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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놀랍고도 위대한 기독교 나라 아르메니아

배남준 2017. 9. 9. 06:00

                 놀랍고도 위대한 기독교 나라 아르메니아

                                                                                                                                                                     최보일

   새벽 미명, 호텔 문을 열고 나서보니 바로 앞에 쌈지공원과 독립광장이 조성되어 있었고, 고대 유적 및 동상이 길손의 발길을 머무르게 하고 있었다. 아침 시간 고요함과 적적함만 묻어날 뿐, 어디에도 바쁜 일상은 찾아 볼 수 없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역사박물관 정부 종합청사 중 재무부·체신청·외무부 등의 중요한 정부기관이 광장을 에워싸듯 도열해 있었다. 이곳 수도 예레반Yerevan은 코카사스산맥에서 흘러내리는 흐라즈단강과 아라쿠사강의 지류가 흐르는 행정·문화·산업의 중심지이다. 뙤약볕 아래 노출되면 뜨거운 열기가 만만치 않아 한낮의 기온은 예보했던 대로 섭씨 40도에 육박할 것 같다. 이 기온이면 한국 같으면 살인 더위라고 야단이겠지만, 이곳에는 그늘에만 들어가면 시원해지는 대륙성 고기압 스텝기후 특성 때문에 크게 부담이 되지 않았다.

   예레반을 출발한지 두어 시간 후 먼저 ‘깊은 지하 감옥’이란 뜻의 코르비랍Khor Virap 수도원을 방문했다. 거대한 바위를 파내어 만든 감옥이 그 뒤에 수도원으로 바뀐 것이다. 지하 바위감옥에서 감옥생활을 하다가 풀려나와 왕을 도와 기독교를 전파하는 일에 앞장섰던 계몽자 성 그레고리가 있었기에, AD 301년 아르메니아에는 기독교가 국교가 된 것이다. 3세기 말엽 아르메니아의 왕으로 즉위한 트라다트는 신하 그레고리가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한 적의 아들이자, 기독교인임을 알고 나서는 굶어 죽게 할 요량으로 현재 코르비랍 수도원이 위치한 지하 감옥에 가두었다. 15년의 세월이 흐른 후 트라다트왕은 자신을 짐승으로 착각하는 정신착란에 빠져 국정을 돌보지 않았다. 한편 장기간의 감금생활 동안 그레고리는 기독교 신자가 되어 있었다. 트라다트왕은 그레고리의 기도로 치유를 받고 301년 최초로 기독교를 아르메니아의 국교로 선포하게 된다. AD 313년 로마의 콘스탄티누스대제에 의해 ‘밀라노 칙령’이 내려지고 기독교를 정식으로 인정한 것에 비하면 아르메니아는 10여년이 빠른 세계 최초 ‘기독교국가 태생지’가 된 것이다.

   지하 감방은 어두컴컴한 수도원 한 쪽에 지하로 내려가는 철제 사다리가 보였고, 그 깊은 공간이 바로 암흑천지의 감옥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겨우 한 사람이 통과할 수 있는 작은 구멍 아래로 4,5m쯤 천천히 내려가 보았다. 사방이 서너 평 남짓 돌로 된 감방은 몇 명만 서 있어도 갑갑하고 숨이 막힐 것 같이 음습했다. 저 입구를 막아버린다면 하고 생각하니 당장 죽음의 공포가 밀려왔다. 작은 촛불마저 켜 놓지 않는다면 사방은 칠흑같이 어두울 것이고, 음식은 입구천정의 구멍으로 달아내려 주는 것으로 연명했을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베드로나 바울도 이와 비슷하게 로마에 의해 햇빛도 안 들어오는 지하 감옥에서 모진 고통을 감내하였던 것이다. 오로지 예수를 전하는 포교활동이 죄명이었다. 죽음을 각오한 감옥생활을 마다하지 않은 그들의 숭고한 정신에 뜨거운 감동이 앞선다.

   코르비랍 수도원의 낮은 언덕에서 눈을 들어 앞을 보니 옅은 안개 속에서 영산 아라랏Ararat산이 우뚝 솟아 있었다. 삿갓 모양의 높고 웅장한 아라랏산은 봉우리가 만년설로 뒤덮여 있어서 마치 히말라야의 에베레스트산(8,848m)을 보던 감동이 재현되어 가슴 뭉클했다. 비록 아라랏산이 이곳에서 36km쯤 떨어진 터키의 영토에 속하지만, 아르메니아인에게는 민족의 영산이자 마음의 고향이다. 저 산 어느 중턱쯤에서 기원전 5,6천 년 전에 노아가 방주에서 비둘기를 날려 물 빠짐을 확인하고 닻을 내렸을 것이다.

   아라랏Ararat은 5,165m 큰 산과 3,925m의 작은 산으로 구분되는 死화산이다. 워낙 높고 범위가 넓어 이란의 북부와 터키의 동부와 접경을 이루고 있다. 성경 창세기 6-9장까지에 기록된 노아의 홍수에 나오는 방주의 크기는 6장 14-16절 기록에 의하면 고페르나무로 지은 배의 길이가 삼백 규빗(135m), 폭이 오십 규빗(22.5m), 높이가 삼십 규빗(13.5m) 정도의 부피이다. 이는 한 량에 240 마리 양을 실을 수 있는 화차 522량에 해당하는 용량의 상·중·하층 구조의 바지선 형태라고 보고 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한탄하사’(창6:5-7), 지면에서 쓸어버리기 위해 40일 주야 내리게 한 비로 세상은 온통 홍수로 넘쳐났다. 거의 1년을 동물과 함께 지냈던 노아 가족 8명이 안착한 곳이 현재 눈앞에 전개된 아라랏산 중턱이었다. 마음만은 만년설 빙하에 묻혀있는 방주를 확인하러 떠나고 싶지만 여건상 지금 당장은 어려운 일이다.

   수도원에서 바라보는 아라랏산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하고, 돌계단 길을 따라 광장까지 걸어 내려오면서 몇 번이나 아라랏산을 뒤돌아보았다. 마침 상인들이 비둘기를 팔고 있었고, 한 가족이 서너 마리의 비둘기를 사서 날리는 포퍼먼스를 하고 있었다. 인근 야산 언덕에는 마치 예루살렘의 시온산에서처럼 죽은 자의 돌무덤이 수도 없이 엎드려 부활의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약 한 시간의 거리를 자동차로 이동한 우리는 AD 4세기에 만들었다가 13세기 때 보완을 한 게그하드Geghard 수도원을 찾았다. 이 수도원은 체리나무와 호두나무가 우거진 숲길을 따라 내려가다 보니 위험한 절벽 아래서 모습을 드러냈다. 토사가 위험하여 정부에서 소개시키려고 했으나 주민의 반대로 그대로 머무르고 있다고 한다. 지금은 에치미아진 마더교회로 옮겨갔지만, 십자가 위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렀던 그 창을 보관했던 수도원으로 유명하다.

   가르니 계곡 위쪽 절벽 산허리에 있는 이 수도원은 4세기경 성 그레고리가 신성한 샘이 있던 동굴을 파서 만든 것으로 지금도 동굴 속에서는 맑은 샘이 솟아나고 있었다. 아자계곡의 절벽 바위를 위에서부터 파고 내려가면서 그 아래에 성전을 만들고 공간을 만들어 놓은 것으로, 이 공법은 마치 인도의 아잔타 석굴사원과 엘로라 석굴사원을 방불케 해 갑자기 온몸에 전율이 일어났다. AD 5-8세기 때 만들어진 인도의 힌두교나 불교 석굴사원보다 시기적으로 결코 뒤지지 않는다면 어느 쪽이 영향을 주고 또 받았는지... 변변한 도구조차 없을 당시에 무슨 연장으로 수십 아니 수백 년간 파도 되지 않을 이 동굴교회를 한두 개가 아니게 쪼아서 만들어 냈단 말인가! 천연 암벽을 위로부터 갈고 쪼아 이런 엄청난 건축공사를 했던 기독교인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며 묵묵히 정을 돌바닥에 박았을까?

   마침 5명의 가운을 입은 수도원 여성들이 신령스런 음성과 멜로디로 성가를 부르고 있었다. 동굴교회 안에서는 마치 소음악회라도 하듯 수많은 관광객들이 청중이 되어있었다. 동굴 내에서 화음이 에코가 되어 울려 퍼져 신비롭고도 묘한 감동이 주체할 수가 없을 정도로 밀려왔다. 이 수도원 교회는 2000년에 이르러서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되었다니 늦은 감이 없지 않았다.

   교회당 마당에는 각국에서 온 탐방객들로 붐볐다. 수도원의 바로 인근에 파르테논 신전을 축소해 놓은 모양의 건축물이 있어 탐방했다. 전면과 양 옆을 떠받치고 있는 성전의 돌기둥들의 규모와 조각이 예사롭지 않았다. 원래 태양신을 섬기던 산당이었는데 AD 4세기 국왕이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하고 나서 전국의 우상신 신전을 철폐하는 과정에서 공주의 애원으로 겨우 한 개가 남아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전한다. 마침 신전 제단 앞에서는 한 악사가 이 나라의 전통 민요를 ‘두둑Duduk’이란 악기로 연주해 주었다. 살구나무로 만들었다는 이 피리 모양의 악기는 리드와 8개의 구멍으로 이루어져, 마치 오보에와 클라리넷을 합쳐놓은 듯한 음색을 지니고 있었다. 묵직하고 낮은 음색이 이 나라의 슬픈 역사를 닮았음인지 곡조가 어둡고 구슬펐다. 차를 타고 계곡을 벗어나면서 내내 뇌리에 악사의 모습과 처량했던 악기소리가 떠나질 않았다.

   마테나다란Matenadaran 박물관으로 향하면서 27세 가이드 아가씨는 서울에서 체험했던 여러 가지 감동스러웠다는 얘기들을 풀어 놓았다. 무엇보담도 서민의 발로서 에어컨 잘 돼 있고 빠른 서울의 지하철이 그렇게 좋았단다. 예레반도 최근 지하철이 한 노선이 생겼지만, 길이는 12km에 10여 개 정류장뿐이란다. 서울은 자전거 타기에 전용도로가 있어 좋고, 휴식공간이 넓고 숲이 우거진 공원이 곳곳에 많아서 좋았다고 한다. 교통카드, 체크카드 같은 것을 써서 돈을 휴대하지 않고 거스름돈 받기에 신경 안 써서 좋았단다. 나이 드신 분들이 관악산 도봉산 심지어는 설악산까지 각종 예쁜 등산복 입고 나들이 하는 것도 보기 좋았단다. 바다가 없는 여기 살다가 해산물을 처음 먹어보니 참으로 신기했단다. 우리는 평상시 접하는 일이라 몰랐더니 외국인은 우리가 못 느끼는 것도 ‘좋았다’고 하는가 보다.

   마테나다란에 도착하여 박물관 안에 들어갔을 때 이곳은 아르메니아 문화의 ‘보고이며 자부심’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아르메니아는 AD 405년부터 독자적인 문자를 만들어 써 온 민족으로 이 박물관에 언어에 관한 모든 것을 망라하여 놓고 있었다. 중세시대의 철학·역사·의학·종교 관련 문서를 잘 보관한 박물관으로 약 17,000점의 필사본과 3만 점의 고문서를 보관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나라의 ‘한글’은 세종대왕께서 창제한 때가 AD 1443년이니까 우리보다 무려 천여 년이 앞섰다. 또한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등 큰 전란으로 ‘훈민정음 해례본’ 하나도 제대로 간수 못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기록문서 보관 실태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우리나라 한글창제는 대단하지만, 아르메니아의 경우는 ‘놀랍고 위대하다’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이 험난한 민족사 가운데서 이루어진 이 모든 문서들이 오로지 기독교 복음전파에 관한 것임에 새삼 놀라울 따름이다.(2016. 7. 25)

최보일(崔普鎰) : 경남 사천 곤양 출생. 2005년 ‘시와 수필’에 등단. ‘잃어버린 세월을 찾아서’로 고려문학 신인상 수상. 장로문학회 장로문학상 수상. 부산남일고 교장 역임. 문학박사. 고려문학회, 한국문인협회, 부산문인협회, 부산수필문인협회, 장로문학회, 신서정문학회 동인. <마음의 창을 열고> <배산언덕에서> <치자꽃 향기 바람에 날리니> <내 마음 깊은 곳에> <아름다운 여정 따라>등 수필집.

출처 : 한국장로문인회
글쓴이 : 최보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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