서 함께 생활하며 미국 기독교인 가정의 삶을 체험할 수 있었다.

빌리는 대학교 3학년 때까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미국 시골 마을로 전도하러 가는 주말 전도여행에 빠지는 일이 없었다. 어디를 가든 키 작은 한국 청년의 스피치는 큰 감동을 안겨주었다.

4학년 때 빌리는 대학원을 마치면 한국에 가서 복음전도자로 살겠다는 결심을 굳히고 주말 전도여행을 더 열심히 다녔다. 학교생활이 익숙해져 어려움이 없었지만 배고픔 때문에 고통받은 적이 많았다. 기숙사에서 세끼 밥을 먹지만 용돈이 없어 군것질을 할 수가 없었다. 파워스 씨가 어려운 환경 가운데 자신을 도와준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빌리는 꼭 필요할 때만 지원을 요청했다.

빌리와 트루디는 좋은 만남을 갖고 있다가 트루디 언니 페기의 결혼식에 참석한 이후 자연스럽게 결혼을 결심하게 되었다. 미시간주 레이크뷰에서 열린 결혼식에 참석한 빌리를 트루디의 아버지는 마음에 들어했다. 빌리를 인근에 있는 프리 감리교회에서 저녁설교를 할 수 있도록 주선하기까지 했다. 트루디의 아버지는 설교를 들으며 빌리를 사윗감으로 점찍었지만 트루디의 어머니는 딸을 가난한 나라로 보낼 수 없다며 반대했다. 트루디의 어머니는 빌리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밥존스 대학교 총장을 만났다. 그 자리에서 총장은 "미국 사람이든 동양사람이든 결혼하려면 빌리 김보다 더 좋은 사람을 고를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트루디를 시골집에 데려 갔을 때 칼 파워스 씨의 얼굴이 그리 밝지 않았다. 시골로 시집오려는 여자가 없어 독신으로 지내고 있던 칼 파워스 씨는 트루디 때문에 빌리가 미국에 주저앉게 될까봐 걱정을 했다. 하지만 미국의 중산층 집안에서 어려움없이 자란 트루디가 산골집에서 스스럼없이 부엌일을 하는 것을 본 칼 파워스 씨는 빌리의 결혼을 축하해주었다. 칼 파워스 씨는 빌리가 공부를 마치면 꼭 한국으로 돌아가서 활동하길 바라고 있었다.

수원으로 돌아가기로 결정

빌리는 대학교를 졸업할 때 '1958년 밥존스를 빛낸 30대 동창생'에 선발되었다. 빌리와 같은 해에 졸업하기 위해 부지런히 방학 때마다 학점을 딴 트루디도 그해 8월에 교육학과를 졸업했다. 1958년 8월 8일 저녁 8일 두 사람은 미시간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빌리는 밥존스 신학대학원에 진학하고 트루디는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게 되었다. 트루디가 돈을 벌게 되자 빌리는 7년간 학비를 대준 칼 파워스 씨의 도움을 받지 않고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빌리는 1년 안에 대학원을 졸업하기 위해 무섭게 공부했다. 트루디도 매일 새벽 2시까지 빌리가 과제물 밀리지 않도록 도왔다. 대학원은 32학점을 이수해야 하는데 대학 때 부지런히 학점을 이수하고 섬머스쿨까지 다닌 빌리는 예정대로 1년 만에 신학석사학위를 받았다. 1959년 2월 단테침례교회에서 빌리가 목사 안수를 받던 날 칼 파워스 씨는 빌리와 뜨거운 포옹을 나누었다.

그해 11월 빌리는 한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트루디의 교사월급과 빌리의 부흥집회 사례비로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자신을 후원해준 칼 파워스 씨의 고귀한 뜻을 헛되게 해서는 안된다는 결심을 한 것이다. 일단 고국으로 돌아갈 배표 2장을 일단 마련했지만 가난한 고국에 돌아가서 선교활동을 하려니 모든 게 걱정되었다.

부부는 방안에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 한달에 50달러 씩 도와주는 분이 있으면 서슴없이 고국으로 떠나겠습니다"라고 기도했다. 귀국을 앞두고 캔턴 침례교회에서 부흥회를 했을 때, 그 교회에서 마침 매달 50달러씩 선교비를 후원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곧이어 왈도 예거 장로가 세계기독봉사회를 창설하여 김장환 목사의 한국선교를 후원하겠다고 나섰다.

친구들은 한국 선교 때 사용하라며 모금을 하여 4륜구동 포드 픽업자동차를 선물해주었다. 매달 선교헌금을 하겠다고 약속한 친구들도 있었다. 캔턴침례교회와 친구들은 40년 넘게 후원비를 보내주고 있다.

1959년 12월 불안한 눈빛으로 뱃전을 서성이던 17세의 하우스보이 빌리가 8년 만에 목사 김장환이 되어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의 옆에는 파란눈의 트루디가 함께 했다. 한국에 오기전에 캐나타에 가본 것이 전부인 트루디는 한국의 가난한 현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김목사의 어머니는 파란눈의 며느리를 따뜻하게 맞아들이며 아들의 귀국을 눈물로 환영했다.

두 사람은 처음 6개월 동안 못골 시댁에서 14명의 가족과 함께 살았다. 초가집의 재래식 시설에 살면서도 트루디는 불편해 하기 보다 눈을 반짝이며 모든 걸 신기해했다. 한국에 올 때 어떤 어려움도 이겨내고 선교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왔기 때문에 재래식 화장실의 고약한냄새 쯤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미국에서 유학을 하고 돌아온 김장환 목사를 서울의 유명 교회에서 담임목사로 초빙하겠다는 제안이 많았지만 김목사는 고향 수원의 청년들을 키우겠다는 각오로 그런 제의를 모두 물리쳤다. 김목사는 미국 농촌을 다니면서 선교활동을 벌이던 때의 경험을 살려 수원에서 청소년 전도를 하리라 결심했다. 김목사는 도착한 다음날부터 장터에 나가 설교를 하고 부지런히 다니며 수원의 사정을 돌아봤다. 1959년의 수원은 초가집이 즐비한 시골이었다.

귀국 6개월 후 김목사는 수원 변두리 허허벌판에 100평 대지에 28평짜리 집을 지었다. 학생들을 모아 영어공부를 시키고 외국에서 손님이 오면 접대를 하기 위해서였다. 워낙 외딴 곳이어서 도둑이 여러 번 들었고 트루디 여사는 아이를 업고 하루에 한 번 들어오는 버스를 이용해 장을 봐야 했다.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낳은 김목사는 혼혈인 아이들이 놀림받으며 자랐지만 외가가 있는 미국이나 서울의 외국인학교에 보내지 않고 수원의 공립학교에 입학시켰다. 자녀들을 고등학교까지 한국에서 공부시킨 후 미국으로 유학을 보내 자녀들에게 한국인이라는 인식을 확실히 심어주었다. 자녀들에게 초등학교 때부터 아이스케키 장사와 신문배달 등 아르바이트를 시키고 잘못했을 때는 확실한 체벌을 하여 강하게 키웠다.

고향 수원의 인재 길러내

초창기에 세계기독봉사회 본부에서 보내오는 선교비와 미국 각지의 친구들이 보내주는 후원금을 합쳐 후원금이 매달 200-300달러에 달했다. 당시로서는 매우 큰 액수였다. 그 가운데 30달러는 아내에게 생활비로 주고 나머지는 사역에 사용했다.

김목사는 선교사로 활동하면서 1959년 말에 교인 12명에 불과한 수원중앙침례교회를 맡게 되었다. 곧이어 수원 YFC(Youth For Christ)를 창설하고 한국 YFC 총재를 역임하면서 수많은 인재를 길러냈다. 1960년대와 1970년대 길러낸 인재들이 현재 교계에서 활발하게 목회활동을 하고 있다.

1960년대 초반에 김목사 부부의 행보는 수원 청소년들에게 한마디로 문화충격이었다. 주말이면 각 학교 강당을 빌려 대규모 집회를 빌려 부흥회를 열였는데 미국 YFC 노래사절단 '틴·팀'을 비롯한 많은 외국 연주팀이 내한하여 집회에 참석했다. YFC 집회는 초창기부터 1000여명이 모일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국내외 저명인사의 강연과 음악퀴즈, 스포츠, 세미나, 드라마 등을 프로그램이 다양했다. 흑인합창단이 와서 학교마다 순회를 하고 NBA 출신 선수로 구성된 농구단이 농구를 한 다음 트럼펫을 불며 복음을 전도했다. 별다른 놀이문화가 없던 시절에 수원의 청소년들에게 YFC는 즐겁고 매력적인 공간이었다.

학생들이 점점 늘어나자 학교 강당을 빌려 예배드리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1965년 말 안식년을 휴가를 얻어 미국으로 간 김목사는 8개월간 미국 전역을 누비며 20만달러를 모금해 기독회관 부지 1000평을 매입했다. 그후에 또 한번 모금여행을 하여 건물을 짓고 수원기독병원 대지 마련에도 힘을 보탰다.

1967년에 기독회관이 완공되자 직업소년학교를 개설해 매일 저녁 2시간씩 시내 구두닦이 학생 40여명을 모아 중등교육과 기술교육을 실시했다. 수원기독야간중학교도 개설하여 학업에 목말라하던 청소년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었다.

수원 YFC를 통해 200여명의 목회자가 배출되었고 그 가운데는 지금 대형교회를 이루고 활발한 목회를 하는 목사들이 다수 있다. 이들은 청소년기에 "김장환 목사를 통해 수원에서 세계를 느꼈다"고 회고하곤 한다.

김목사는 많은 학생들을 미국후원자와 연결하여 미국 유학을 시켜 인재로 길러냈다. 칼 파워스 씨가 자신을 미국으로 데려가 공부시킨 정신을 이어받아 그 혜택을 고향 후배들에게도 나눠준 것이다.

김장환 목사가 한국교계와 미국 사회에 크게 알려진 것은 1973년 한국에서 열린 빌리 그레이엄 전도대회의 통역이 계기가 되었다. 빌리 그레이엄 전도집회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이 모인 것으로 기록된 여의도집회에서 김목사는 놀라운 통역실력을 발휘했다. 거기에 어려웠던 유년시절과 미국 유학과정이 알려지면서 유명세를 더했다. 그 전부터 해외 집회의 빌리김이라는 이름으로 초빙되었던 김목사는 빌리 그레이엄 전도집회 통역이후 세계적인 부흥강사 대열에 서게 되었다.

미국의 유명교회와 유명 집회에 주강사로 초청받았고 미국에서 가장 비중있는 집회로 꼽히는 프라미스 키퍼스와 전세계 기독교 지도자가 모이는 국제순회복음전도자대회에서 주강사로 설교했다.

한국인이면서 세계인으로 살아가는 길

김장환 목사는 1973년부터 극동방송을 맡아 지금까지 이끌어오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 등 복음이 들어가지 못한 땅에 전파로 복음을 전하는 극동방송은 모금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김목사는 그동안 극동방송에서 사례비를 한번도 받지 않은 것은 물론 해외 집회 사례비나 서적 출판에 따른 인세 등 각종 수입을 모두 극동방송 운영을 위해 희사하고 있다.

김목사는 기독봉사회로부터 받은 선교후원금 외에 그가 일한 어떤 단체에서도 사례비를 받지 않았다. 수원중앙침례교회에서도 교회가 자립하기까지 20년 동안 사례비를 받지 않았다.

김목사의 두 아들도 목사로 활동하면서 세계 여러 곳에 초빙받아 설교하고 국내 여러 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다. 두 아들도 아버지를 본받아 여러 가지 일을 해도 딱 한 군데서만 사례비를 받는다.

김목사는 자신이 칼 파워스 씨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목사가 되었다는 것을 감사하며 무소유를 몸소 실천해 우리 사회에 큰 감동을 주었다. 김목사는 땅값이 아주 쌀 때 인계동에 있던 1200평의 땅을 사두었다. 미국에서 선교비가 오지 않으면 과수원을 하여 선교비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나중에 학교를 지으려고 따로 5000평을 싼값에 사두었다. 미국에서 모금한 돈으로 지은 기독회관과 엄청나게 오른 두군데 땅을 처분하자 65억원이 되었다. 김목사는 1994년에 이 돈을 중앙기독초등학교 건축금으로 희사하였다. 학교를 완공한 후 법인으로 등록한 뒤 김목사는 아무런 권리도 갖지 않았다. 재산이 하나도 없는 김목사는 지금 중앙기독초등학교 관리동에서 월세 40만원을 내고 산다.

중앙기독초등학교는 장애아동이 정상아동과 함께 교육받는 통합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김목사의 아내 트루디 여사는 오랜 기간 초등학교 한켠에서 쿠키를 구워 그 수익금으로 장애아동을 도왔다.

2005년 침례교세계연맹 총재직과 2004년 수원중앙침례교회 담임목사직에서 은퇴한 김장환 목사는 극동방송 사장으로 재직하면서 전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복음전도사로 여전히 지칠 줄 모르는 활동을 하고 있다. 지금도 빌리 김은 초청강사 1순위에 드는 인기 목사로 집회일정이 몇 년 후까지 잡혀 있다.

분당이 개발되었을 때 여러 교회에서 또다시 좋은 조건으로 김목사를 초빙하려고 애썼지만 그는 끝까지 고향 수원을 지켰다. 출석교인이 12명이었던 수원중앙침례교회는 1만5000명의 대형교회로 성장했다. 세계적인 인사가 고향을 지키며 고향 인재를 길러낸 것에 대해 많은 사람이 박수를 보내고 있다.

칼 파워스 씨는 1999년 9월에 정년 퇴직한 뒤에도 여전히 버지니아주 산골집에서 살고 있다. 세계적인 인사가 된 김장환 목사가 중요행사 때마다 초청해도 자신이 드러나는 게 싫다며 응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한국에 딱 두 번 다녀갔다. 결혼도 하지 않고 후원한 빌리가 세계적인 지도자가 된 것에 만족하고 있다. 파워스 씨는 빌리와의 인연은 '한마음의 소리'라는 수필집에 담아냈는데 오히려 빌리를 만난 것이 행운이라고 기록했다.

칼 파워스 씨는 빌리에 관한 것이라면 메모 한 장이라도 다 간직하고 있으며 빌리의 어머니가 미국갈 때 싸준 흙봉지도 여태 간직하고 있다. 빌리가 고등학교 때 웅변대회 때 부상으로 받은 텔레비전과 트로피도 소중하게 보관해놓았다. 김목사는 물론 자녀들도 미국에 갈 때마다 은인 칼 파워스 씨를 꼭 찾아뵙는다.

한국이 배출한 세계적인 복음지도자인 김장환 목사는 자신이 명성을 떨친 것은 한국에서 활동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미국에 그대로 있었으면 평범한 한명의 목사로 끝났겠지만 한국이라는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세계적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김목사의 삶을 '디딤돌 인생'이라고 표현한다. 자신을 도와준 칼 파워스 씨의 은혜를 다른 사람을 돕는 것으로 갚으며 살아가는 김목사는 수많은 사람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주었다.

그의 사역의 대상에는 인종과 민족과 문화의 차이가 없다. 온 세계 모든 사람이 그의 형제요, 친구이고, 복음의 대상이다. 그러한 그의 삶은 종교와 인종과 문화를 초월하여 그를 후원해준 칼 파워스 씨와 미국의 여러 교회들, 그리고 문화충격을 극복하고 수원사람이 된 부인과 자녀들이 함께 만들어준 것이다.

일평생 복음을 전파하고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 김목사는 아름다운 가정을 키운 것으로도 귀감이 되고 있다. 훌륭하게 자란 혼혈 자녀와 헌신적인 파란눈의 아내는 누구보다도 한국적이다. 수원에서 세계를 보게 한 김장환 목사는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라는 것을

몸소 보여주었다.                                        

                                                                                                                    -이근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