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초 경기도 안산시 상록수공원 내 최용신기념관 일대를 순례했다. 스물여섯의 나이에 하나님만 바라보다 지병이 악화돼 숨진 근대 기독교 선각자 최용신(1909∼1935). 그가 샘골교회를 중심으로 농촌계몽운동을 펼치던 1930년대 안산 샘골은 바다가 가까운 벽촌이었다. 수원에 도착해 3·1운동의 장터 화성 발안을 지나 신작로 흙길을 따라 한참을 가야했다.
그런데 이 벽촌에서 샘골강습소를 세워 성경을 읽도록 가르쳤던 최용신이 어떻게 세상에 알려질 수 있었을까.
함경도 원산 미션스쿨 루씨여자고등보통학교와 서울 협성여자신학교를 졸업한 최용신은 재학중 YWCA 농촌사업부 파견으로 당시 수원군 반월면 샘골에 부임해 강습소를 세웠다. 그리고 2년9개월 만에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천국으로 향했다.
당시 조선중앙일보가 최용신의 부고를 세 차례에 걸쳐 연재했다. 이 기사는 이 신문 학예부장을 역임하고 충남 당진에 낙향해 집필에 몰두하던 심훈(독립운동가)이 프리랜서 기자로 작성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보도 직후 최용신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 ‘상록수’ 집필이 본격화됐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중앙일보 사장은 몽양 여운형(1886∼1947)이었다. 1936년 심훈이 ‘상록수’ 출판을 앞두고 장티푸스로 죽자 몽양은 그의 장례식에 참석해 심훈의 시 ‘조선의 남아여’를 읊을 만큼 심훈의 죽음을 애석해 했다.
몽양은 배재학당과 평양신학교를 다녔고 서울 승동교회 조사(전도사), 그리고 YMCA 활동에 열심이었다. 여운형이 김규식(1881∼1950·독립운동가) 등 기독교 리더들과 함께하며 최용신 이야기를 들었고, 이를 기독 언론인이자 작가인 심훈에게 취재 지시를 했다는 것이다.
독립운동가 몽양 여운형. 그는 해방정국에서 좌우합작을 이끈 정치가이기도 하다. 동시에 분단 상황에서 독재정권 또는 보수정권의 입지가 강화됐을 때 공산주의자로 내몰린 비운의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1947년 7월 19일 서울 혜화동로터리에서 괴한의 총격에 유명을 달리한다. 백중 테러가 난무하던 시대 중도파 민족주의자의 최후였다.
언더우드 소개장으로 중국 유학
1914년 몽양은 중국 난징 금릉대학에 입학하기 전 언더우드 선교사에게 금릉대학 신학부에 입학하겠다며 소개장을 써달라고 한다. 몽양은 1911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해 수료한 상태였다. 이때 언더우드가 의미 있는 말을 한다.
“그대 같은 이가 신학을 끝까지 공부할 것 같지 않다. 조선의 훌륭한 청년은 대개 정치사상에 관심이 많다. 나는 이런 것을 김규식에게서 발견했다. 그대도 반드시 정치운동으로 나갈 것이다.”
한국교계는 여운형이 신학을 하고 기독교 사상을 바탕으로 살아온 인물이라는 걸 잘 알지 못한다.
몽양은 1920년대 상하이 동북만주 시베리아 모스크바 등을 돌며 조선독립을 역설하고 다녔다. 일경은 이런 그를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구속했다.
“당신은 마르크스 유물사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유물론을 읽지 않았소. 나는 기독교 신앙인으로 하나님이란 관념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소. 나는 유물론이 유일한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소.”
1930년 6월 경성복심법원 형사부 재판기록에 나타난 몽양과 재판장의 일문일답이다.
앞서 몽양은 삶의 ‘내력’을 진술하라는 재판관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교인이 된 것은 평양장로파 목사 클라크(1878∼1961·곽안련)의 권유에서였고, 경성 승동예배당 전도사로 있으면서 평양신학교에서 2년 과정을 마쳤고, 1914년 가을에 신학 연구차 금릉대학에 입학하였소….”
지난 주일 오후 서울 청량리역에서 탑승한 경의중앙선 전철은 한강을 오른쪽으로 끼고 몽양의 생가가 있는 양평 신원역까지 내달렸다. 생가는 역에서 1㎞ 남짓이었다.
신원역은 몽양이 수시로 경성으로 향하던 ‘신문물’을 향한 통로였다. 승동교회 클라크 선교사는 몽양이 세운 사립 미션스쿨 광동학교에서 예배인도와 신식 학문을 가르쳤다. 몽양이 클라크와 언더우드 선교사 등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14세 무렵 친척 아저씨 여병현 때문이다. 미국 유학을 다녀온 여병현은 배재학당에서 영어 교편을 잡았고, 몽양은 그를 통해 배재학당과 아펜젤러 선교사 사택을 구경할 수 있었다. 문화충격이었다.
그때 성경을 처음 접한 몽양은 배재학당에 진학하겠다고 아버지 여정현에게 말했다. 하지만 완고한 조선시대 양반 여정현은 호되게 혼을 냈다. 몽양은 1900년 배재학당에 진학한다.
이듬해 어느 월요일 학교 조회에서 “주일 예배에 참석하지 않은 학생은 손들라”는 교사들의 질책에 몽양이 손을 들었다. 유일했다. 그를 비롯한 학생 대개가 전날 남산에 가서 운동을 하며 놀았던 것이다. 혼자만 고백했으니 유일하게 벌을 받았다. 실토한 사람에게만 벌을 주는 데 욱한 몽양은 민영환이 세운 흥화학교로 전학했다. 몽양의 기질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몽양은 1903∼1906년 들어 아내, 조부, 모친, 부친을 연달아 잃는 슬픔에 처한다. 이때 신앙에 더 깊이 의지하게 된다.
이 무렵 그는 상동교회 전덕기 목사 말씀에 감동받아 동생 여운홍(정치가)과 상동교회에서 살다시피 했다. 전 목사의 애국 강연에는 이동녕 이상재 이승훈 이회영 이시영 주시경 안창호 등 기독청년·기독지도자들이 구름같이 몰렸다. 한편 몽양은 여운홍이 미션스쿨 경신학교에 입학하자 승동교회 조사를 하며 학비를 댄다.
서울 승동교회 전도사 여운형
전 목사 등으로부터 민족현실에 눈뜬 열혈청년 몽양은 고향 신원리 묘꼴에 예배당을 겸한 광동학교를 설립(1907)한다. 물론 클라크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서다.
가나안농군학교 운동을 벌였던 막사이사이상 수상자 김용기(1912∼1988) 장로가 광동학교 출신이다.
“광동학교는 내가 열네 살 되던 해 입학했습니다. 여운형 선생의 뜻에 따라 기독교 애국정신을 가르치는 학교였어요. 성경과 산술 지리 역사 체육 등을 4년 동안 배웠습니다.”
김 장로는 생전 증언을 통해 “아버지가 ‘네가 장차 훌륭하게 되려거든 몽양 선생을 따라 배워라’는 말씀에 따라 몽양을 섬겼다”고 했다. 일제 강점기 기독교 애국계몽운동 지도자들은 기독교 사상 안에서 이렇게 성장했다.
한때 목회자가 되고자 했던 몽양은 정치가로 질주했다. 클라크 선교사가 “복음을 위하여, 또 당신 자신을 위하여 교회 일에 전념해 줄 것”을 간청했으나 속 깊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몽양과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시인 이기형(1917∼2013)은 저서 ‘몽양 여운형’에서 그 이유를 “꺼져가는 나라의 운명을 먼저 구해야 하겠다는 일념이 컸다”고 밝히고 있다.
김용기도 일경의 감시를 피해 자신이 건설한 남양주 ‘봉안이상촌’으로 피신한 몽양에게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라고 권고했다고 한다. “독립운동과 건국을 준비하느라 목사가 되고자 했던 사람이 그대로 떠나고(피살) 말았다”고 회고한 바 있다.
몽양이 복음과 애국이란 두 가치를 실현하고자 했던 광동학교는 현재 표석 하나로 남았다. 몽양의 생가와 기념관은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지원으로 반듯하다. 이기형이 1983년 방문했을 때만 해도 집터만 남은 폐허였다. 기념관 마당 앞에 ‘광동학교 터’라고 새겨진 비석이 풀숲에 서 있다.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 우리 역사는 수많은 기독 애국지사를 배출했다. 그러나 그 기독교 애국지사들에 대한 근대기독교 역사 관점에서 바라보는 학술연구 자료의 빈곤을 몽양 기념관에서 새삼 느낀다. 기독교 역사학자의 몫이다. ‘목회자가 아니라 정치가가 될 것’이라던 언더우드의 말은 맞았다. 그러나 몽양은 기독교 가치로 산 사람이라는 것을 현장에서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기독교 사상 지닌 ‘중도파 비극’… 여운형과 김규식
역사학자 신복룡 건국대 석좌교수는 여운형과 김규식을 기독교 사상을 지닌 중도파의 비극이라고 표현했다. 두 사람은 1922년 극동피압박민족회의에서 만났다.
이들은 신생국가 건설 과정에서 나타난 진보와 보수의 갈림길에서 성서의 ‘이웃 사랑’이라는 인식이 남달랐던 탓에 좌우 진영로부터 협공을 당하는 정치인이 됐다. 여운형은 신앙을 가진 후 집안 노비들을 해방시켰고, 불평등을 심화시킨다며 신주와 사당을 없앴다. 김규식은 고아원에 맡겨진 아이였다. 언더우드가 소년 김규식을 입양해 미국 유학을 보냈다. 늘 거절을 못했다. 장로가 아주 어울릴 인품이었다.
그들은 어느 한편에 서서 정적을 제거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당시 우익지도자 지지도 조사에서는 이승만 김구 김규식 여운형 순이었다. 네 사람 모두 신앙 안에서 성장한 인물들이었으나 두 사람은 극단의 선택을 할 수 있는 성품이 아니었다.
양평=글·사진 전정희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jhjeon@kmib.co.kr, 그래픽=이영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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