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후반 한국은 쇄국의 빗장이 풀리면서 통상이 본격화한다.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은 한국이 본격적으로 서구 세계에 문호를 개방한 상징적 사건이다. 이는 한국사회가 기독교와 만나는 출발점이기도 하다. 1884년 최초의 미국 장로교 선교사 호레이스 알렌이 내한한 이래 광복 이전까지 1500명의 해외 선교사가 활동했다.
이 과정에서 기독교는 한민족의 종교가 되었으며 ‘좁은 길’을 함께 걸었다. 수많은 기독교인이 뜻을 세우고 진정한 조국의 광복을 꿈꿨다. 이들은 해산된 군대를 모아 총을 들었고 자신의 전 재산을 팔아 무력기지를 마련했다. 학교를 세워 민족의 미래를 대비했다.
광복 70주년이 되는 15일, 국민일보는 민족의 기치를 높이고 일제 강점기의 가시밭길을 헤치며 광복의 주역으로 활동해 온 기독교인 민족 지도자들을 재조명한다.
1905년 11월 17일 일본은 대한제국에 대해 5개 항목의 강제 조약을 체결했다. 흔히 ‘을사5조약’으로 불리며, 체결 과정의 강압성 때문에 ‘을사늑약’이라 불린다. 늑약의 주요 내용은 조선의 외교권 박탈과 일제 통감부 설치였다. 늑약에 반대하는 상소운동과 무력투쟁이 전국에서 일어났고 상동교회 청년학원 출신들은 도끼를 메고 대한문 앞에서 상소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개혁과 민족운동으로 ‘신민(新民)’을 꿈꾸다
조선 명문가 이항복의 자손으로서 근대와 민족에 대한 의식을 일깨운 이회영(1867∼1932)은 무력으로 빼앗긴 나라를 무력으로 되찾기 위해 힘썼다. 그는 신학문을 적극적으로 접하면서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이상재 이상설 이범세와 교류했다. 그는 전덕기 목사가 담임으로 있던 상동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당시 상동교회는 독립운동의 요람이었다. 우국지사들이 교회에 모여 반일 민족운동을 전개했다. 이회영은 상동교회 내 민족교육 기관인 상동청년학원 학감으로 지내면서 청년 교육에 힘썼다.
그는 1905년 을사늑약 체결 후 을사오적에 대한 규탄을 주도했고 1907년 안창호 전덕기 양기탁 이동녕과 비밀결사 단체인 신민회에서 활동했다. 또 만주에 이상설과 이동녕을 특파해 교포 자녀 교육을 담당했던 서전서숙을 개설하는 일에도 참여했다.
무엇보다 이회영 6형제가 보여준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후대에게 깊은 울림이 되고 있다. 그는 독립 기지 건설과 군관학교 설치를 위해 만주로 집단 이주하기로 결정한 신민회의 뜻을 이어받아 6형제가 가지고 있던 모든 가산을 정리해 만주로 가자고 형제들을 설득했다. 이회영은 “차라리 죽을지언정 왜적 치하에서 노예가 되어 생명을 구도하면 어찌 금수와 다르리오”라고 말했다. 형제들은 제안을 기꺼이 수락했고 당시 가치로 40만냥, 지금의 수백억원에 해당하는 거금을 갖고 만주로 이주했다.
항일 운동가로서 그가 만주에서 먼저 시작한 독립운동은 동포 안착과 농업 생산을 지도하는 경학사를 조직하고, 무관학교인 신흥강습소를 설립한 것이었다. 이회영 6형제는 신흥무관학교 부지 매매에서부터 무관학교 학생들을 자신들의 집에 머물게 하며 돌봤다. 후대 사람들은 평생을 항일과 독립을 위해 싸워온 이회영을 ‘한국의 체 게바라’라고 불렀다. 이회영은 기독교 신앙을 깊이 가슴에 품고 잃어버린 대한민국을 찾기 위해 온몸을 불사른 실천가요 지도자였다.
김필순(1878∼1919)은 한국 기독교의 요람인 황해도 소래 출신이다. 그의 가문은 한국사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그의 매부 서병호는 서경조의 둘째 아들로 상하이 임시정부 내무의원을 지냈고, 동생 김순애는 김규식과 결혼해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막내 김필례는 한국YWCA를 창설했다. 1908년 세브란스의학교를 1회로 졸업한 김필순은 한국 최초의 면허 의사 7인 중 한 명이다.
그는 세브란스의학교 재학 중 황성기독교청년회와 상동교회를 왕래하면서 구국운동가로 활약했다. 신민회가 안창호를 중심으로 결성되자 그 일원으로 활동했고 중국 망명길에서는 헤이룽장성 치치하얼 부근과 밀산 지역에 ‘북쪽의 제중원’이란 뜻의 북제진료소를 개원했다. 독립투사들을 의료 지원했고 병원은 독립운동가들의 연락 거점으로 삼았다.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은 ‘민족운동가 아내의 수기’에서 도적의 총에 맞은 자신을 김필순이 100㎞나 되는 길을 달려와 치료해 주었다고 기록했다. 김필순은 대규모 농장을 꾸려 이상촌을 건설하고 중국 일대에 흩어진 애국 청년들을 규합해 독립군을 양성하는 독립투사 교육을 이루고자 했다. 그러나 42세의 나이에 의문의 죽음으로 생을 마감했다.
만세운동과 임시정부로 맞서다
일제의 강제 병탄과 무단통치의 터널은 길었다. 기독교인들은 3·1만세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으로 어두움을 헤쳐나갔다. 남강 이승훈(1864∼1930)은 사업의 성공으로 국내 굴지의 부호가 됐다. 그러나 시대 상황에 직면하면서 사업은 실패했고 점차 ‘민족’에 눈을 떠갔다. 낙향한 그는 교육을 통해 구국운동에 참여하기로 결심하고 신민회 평북지회 책임자로 일했다. 그는 1908년 민족 교육사업을 위해 평북 정주에 오산학교를 설립했다.
오산학교는 류영모 이광수 조만식 같은 민족 지도자들이 교편을 잡았고 주기철 함석헌 같은 인물을 배출한 민족 교육운동의 요람이 됐다. 이승훈은 105인 사건으로 감옥에 갇히면서도 신약성경을 100번 이상 탐독했고 기도와 금식에 전념했다. 1915년 출옥한 그는 세례를 받은 후 평양신학교에 들어가 신학공부도 했다. 여생을 교육과 독립운동에 바쳤다.
캐나다 선교사 스코필드(1889∼1970)는 3·1운동을 전 세계에 알린 ‘34번째’ 독립지사로 평가를 받는다. 세계적 수의학자였던 그는 세브란스의학교에서 가르치면서 1919년 3월 1일, 사진기를 메고 탑골공원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3·1운동에 대한 일본의 비인도적 만행을 세계에 알리고 조선 독립을 적극 도왔다. 또 제암리 학살과 수촌리 만행을 캐나다 선교부에 알리는 등 일본의 잔학함을 폭로했다. 그는 일본에 의해 ‘가장 과격한 선동가’로 낙인 찍혀 1920년 강제 출국됐다.
어윤희(1881∼1961)는 스코필드 선교사와 의남매를 맺은 여인이다. 개성에서의 만세운동으로 형무소에 수감됐지만 여성으로서의 기개를 가지고 행동했고 옥중에서도 만세운동을 이어갔다. 그의 옥중 투쟁은 스코필드 선교사에게 큰 감명을 주었고 어윤희의 삶을 담은 ‘꺼지지 않는 불꽃’을 기록하도록 했다. 출옥 이후에는 교회 여성들을 조직해 민족 계몽과 교육을 추진했다. 신간회 해체 이후에는 아동복지 활동에도 헌신했다. 1937년 개성에 유린보육원을 설립해 고아들을 돌봤다. 스코필드는 유린보육원 아이들을 위해 전 세계에 편지를 써서 후원금을 받아 보내기도 했다.
항일 구국 운동에 앞장서다
일제의 폭압 정치는 심해졌다. 그러나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았던 신실한 믿음의 7000명을 남겨둔 것처럼 독립과 광복을 기대하는 수많은 한국인이 국내외에 남아 있었다. 강우규(1855∼1920)는 1919년 9월 60세 노인 몸으로 서울에 새로 부임하는 총독 사이토를 향해 폭탄을 던졌다. 그러나 폭탄은 제대로 터지지 않았고 그는 검거되고 말았다. 그는 재판에서 “하늘이 명령하는 바에 의지했다”고 밝히며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는 옥중에서 매일 성경을 읽었고 아침저녁으로 기도하면서 한국 청년의 교육을 걱정했다.
‘섭섭이’ 차미리사(1879∼1955)는 상동교회를 다니며 기독교에 입문했다. 윌리엄 스크랜턴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은 그는 ‘미리사’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는 선교사 헐버트를 통해 중국 상하이 중서여숙에서 신학을 공부했고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가 교육 구국운동 단체인 대동교육회를 창립했다. 귀국 전에는 미국 중부의 스캐리트신학교에서 공부했고, 배화학당 사감과 교사로 활동하면서 애국애족 독립정신을 가르쳤다. 자립을 강조한 차미리사는 “남자의 덧부치가 되지 말라. 약자 소리를 듣지 말라”며 주인의식을 강조했다.
그는 조선여자교육협회를 창립해 여성 계몽운동에 힘을 쏟았다. 특히 84일간 전국의 67개 도시를 순회하며 생활 개선과 여성 교육에 대해 강연했다. 이 강연으로 1921∼1922년 사이에는 지방에도 여성 교육단체가 조직돼 성황을 이뤘다. 광복 후 그녀는 한반도의 두 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김구와 김규식의 남북 협상을 지지하는 성명에 서명했다. 남북 협상에 서명한 108인 중 유일한 여성이었다.
배재학당에 입학해 황성기독교청년회에서 윤치호 이상재 같은 기독교계 지도자들과 교류했던 여운형(1886∼1947)은 스무 살이 넘어 기독교를 믿었다. 이후 서울 승동교회를 담임하던 찰스 클라크(곽안련) 선교사의 조사로 5년간 교회를 섬겼고 1912∼1913년 평양신학교를 다녔다. 그는 특히 파리강화회의에 민족 대표를 파송해 일제의 존재를 각인시켰다. 또 일본으로 건너가 한국 독립을 주장하는 외교전을 펼쳤다.
여운형은 1933년 ‘조선중앙일보’ 사장에도 취임했다. 1936년 8월 9일 제11회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의 가슴에 달린 일장기를 지운 ‘일장기 말소 사건’은 그의 최고 업적으로 꼽힌다. 광복 이후엔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 위원장을 맡아 해방정국의 건국운동을 주도했다. 1946∼1947년에는 다섯 차례나 북한을 방문, 수뇌부와 회담했다. 진정한 독립과 좌우 연합, 남북통일을 꿈꾸던 그는 47년 우익 테러단체 ‘백의사’의 행동대원에게 암살됐다.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이 과정에서 기독교는 한민족의 종교가 되었으며 ‘좁은 길’을 함께 걸었다. 수많은 기독교인이 뜻을 세우고 진정한 조국의 광복을 꿈꿨다. 이들은 해산된 군대를 모아 총을 들었고 자신의 전 재산을 팔아 무력기지를 마련했다. 학교를 세워 민족의 미래를 대비했다.
광복 70주년이 되는 15일, 국민일보는 민족의 기치를 높이고 일제 강점기의 가시밭길을 헤치며 광복의 주역으로 활동해 온 기독교인 민족 지도자들을 재조명한다.
1905년 11월 17일 일본은 대한제국에 대해 5개 항목의 강제 조약을 체결했다. 흔히 ‘을사5조약’으로 불리며, 체결 과정의 강압성 때문에 ‘을사늑약’이라 불린다. 늑약의 주요 내용은 조선의 외교권 박탈과 일제 통감부 설치였다. 늑약에 반대하는 상소운동과 무력투쟁이 전국에서 일어났고 상동교회 청년학원 출신들은 도끼를 메고 대한문 앞에서 상소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개혁과 민족운동으로 ‘신민(新民)’을 꿈꾸다
조선 명문가 이항복의 자손으로서 근대와 민족에 대한 의식을 일깨운 이회영(1867∼1932)은 무력으로 빼앗긴 나라를 무력으로 되찾기 위해 힘썼다. 그는 신학문을 적극적으로 접하면서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이상재 이상설 이범세와 교류했다. 그는 전덕기 목사가 담임으로 있던 상동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당시 상동교회는 독립운동의 요람이었다. 우국지사들이 교회에 모여 반일 민족운동을 전개했다. 이회영은 상동교회 내 민족교육 기관인 상동청년학원 학감으로 지내면서 청년 교육에 힘썼다.
그는 1905년 을사늑약 체결 후 을사오적에 대한 규탄을 주도했고 1907년 안창호 전덕기 양기탁 이동녕과 비밀결사 단체인 신민회에서 활동했다. 또 만주에 이상설과 이동녕을 특파해 교포 자녀 교육을 담당했던 서전서숙을 개설하는 일에도 참여했다.
무엇보다 이회영 6형제가 보여준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후대에게 깊은 울림이 되고 있다. 그는 독립 기지 건설과 군관학교 설치를 위해 만주로 집단 이주하기로 결정한 신민회의 뜻을 이어받아 6형제가 가지고 있던 모든 가산을 정리해 만주로 가자고 형제들을 설득했다. 이회영은 “차라리 죽을지언정 왜적 치하에서 노예가 되어 생명을 구도하면 어찌 금수와 다르리오”라고 말했다. 형제들은 제안을 기꺼이 수락했고 당시 가치로 40만냥, 지금의 수백억원에 해당하는 거금을 갖고 만주로 이주했다.
항일 운동가로서 그가 만주에서 먼저 시작한 독립운동은 동포 안착과 농업 생산을 지도하는 경학사를 조직하고, 무관학교인 신흥강습소를 설립한 것이었다. 이회영 6형제는 신흥무관학교 부지 매매에서부터 무관학교 학생들을 자신들의 집에 머물게 하며 돌봤다. 후대 사람들은 평생을 항일과 독립을 위해 싸워온 이회영을 ‘한국의 체 게바라’라고 불렀다. 이회영은 기독교 신앙을 깊이 가슴에 품고 잃어버린 대한민국을 찾기 위해 온몸을 불사른 실천가요 지도자였다.
김필순(1878∼1919)은 한국 기독교의 요람인 황해도 소래 출신이다. 그의 가문은 한국사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그의 매부 서병호는 서경조의 둘째 아들로 상하이 임시정부 내무의원을 지냈고, 동생 김순애는 김규식과 결혼해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막내 김필례는 한국YWCA를 창설했다. 1908년 세브란스의학교를 1회로 졸업한 김필순은 한국 최초의 면허 의사 7인 중 한 명이다.
그는 세브란스의학교 재학 중 황성기독교청년회와 상동교회를 왕래하면서 구국운동가로 활약했다. 신민회가 안창호를 중심으로 결성되자 그 일원으로 활동했고 중국 망명길에서는 헤이룽장성 치치하얼 부근과 밀산 지역에 ‘북쪽의 제중원’이란 뜻의 북제진료소를 개원했다. 독립투사들을 의료 지원했고 병원은 독립운동가들의 연락 거점으로 삼았다.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은 ‘민족운동가 아내의 수기’에서 도적의 총에 맞은 자신을 김필순이 100㎞나 되는 길을 달려와 치료해 주었다고 기록했다. 김필순은 대규모 농장을 꾸려 이상촌을 건설하고 중국 일대에 흩어진 애국 청년들을 규합해 독립군을 양성하는 독립투사 교육을 이루고자 했다. 그러나 42세의 나이에 의문의 죽음으로 생을 마감했다.
만세운동과 임시정부로 맞서다
일제의 강제 병탄과 무단통치의 터널은 길었다. 기독교인들은 3·1만세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으로 어두움을 헤쳐나갔다. 남강 이승훈(1864∼1930)은 사업의 성공으로 국내 굴지의 부호가 됐다. 그러나 시대 상황에 직면하면서 사업은 실패했고 점차 ‘민족’에 눈을 떠갔다. 낙향한 그는 교육을 통해 구국운동에 참여하기로 결심하고 신민회 평북지회 책임자로 일했다. 그는 1908년 민족 교육사업을 위해 평북 정주에 오산학교를 설립했다.
오산학교는 류영모 이광수 조만식 같은 민족 지도자들이 교편을 잡았고 주기철 함석헌 같은 인물을 배출한 민족 교육운동의 요람이 됐다. 이승훈은 105인 사건으로 감옥에 갇히면서도 신약성경을 100번 이상 탐독했고 기도와 금식에 전념했다. 1915년 출옥한 그는 세례를 받은 후 평양신학교에 들어가 신학공부도 했다. 여생을 교육과 독립운동에 바쳤다.
캐나다 선교사 스코필드(1889∼1970)는 3·1운동을 전 세계에 알린 ‘34번째’ 독립지사로 평가를 받는다. 세계적 수의학자였던 그는 세브란스의학교에서 가르치면서 1919년 3월 1일, 사진기를 메고 탑골공원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3·1운동에 대한 일본의 비인도적 만행을 세계에 알리고 조선 독립을 적극 도왔다. 또 제암리 학살과 수촌리 만행을 캐나다 선교부에 알리는 등 일본의 잔학함을 폭로했다. 그는 일본에 의해 ‘가장 과격한 선동가’로 낙인 찍혀 1920년 강제 출국됐다.
어윤희(1881∼1961)는 스코필드 선교사와 의남매를 맺은 여인이다. 개성에서의 만세운동으로 형무소에 수감됐지만 여성으로서의 기개를 가지고 행동했고 옥중에서도 만세운동을 이어갔다. 그의 옥중 투쟁은 스코필드 선교사에게 큰 감명을 주었고 어윤희의 삶을 담은 ‘꺼지지 않는 불꽃’을 기록하도록 했다. 출옥 이후에는 교회 여성들을 조직해 민족 계몽과 교육을 추진했다. 신간회 해체 이후에는 아동복지 활동에도 헌신했다. 1937년 개성에 유린보육원을 설립해 고아들을 돌봤다. 스코필드는 유린보육원 아이들을 위해 전 세계에 편지를 써서 후원금을 받아 보내기도 했다.
항일 구국 운동에 앞장서다
일제의 폭압 정치는 심해졌다. 그러나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았던 신실한 믿음의 7000명을 남겨둔 것처럼 독립과 광복을 기대하는 수많은 한국인이 국내외에 남아 있었다. 강우규(1855∼1920)는 1919년 9월 60세 노인 몸으로 서울에 새로 부임하는 총독 사이토를 향해 폭탄을 던졌다. 그러나 폭탄은 제대로 터지지 않았고 그는 검거되고 말았다. 그는 재판에서 “하늘이 명령하는 바에 의지했다”고 밝히며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는 옥중에서 매일 성경을 읽었고 아침저녁으로 기도하면서 한국 청년의 교육을 걱정했다.
‘섭섭이’ 차미리사(1879∼1955)는 상동교회를 다니며 기독교에 입문했다. 윌리엄 스크랜턴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은 그는 ‘미리사’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는 선교사 헐버트를 통해 중국 상하이 중서여숙에서 신학을 공부했고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가 교육 구국운동 단체인 대동교육회를 창립했다. 귀국 전에는 미국 중부의 스캐리트신학교에서 공부했고, 배화학당 사감과 교사로 활동하면서 애국애족 독립정신을 가르쳤다. 자립을 강조한 차미리사는 “남자의 덧부치가 되지 말라. 약자 소리를 듣지 말라”며 주인의식을 강조했다.
그는 조선여자교육협회를 창립해 여성 계몽운동에 힘을 쏟았다. 특히 84일간 전국의 67개 도시를 순회하며 생활 개선과 여성 교육에 대해 강연했다. 이 강연으로 1921∼1922년 사이에는 지방에도 여성 교육단체가 조직돼 성황을 이뤘다. 광복 후 그녀는 한반도의 두 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김구와 김규식의 남북 협상을 지지하는 성명에 서명했다. 남북 협상에 서명한 108인 중 유일한 여성이었다.
배재학당에 입학해 황성기독교청년회에서 윤치호 이상재 같은 기독교계 지도자들과 교류했던 여운형(1886∼1947)은 스무 살이 넘어 기독교를 믿었다. 이후 서울 승동교회를 담임하던 찰스 클라크(곽안련) 선교사의 조사로 5년간 교회를 섬겼고 1912∼1913년 평양신학교를 다녔다. 그는 특히 파리강화회의에 민족 대표를 파송해 일제의 존재를 각인시켰다. 또 일본으로 건너가 한국 독립을 주장하는 외교전을 펼쳤다.
여운형은 1933년 ‘조선중앙일보’ 사장에도 취임했다. 1936년 8월 9일 제11회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의 가슴에 달린 일장기를 지운 ‘일장기 말소 사건’은 그의 최고 업적으로 꼽힌다. 광복 이후엔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 위원장을 맡아 해방정국의 건국운동을 주도했다. 1946∼1947년에는 다섯 차례나 북한을 방문, 수뇌부와 회담했다. 진정한 독립과 좌우 연합, 남북통일을 꿈꾸던 그는 47년 우익 테러단체 ‘백의사’의 행동대원에게 암살됐다.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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