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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 기형도 시인 - 윤동주 시인 다음으로 많이 읽혀

배남준 2017. 11. 11. 11:20


기형도 시인

-기형도 시인 -

 

기형도 (시인) 문학관 건립
   기형도 시인 기념 문학관 (광명시)

 

[시인은 모태신앙으로 종교생활을 하고 있었다며 종교를 가진 사람들에게 죽음이 가지는 의미에 대한 설명을 하느라 목소리의 톤을 높이기도 했다. 죽음은 단지 통과의례라는 것이다.]

 

 

망설임 끝에 정한 졸업논문의 제목은 `기형도 시인의 시 세계 연구'였다. 계획서를 제출하고 논문을 쓰는 동안 시인의 흔적을 따라가 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먼저 찾아간 곳은 시인의 묘가 있는 안성 천주교공원묘지였는데 몇 단지인지도 모르고 갔다가 그냥 돌아왔다.

일요일 오후였으므로 직원들은 모두 퇴근을 한 후였다. 미리 관리인에게 전화해 자세한 위치를 알아보고 2주일 후 다시 찾아갔다.

 

10단지 12번 묘역.

시인의 묘는 평범했고 잡초가 무성했다.

3주일쯤이 지난 어느 날에는 망월동의 제3묘역을 어슬렁거리면서 시인처럼 기록용 사진을 찍었다.

주차장에 세워둔 자동차의 타이어가 녹아 내리지 않는 것이 이상한 무더운 날이었다.

 

시인의 집이 있는 소하리에 갔던 날은 비가 내렸다. 번지수를 확인하고 갔지만 시인의 집을 찾을 수 없었다.

두 번째 가서 시집에 실린 사진 속의 풍경을 퍼즐게임을 하듯이 맞춰 나갔다. 야산과 늘어선 전봇대, 멀리 보이는 산의 윤곽. 시인의 집은 그렇게 찾을 수 있었는데 시집 속의 흑백 사진을 집 크기로 확대해 걸어 놓은 것 같았다.

시인의 가족이 떠난 후로 버려진 집 마당은 공장의 부지로 사용되고 있었고 집은 가벼운 바람에도 곧 무너져 내릴 듯 위태롭게 서 있었다.

광복절 아침에 기형도 시인의 묘가 있는 안성 묘지에 한 번 더 가기로 한 것은 논문작업을 하던 국립중앙도서관이 광복절 공휴일을 맞아 휴관을 한 때문이었다.

안성의 공원묘지로 가는 길에 `죽주산성'과 `와우정사'에 들르는 소풍이라도 하고 나면 논문의 후반부 작업이 쉬워질 것이라고 부축인 사람은 L이었다.

 

가는 길은 용인을 통과해 가기로 하고, 기형도 시인의 산문집 <짧은 여행의 기록>을 사기로 했다. 그러나 찾아간 서점 네 곳에서는 “그런 책 없어요” 혹은, “반품했는데 주문해 드릴까요?”라는 대답만 들었다.

무리도 아닌 것이 <짧은 여행의 기록>은 기형도 시인의 사후 1주기인 1990년에 출간된 책으로 사후 10주기에는 그 아픈 유고시집 <입 속의 검은 잎>과 <기형도 전집>으로 묶여 다시 출간이 되었다. <짧은 여행의 기록>중에서 <기형도 전집>에 실리지 않은 부분은 친구 조병준에게 보낸 편지들이었는데 작품화하는 것으로 여과되지 않은 시인의 생각을 알 수 있어서 책을 구입하려 했던 것이다.

안성 천주교공원 묘지에는 오랜 비 끝에 개인 휴일을 맞아 많은 사람들이 성묘를 왔지만 시인의 묘로 올라가는 길은 수월했다.

야산에 조성된 묘지는 경사가 완만한 편이어서 주차장에 주차를 하지 않고도 묘 가까이까지 차로 올라갈 수 있었다. 이미 두 번 다녀간 경험이 있어 시인의 묘로 가는 가장 가까운 길까지 망설임 없이 단박에 올라갔다.

마침 앞에 서 있던 지프형 자동차가 빠져나가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으므로 그 차가 빠져나가기를 기다렸다. 잠깐 차안의 사람들을 보니 중년의 부부와 남자아이가 타고 있었다.

시인의 묘는 멀리에서도 누군가 다녀간 것이 역력해 보였다. 무성하던 잡초는 말끔하게 벌초하여 단정했고 내 손에 들려있는 달맞이꽃과 개망초 다발을 초라하게 만드는 국화와 백합이 바구니에 담겨 있었다.

시인의 옆자리에 누운 아버지 기우민의 묘에도 똑같은 바구니가 놓여있었는데 기우민의 기일이 8월 19일인 것으로 미루어 기일을 맞아 가족들이 성묘를 겸한 벌초를 다녀간 모양이었다. 초라하나마 들고 있던 꽃다발을 꽃병에 꽂고 있으려니 사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한 여인이 다가왔다.

좀 전에 내려가던 지프형 자동차에 타고 있던 여인이었다. 그녀는 산문집 <짧은 여행의 기록>이 출간될 때에 이미 고인이 된 시인 대신에 서문을 썼던 누이 기애도였다.

 

시 `위험한 家系·1969'에서 신문배달을 하고 몸에서 석유냄새가 나던 누이로 표현이 됐고―기애도는 신문배달을 하기는 했었는데 석유냄새가 났었는지는 잘 모르겠다고 했다―시인이 남긴 12개의 서가와 유품들을 보관하고 있는 누이가 바로 그녀였다.

 

기애도는 “아무래도 우리 손님인 것 같아 다시 올라 왔다”면서 말을 건넸다. `기형도 시인의 시 세계'에 대한 논문을 쓰고 있어서 소하리 집과 이곳에 몇 번 다녀갔다고 하자 소하리의 기억은 좋은 것이 없다면서, 기형도가 떠난 후로는 가 본 일이 없단다.

 

누이는 시인 생전의 몇몇 에피소드들을 말해 주었는데 달변인 것은 오누이의 공통된 언어습관인지 기애도 역시 달변이었다.

기형도 시인에 대한 연구나 논의들이 `비극적 세계 인식으로 인한 죽음의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말하며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는 완곡한 표현을 썼으나 표정만은 단호했다.

시인은 모태신앙으로 종교생활을 하고 있었다며 종교를 가진 사람들에게 죽음이 가지는 의미에 대한 설명을 하느라 목소리의 톤을 높이기도 했다. 죽음은 단지 통과의례라는 것이다.

 ‘植木祭’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시인은 ‘植木祭’에서 `희망도, 절망도 같은 줄기가 틔우는 작은 이파리일 뿐'이라고 표현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서른 나이도 살지 못하고 먼저 떠난 아우의 삶이 남아 있는 사람들의 회고나 유추처럼 비극적이지 않았기를 바라는 것은 혈육으로써의 바램이거나 희망이 아니었을까?

 

4학년 1학기가 지나던 8월 내내 논문에 매달리고 있었다. 논문 쓰는 동안 안성묘지에서 시인의 누이를 만난 것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추억이었다. 시인이 망월동 제3묘역에서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를 만난 것처럼 말이다. 이제 마지막 한 학기를 남겨둔 학창시절. 기형도의 `대학시절'이라는 싯귀절이 자꾸 입가에 맴돈다.

 

“나무의자 밑에는 버려진 책들이 가득하였다. / 몇 번의 겨울이 지나자 나는 외토리가 되었다. / 그리고 졸업이었다, 대학을 떠나기가 두려웠다.”―기형도 , '대학시절' 중에서

                  

 

                                                              -부경문해 카페글에서 옮김-   

 

 

 

   엄마 걱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