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간증

카이스트 서울대 수학교수 김인강 -신앙의 힘으로 소아마비를 극복

배남준 2017. 5. 25. 14:36

[펌] 비젼교회 블로그에서




돌이켜보면 45년 세월이 참으로 짧은 시간이었다. 그러나 꽤나 많은 일이 일어났다. 두 살 때 소아마비로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어린시절과 대전 재활원에서 보냈던 10대 초반의 막막했던 시간들, 고난스럽고 혼돈스러웠던 청소년기는 아직도 내 머릿속에 차마 잊을 수 없는 순간으로 각인돼 있다. 나는 신병훈련소로 유명한 충남 논산시 연무대 인근 과수원집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두 살 때 열병을 앓고 걸을 수 없게 됐다. 또래 친구들이 모두 초등학교에 들어갔지만 난 형과 누나들의 어깨 너머로 한글을 깨쳤다.

여름이면 마당에 멍석을 깔고 누워 달과 별과 은하수를 바라보며 잠이 들곤 했다. 나는 평생 동안 잊을 수 없는 세 번의 달을 기억한다. 처음의 달은 아주 어렸을 때, 아버지의 술주정을 피해 어머니 등에 업혀 과수원 한구석에서 바라보던 초겨울의 달. 두 번째의 달은 나름대로 인생의 계획을 안고 먼 유학길에 올라 외롭고 힘들면 찬송가를 부르며 바라보던 미국 샌프란시스코만 위에 떠 있던 큰 달이다. 세 번째는 삶에 지치고 피곤해 떠났던 인도의 라지스탄 사막에서 바라보던 모래사구 위에 떠 있던 달이다.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만 해도 깨닫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한순간이라도 나를 버리신 적이 없었다. 장애인 입학을 허락할 수 없다는 중학교 교장 선생님의 마음을 움직여 입학을 허락하셨다. 1981년 연합고사 만점이라는 선물도 주셨다. 서울대 수학과 합격의 영광도 받았다. 신림9동 지하 월세방 신세였지만 미국 버클리대학으로 유학도 보내주셨다. 광야와 같은 세월을 지나 고등과학원의 교수로 서기까지 내 인생의 모퉁이마다 그분은 ‘기적의 목발’로 부축해 주셨다.

나는 목발을 짚고 양쪽 폐가 터지는 고통과 절망 속에서 하늘로부터 오는 빛을 의지하며 고난의 바다를 건넜다. 별로 자랑할 것이 없지만 국민일보 역경의 열매를 통해 창조의 신비함과 아름다움이 담긴 삶과 신앙의 향기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과수원집 막둥이가 걸을 수 없게 됐다는구먼, 인강이 어머니 아버지 불쌍혀서 워쩐디야.”

두 살 때 소아마비에 걸리자 동네 사람들은 우리 집을 무척 걱정해줬다. 위로의 말도 때론 욕이 된다는 것을 모르는 이도 있었다. 아버지는 평소에는 “그까짓 거 괜찮아유, 나아지겠지유. 멀쩡한 아들이 둘이나 있는데 뭘유”하며 넘어가다가도 고주망태가 된 날은 달랐다. 집안이 한바탕 난리가 났다. 밥상이 뒤집어지고 세간이 풍비박산이 났다.

“자식이 저렇게 되도록 도대체 뭘 한겨. 여편네가 무식헌게 아이가 절름발이 된겨.”
나를 제외한 누나와 형들은 잘도 피했다. 하지만 다 큰 아들을 업고 도망가야 하는 어머니와 나는 달랐다. 아버지의 신세타령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동구 밖에서 이슬을 맞았다. 한글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아버지는 어머니만 못 살게 굴었다. 한 판 전쟁을 치른 듯한 그 긴 밤이 깊어가면서 어머니는 나를 무릎에 앉히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인강아, 걱정 말그라. 내 몸이 바스라져도 니를 고쳐줄텨. 내가 니 때문이라도 살겨.”

병원도 학교도, 전기도 없었던 외딴집에서 유년 시절을 혼자 지내야 했다. 고독이 무엇인지, 외로움을 어떻게 견디는지 나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홀로 배웠다. 병아리와 강아지가 가장 친한 친구였다. 놀다 자고 다시 깨면 또 그들과 놀았다. 따스한 봄볕, 황량한 앞뜰에서 희망처럼 꿈틀거리며 마른 대지 위에서 하늘로 올라가던 아지랑이, 과수원을 물들이던 연분홍 복숭아꽃, 원추리, 붓꽃들, 우물가의 포도나무와 보리밭 위로 날아오르던 종달새의 노래, 아카시아 꽃향기, 신작로에 피던 코스모스의 한들거림, 나는 이 소중한 죽마고우들을 영원히 잊을 수 없다. 어머니는 내가 아프고 나서 사방팔방으로 용하다는 의사들을 찾아다녔다. 한번은 순천에 살고 있는 고모의 소개로 순천에 있는 한 병원을 찾았다. 병원장은 환자를 잘 돌보는 소문난 의사였다. “(너)노무 늦었어요. 가망이 없어요. 집에 가서 기도 많이 하세요.”

어머니는 나를 업고 나오며 무척이나 서럽게 우셨다. “미국 의사도 별수 없나벼. 돌팔이 의사가 무슨 예수 믿고 기도나 하라는 겨.” 어머니 등 뒤에 나도 따라 울었다. 돌아오는 길, 기차 창문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먼 산 너머로 지던 황혼의 해거름을 넋 나간 아이처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 내 인생은 항상 저렇게 서글프게 지는 석양처럼 가슴앓이하며 살아야 될지도 모르겠구나.” 지금도 나는 지는 해를 보면 괜히 숙연해지고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 내 가슴을 적신다.

어느 해에는 사촌 누나의 소개로 시외버스를 타고 서울에 있는 큰 병원에 간 적이 있다. 차만 타면 멀미를 하는 모자는 아무리 눈을 감고 껌을 씹고, 박카스를 먹어도 결국 버스가 정차할 때면 토해냈다. 사촌 누나가 일하던 그 집에 며칠 동안 머물다가 유명하다는 의사 선생님을 뵈러 갔다. 그분도 마찬가지였다. “재활치료밖에는 방법이 없어요.” 재활치료가 뭔지도 모르는 어머니는 나를 업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아버지는 마당 한 편에 철봉대 같은 것을 만들어 주셨다.

입학할 때가 돼서 어머니는 나를 업고 1시간을 걸어서 초등학교에 갔다. 아홉 살 누나와 함께였다. 누나는 내가 혹시나 다리가 좀 좋아져 학교에 갈 수 있을지도 몰라 입학을 미루고 있었다. 어머니와 나는 교장 선생님이 들어오시기를 눈이 빠지도록 기다렸다.

 

교장 선생님은 초등학교 입학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냥 업고 가세요. 어머니, 이렇게 심한 장애아를 받을 수가 없어요.” 어머니는 허리를 연신 굽혔다. 그러나 한 번 돌아앉은 교장 선생님은 끝내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엄마, 빨리 집에 가고 싶어유.” 입학을 거절당하고 집까지 돌아오는 길은 몹시 추웠다. 어머니는 “아가야, 춥지” 하며 나의 언 발을 호주머니에 넣어주셨다. 아무 말도 없이 한참을 걷다가 어머니는 “시방도 겨울인디 왜 이리 더운겨?” 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나는 고개를 돌려 멀어져가는 학교를 바라보며 어금니를 악물었다.

당시 우리 집을 찾아오는 사람이라곤 강경 갈치장수 아주머니와 우체부 아저씨가 전부였다. 그들이 오는 날이면 어머니는 나를 보며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셨다. “이 놈이 앞으로 밥이나 먹고 살아야 할틴디 걱정시라 죽것시유.” 어머니의 한숨은 내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 밤마다 악몽과 공포에 시달렸다. 나선형의 깊고 어두운 구멍으로 곤두박질하는 꿈을 꾸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면 찢어진 창호지 틈으로 스며들던 하얀 달빛이 나를 위로했다.

낮이나 밤이나 나는 늘 외톨이었다. 부모님은 밭에 가시고 누나와 형들은 모두 학교에 가고 없었다. 혼자 놀다 잠들고 또 깨어났을 때 그 적막함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길고 긴 터널을 통과한 듯한 몽롱한 침묵, 나는 아직도 그 침묵의 무게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과수원 복숭아나무 밑에 앉아서 저 산 너머, 저 하늘 아래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을까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도 했다. 누나와 형들이 학교 숙제하는 것을 보며 어깨너머로 한글을 배웠다.

그땐 무슨 의미인지도 몰랐지만 ‘어린왕자’라는 책을 읽은 기억이 난다. 구압산에 사는 사촌형의 집에서 누군가 빌려온 그 책을 읽으며 세상에 홀로 존재했던 어린 아이는 여러 별들을 여행했던 어린왕자처럼, 이곳도 가보고 싶고 저곳도 가보고 싶었다. 그러나 나에게 주어진 세상은 너무나 달랐다. 외딴 집과 복숭아 과수원이 전부였다. 봄이면 분홍색 꽃이 만발하고, 여름이면 시큼한 복숭아, 가을이면 신도벼가 고개를 숙이고, 겨울엔 온통 하얀 눈으로 이불을 덮던 그곳. 우리 집은 이른 봄부터 바빴다. 복숭아나무 잔가지를 치고 딸기를 심었다. 여름이면 밤늦게까지 복숭아를 따서 크기대로 골라 상자에 담았다. 서울에서 온 큰 트럭에 모두 실어 줘야 하루의 일과가 끝난다.

나는 희미한 호롱불에 의지해 바쁘게 움직이는 식구들을 반쯤 졸린 눈으로 바라보곤 했다. 마당 한구석에 피워놓은 모깃불의 매운 연기를 맡았다. 하늘에 지천으로 깜박거리는 별들의 자장가를 들으며 혼자 잠이 들곤 했다. 우리 집은 복숭아 수확이 끝나면 담배를 따서 비닐하우스에 말려 꼭지를 짓고, 밭에는 깨와 콩, 감자, 고구마를 심고 벼농사를 지었다. 가을이면 벼를 수확하는 탈곡기 소리가 요란했다. 1년을 통틀어 단 하루도 손을 뗄 수 없는 고된 노동이었다.

아버지가 술에 취해 코를 골며 곯아떨어진 늦은 시간에도 어머니는 밀린 빨래와 설거지, 집안일 등으로 밤이 이슥해서야 눈을 붙이셨다. 교회에 나가지 않았지만, 어머니는 교회 새벽종소리가 울릴 때 가끔씩 잠꼬대 같은 기도를 했다. “불쌍한 우리 인강이 언젠간 걸을 수 있것지유?”



농사짓는 일이 고달팠지만 아버지가 가끔 주는 상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1928년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아버지는 학교 문턱을 넘은 적이 없다. 33년생인 어머니도 마찬가지다. 아버지 형제는 9남매였지만 제대로 얼굴은 뵌 분은 몇 안됐다. 일제 징용에 끌려가거나 베트남전에 참전했다가 돌아와 평생 떠돌이로 살고 계시는 분 등 대부분 기구한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일제 식민통치와 6·25전쟁 통에 간신히 살아남은 아버지가 맘대로 할 수 있었던 것이 술이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는 세계적인 격동기였다. 미국과 소련은 냉전으로 대립관계에 있었다. 그 이념 대결은 한반도의 허리를 잘라 놓았다. 더군다나 전쟁에서 가까스로 벗어난 지 10수년밖에 안된 남한은 반공과 민주주의, 경제발전이라는 세 가지 과제를 안고 있었다. 분단의 질곡과 정신적 아노미 상태의 지식인들은 허무주의와 실존주의 영향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세’라는 구호 아래 농촌의 젊은이들은 도시로 떠났다. 이웃나라 중국은 문화혁명으로 온 대륙이 숙청과 파괴의 현장으로 변했다. 일본은 이런 와중에도 재빠르게 독일을 따돌리고 세계 2위의 경제 강국으로 부상했다. 바다 건너 미국에서는 흑인운동과 마틴 루터 킹 목사와 케네디 형제의 죽음, 베트남 전쟁과 반전운동, 마리화나와 히피 문화 등으로 혼란스러웠다.

내가 태어난 66년에는 사이먼 앤드 가펑클이 ‘사운드 오브 사일런스’를 불러 유명해졌다. 이들은 또 이듬해에 더스틴 호프먼이 주연한 영화 ‘졸업’의 주제가를 불러 세계적인 스타가 됐다. 69년에는 인간이 사상 처음으로 달에 착륙해 우주 천문 과학 분야에 무한한 가능성을 열었다. 우리집은 이러한 거대한 역사적인 변화와는 무관했다. 아버지는 지식과 경제력, 권력도 없는 지극히 평범한 농부였다. 무지한 농부의 몸으로 잔혹한 역사적 소용돌이를 견뎠다. 결국 술로 자신의 영혼을 위로하며 가족을 건사하기에 바빴다.

아버지의 무능함은 어머니와 6남매에게 고스란히 전달됐다. 큰누나(옥정)는 어릴 적부터 어머니를 도와 집안일을 해야 했다. 맏이로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막둥이를 업어 키웠다. 둘째누나(국분)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대전에 있는 회사에 취직했다.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동생들을 위해 기꺼이 희생했다. 큰형(성태)과 작은형(일강)도 자신의 미래를 맘대로 설계할 수 없었다. 막내누나(현정)는 어머니(국예환)가 허리 디스크로 투병하고부터 어머니 대신 집안일과 아버지 수발을 도왔다.

하지만 아버지가 준 상처는 훗날 보약이 됐다. 우리 형제들은 가난과 불행을 이어받지 않으려고 무진장 애를 썼다. 특히 둘째누나는 우리 가족 중에서 가장 먼저 하나님을 만나 인생이 확 바뀌었다. 결혼 후까지 이어진 가난의 굴레를 모두 떨치고 지금은 대전시 가장동 대전중앙감리교회(안승철 목사)의 심방 전도사가 됐다. 둘째누나는 나에게 수호천사였다. 76년 어느 날 대전에서 회사를 다니던 누나가 목발을 사가지고 왔다. “철봉에 아무리 매달려도 걸을 수 없다. 이제부터 이 목발을 짚고 걸어라. 엄마도 허리가 아파서 더 이상 너를 업을 수 없잖아. 목발을 짚고 나와 함께 대전으로 가자.” 한동안 나는 목발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누나가 야속하고 미웠다. 목발을 잡는 순간 걸을 수 있다는 희망이 사라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집을 떠나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다. 외딴곳이지만 아늑한 집을 떠나려니 눈이 붉어졌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족 곁을 떠나는 순간이었다. 어머니 품을 벗어난다고 생각하니 감당하기 힘든 불안감이 엄습했다. 꼴도 보기 싫은 목발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국분이 누나를 따라 대전에 있는 재활원이라는 곳으로 갔다. 1976년이었다. 재활원은 군번 없는 군대였다. 공짜로 밥을 주는 법이 없었다. 식사 당번, 화장실 청소 등 각자 맡은 임무가 있었다. 우리는 형들의 감독 아래 매일 시계추처럼 움직였다.

첫날부터 일이 터졌다. 나보다 조금 먼저 온 아이가 시비를 걸었다. 순간 “참고 또 참아야 뒤여. 아무도 니를 봐주지 않을 겨, 그렁게 단디 하그라. 알것지?” 집을 나설 때 아버지가 던진 한마디가 생각났다. 하지만 무작정 당할 수만은 없었다. 코피가 터질 때까지 싸웠다. 서열을 정하는 통과의례였다. 한참 동안 싸움을 하고 나니 서러움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걸을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 이곳에서 도망가고 싶었다.

재활원에서 먹은 첫날 밥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밥이 아니라 톱밥을 먹는 느낌이었다. 김치는 차라리 소금덩어리였다. 그러나 100여명의 아이들은 이 밥을 게 눈 감추듯 식판을 비웠다. 멍하니 있다 보니 어느새 ‘식사 끝’이라는 구령이 들렸다. 나는 숟가락을 들다 말고 밖으로 빠져나와 화장실에서 소리 없이 울었다. 그날 이후 난 밤마다 편지를 썼다. “엄마, 보고 싶어요. 제발 나를 집으로 데려가 주세요.” 그러나 한번도 부치지는 못했다. 내가 참고 걸어가야 할 가시밭길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술 한 개라도 잘 배워야 목구멍에 풀칠이라도 허지” 하는 아버지 말씀이 생각나서였다.

그곳에는 휠체어를 타고 바이올린 등을 연주하는 음악동아리가 있었다. 베데스다라고 불렀다. 첼로 하나와 바이올린 2∼3개로 이루어진 앙상블이었다. 나는 바이올린을 켜고 싶었지만 악기를 살 수 없었다. 정말 음악을 하고 싶었지만 듣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음악은 나의 위로였다. 나의 형편과 세상 근심을 잊게 만들고 상상 속의 자유를 주었다.

큰 꿈이 없었다. 초등학교 과정을 마치면 집단 작업실에서 하루 종일 일했다. 인쇄기술이나 목각인형·장식품을 만드는 기술을 배우며 시간을 보냈다. 저녁에는 외출이 통제되었는데 원감의 눈을 피해 형들은 허락을 받지 않고 외출하다 적발되면 죽도록 맞았다. 나는 그래도 나은 편이었다. 사랑하는 부모님과 누님과 형들이 있다는 것이 큰 위안이었다. 부모도 없는 중증 장애아들이 수두룩했다. 어린 나이에 각양각색의 장애 때문에 부모에게서 버림받아 고아가 된 아이들, 시름시름 앓다 죽어가는 친구들. 가끔씩 영구차에 실려 가는 친구들의 시체를 보는 날은 밤새 악몽에 시달리기도 했다.

지금도 그때의 감정을 한마디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언젠가 알베르 카뮈가 쓴 책에서 읽었던 그의 절망과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하늘을 부정하지도, 하나님을 부정하지도 않는다. 다만 인간들의 고통에 대답하지 않고 침묵하는 하늘을 원망할 뿐이다.” 그러나 난 원망을 넘어 희망을 그렸다. 주일마다 설교 말씀을 전하러 오시는 목사님도 큰 용기를 주셨다. 눈을 감고 과수원 외딴집의 따스한 호롱불과 어머니의 땀냄새를 생각하면 힘이 생겼다. 나의 수호천사 국분이 누나가 오는 주일을 손꼽아 기다렸다.

 


재활원은 생사고락의 축소판이었다. 소심하고 가녀린 외모 때문에 아이들은 나를 여자라고 놀려댔다. 때때로 교회나 구호단체에서 빵과 우유를 우리들에게 나눠 주곤 했다. 그들은 크리스마스 때를 전후해 노래나 연극공연을 보여주었는데 1시간 정도의 일회성 공연이 끝나면 우린 더욱더 버려진 느낌을 감출 수 없었다. 대부분 10원짜리 과자 ‘라면땅’ 한 봉지에 희망을 걸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나에게 꿈을 심어준 선생님이 계셨다. 최화복 선생님이다. 그분은 일반 국민(초등)학교에 재직하고 계셨는데 장애 학생들을 교육하기 위해 스스로 재활원으로 오셨다. 선생님은 나에게 서예와 음악을 가르쳐 주셨다. 2년 동안 붓글씨를 열심히 배운 결과 전국대회에 나가 국무총리 상을 받을 수 있었다. 또 선생님은 공부할 때 중요한 단어를 사인펜으로 지우게 했다. 나는 교과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통째로 외웠다. 또 선생님이 지휘하는 합주부에서 하모니카를 불었다. 우린 삼육재활원에서 열리는 합주 대회에서 1등을 했다.

최 선생님은 내가 공부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아보신 선생님이었다. 그분은 내 인생을 통틀어 교육자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진심으로 보여주신 분이다. 진심으로 한 학생을 위해, 자신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주시는 그런 분이었다.

중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자 최 선생님은 이제부터 공부를 제대로 해야 한다며 일반 중학교에 진학할 것을 권했다. 하지만 그것은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중학교 교장 선생님도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과 똑같았다. 장애아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재활원 출신을 입학시킬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최 선생님은 포기하지 않으셨다. 오랫동안 교장 선생님을 설득하셨다고 했다.

“이 아이가 언젠가는 이 학교의 명예를 빛낼 것입니다. 재능이 보통 뛰어난 아이가 아닙니다. 큰 인물이 될 터이니 학교 문턱만 넘게 해주세요.” 다행히 그 교장 선생님은 나의 입학을 허락했다. 최 선생님의 설득 덕분이었다. 지금 최 선생님은 재활원을 나오셔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수지침을 놓아주고 계신다. 어렵게 중학교에 입학했지만 정신적인 방황은 계속됐다. 담임선생님이 걱정이 돼 상담 선생님을 소개해 주셨지만 나는 그 선생님이 두 손을 들 정도로 복잡한 아이였다.

교회에 나가면 괜찮을 것 같아서 언덕 위에 있던 방주교회에 나갔다. 그 교회 전도사님한테 나는 신앙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인간이 왜, 어디서 태어나, 어디로 가는가에 대해 꼬치꼬치 물었다. 하지만 전도사님은 나의 질문을 너무 쉽게 여겼다. 아직도 그런 것을 모르느냐며 외면했다. 내가 궁금해하는 것을 아무도 속 시원하게 대답해주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끈이 이어질 뻔했지만 단 몇 주일로 끝나버렸다. 하지만 언젠가는 다시 예수를 믿겠다는 생각은 버리지 않았다. 다행히도 학업의 열정은 식지 않았다. 부모님과 형제들의 짐이 되지 않기 위해 죽기 살기로 공부에 매달렸다.

참고서도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시험만 보면 항상 1등을 했다. 1981년 고입 연합고사를 봤는데 아무도 상상하지 못하는 일이 벌어졌다. “인강아, 니가 연합고사에서 만점을 맞았다야, 이것이 시방 꿈인 겨? 생신겨?” 나를 제일 아껴주시던 담임선생님과 영어 선생님이 집으로 찾아오셨다. 두 선생님은 나를 번갈아 꼭 안아주셨다. 며칠 후 나는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TV 방송에 출연했다.


1982년, 충남고에 1등으로 입학했다. 허리 한 번 제대로 못 피시던 어머니가 허리 디스크로 꼼짝을 못하시게 됐다. 더 이상 과수원 농사를 지을 수 없어서 부모님은 과수원을 헐값에 팔고 대전으로 오셨다. 6남매와 부모님은 조그마한 집 한 채에 사촌 누나와 함께 전세로 살았다. 참 오랜만에 식구들이 다 모여 살게 되었다. 하지만 안정적인 수입이 없었다.

특별한 기술이 없는 아버지는 공사장 잡부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그러나 대학생 3명에 고등학생까지 학생만 4명인 집안을 돌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큰형은 입주과외로 집을 나갔다. 우리는 따로 공부방이 없었다. 방 한 칸에서 한쪽에서는 TV를 보고, 다른 한쪽에서는 일을 했다. 나는 그 한구석에서 공부를 해야만 하는 힘겨운 나날이 지속되었다.

힘들었던 고등학교를 무사히 마치고 1985년, 서울대 수학과에 합격했다. 나는 과학에 관심이 많았지만 육체적인 활동이 적은 학문을 찾다보니 수학이 제격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반대였다. “안디야, 방 한 칸도 없는디 워떠케 서울로 유학을 간디야? 여그서 장학금 받고 기냥 댕기는 겨.” 하지만 어머니와 나는 그런 아버지와 가족을 남기고 서울로 향했다. 300만원을 주고 서울 신림동 고시촌 인근 지하 단칸 전세방을 얻었다. 다행이 학자금이 면제되었다. 약간의 장학금이 나와, 부족한 생활비는 과외를 하며 충당하는 대학생활이 시작되었다.

캠퍼스는 연일 민주화 시위로 바람 잘 날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의 말을 연상하며 스스로 용기를 냈다. “우리 인생이 아무리 고통스럽다 할지라도, 우리의 인생이 짧다는 것은 우리에게 희망이다.” 나는 늘 이 말을 위안 삼고 하루하루를 버텼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때까지도 나에게 손을 내밀지 않으셨다.

나뭇잎의 색깔이 바뀌기 시작하는 그해 가을 어느 날, 구세주 같은 여인이 나타났다. 여느 때처럼 강의를 마치고 힘겹게 집으로 돌아가는 길. 비가 쏟아졌다. 우산을 쓸 수 없는 나는 오는 비를 고스란히 맞으며 걸어갔다.

갑자기 연한 화장품 냄새가 나는 듯했다. 누군가 나에게 우산을 씌워주었다. 여자가 혼자 쓰는 우산이라 둘 다 비에 흠뻑 젖었다. 나는 (대학원생)그 누나에게 말했다. “저는 이미 젖었으니 혼자 쓰고 가시지요.” 나는 나 자신에게 희망이 없음을, 그러한 나 자신을 포기했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 누나는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학교 정문을 나설 때쯤, 그는 참았던 한마디를 던졌다. “혹시, 당신은 하나님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어요?” 나는 순간 용수철 같이 답했다. “수백번, 아니 수천번 더 생각했을 겁니다.” 그 말은 정말 거짓말이 아니었다. 나의 존재 의미에 대해 나의 존재 목적에 대해 얼마나 많이 물었던가. 그 누나는 나를 신림동 단칸방까지 바래다주었다. “기독대학인회(ESF)라는 선교 동아리가 있어요. 그룹 성경공부가 있으니 참석해 보세요.”

며칠 후 나는 ESF사람들과 인문대 빈 강의실에서 요한복음을 공부했다. 형들은 내가 늙어 보인다며 재수생인지 물었다. 아마도 내 가시밭길 인생이 나를 겉늙게 했었나 보다. 나는 요한복음을 통하여 빛으로 오신 예수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 세상의 로고스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기 시작했다.


 

"하나님이 나를 지켜보고 미소지어주면 나는 평생 이렇게 살 수 있어요.”
내 책도 아닌데 그만 빨간 줄까지 긋고 말았다. 1985년 초겨울, 서울대 도서관에서 받은 감동과 은혜를 나는 영원히 잊을 수 없다. 주인공은 나이가 마흔이 넘도록 결혼도 하지 않고 가난한 광부들을 돌보는 간호사였다. 어느 비바람이 치는 밤에 갱이 무너졌다. 광부들이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자전거를 타고 달려가다 그만 전봇대에 부딪쳐 척추를 다치고 만다. 그러나 몇 년 후 그녀는 다시 휠체어를 타고 그곳에 나타나 변함없는 모습으로 광부들을 치료한다. 누군가 그녀에게 어디에서 이런 힘이 나오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담담히 ‘하나님의 미소’ 때문이라고 했다.

새로 태어나는 기분이었다. 이 세상에 아무도 나를 지켜봐주는 사람이 없어도, 이 세상에 내가 살아 있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할 때 나에게 조용히 미소지어주는 한 분이 계시다는 걸 처음으로 깨달았다.

그동안 수천 번 자문했던 ‘왜?’에 대한 의문의 거대한 빙산이 한순간에 스르르 무너졌다. 목발을 짚었지만 마음은 날아가고 있었다. 내가 외로우면 그분은 더 괴로워하셨다. 내가 슬픔에 빠지면 그분은 서럽게 우셨다. 낮은 자들의 고통을 그분은 온몸으로 견디시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이었다. 나보다 수천 배, 수억 배 아파하셨을 예수님을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지게 아팠다.

이런 체험 가운데 내 학교생활은 여전히 고달팠다. 신림동 지하방에서 학교까지 걷는 데 꼬박 1시간이 걸렸다. 강의실과 강의실 사이를 오가는 길은 구만리처럼 멀었다. 특히 인문대 수업이 4층에 있고, 연이어 자연대 건물 4층에 수업이 있으면 아예 강의를 포기했다. 그 많은 계단을 두 목발을 짚고 겨우 도착할 때면 강의는 이미 끝나갈 무렵이다. 집에 돌아오면 늘 녹초가 됐다. 이런 고단함 때문이었을까. 대학 3학년 초부터 왼쪽 폐가 이상하게 아프기 시작했다. 어느 날 갑자기 학교에서 숨을 쉴 수 없는 고통으로 쓰러져 서울대병원으로 후송됐다. 너무 심한 육신의 피로 때문이었는지 폐에 큰 구멍이 났다. 응급처치를 하여 갈비뼈와 폐 사이에 찬 공기를 제거하고 간신히 살아났다. 2주 동안 병원에 누워 있었다.

며칠 후 퇴원하고 다시 학교에 돌아왔다, 하지만 폐의 통증은 계속됐다. 다시 응급실로 실려 갔다. 병원 응급실은 아수라장 그 자체였다. 어느 아저씨가 암에 걸린 부인을 둘러업고 응급실에 들어왔다. 그 부인은 고통으로 뒹굴고 있었다. 하지만 접수창구에서 그들을 받아주지 않았다. 아저씨는 의사들에게 사정사정하다 결국 그들을 저주하기 시작했다.

나는 주치의에게 화가 나서 물었다. “왜 저 사람을 치료하지 않습니까?” 그러자 의사는 “병원이 만성적자에 시달리고 있어 의료보호 대상자를 자꾸 받으면 병원이 헤어날 길이 없고, 아주머니의 상태가 별로 가망도 없어 보였기 때문”이라 했다.

나는 더 이상 그곳에 머물고 싶지 않아 병원을 나와 버렸다. 무작정 나온 나를 본 어머니는 “네가 죽는 꼴을 두고 볼 수 없다”면서 세브란스병원에 입원시켰다. 갈비뼈 사이를 벌려 폐를 수술했기 때문에 나는 제대로 숨을 쉴 수 없었다. 진통제를 맞아도 몇 시간뿐, 밤에는 이를 악물고 기도했다. “하나님, 이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세요. 너무 아파요. 차라리 숨을 쉬지 않는 게 낫겠어요.”

 

 

“모든 일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
수술이 잘됐지만 서울 신림동 반 지하 방에서 몇 개월 동안 외출을 하지 못했다. 가을 문턱에 닿자 구멍이 났던 폐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오랜만에 바깥세상을 구경하니 날아갈 것만 같았다. 그때 바라보던 관악캠퍼스 위의 파란 가을 하늘과,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던 찬란한 맑은 햇빛과 공기, 바람을 나는 아직도 느낄 수 있다.

햇살이 그렇게 아름다운 줄을, 나는 미처 몰랐었다. 이 세상에서 감사할 것 중에, 고통 없이 숨쉴 수 있고 마음껏 태양빛을 즐길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할 일인지도 깨달았다. 숨쉬는 일부터 하나님은 나에게 감사하는 법을 배우게 하셨다. 한쪽 폐를 송곳으로 찔러 가슴으로 체득하게 하신 것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나를 더 정화하시기를 원하셨다. 맑은 관악산 자락을 바라보는 일도 몇 주 되지 않아 그만 둘 수밖에 없었다. 이번엔 오른쪽 폐에 똑같은 증상의 통증이 나타났다.

다시 병원에 가서 방사선(X-ray) 촬영을 했다. 의사는 같은 병이니 또 수술하자고 했다. 나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나는 의사에게 하나님께 물어 보아야 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당장 수술하지 않으면 폐가 갑자기 파열돼 심장마비로 죽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으니, 하나님께 나를 향한 뜻이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하겠다고 병원을 나왔다. 사실이었다. 나는 죽음보다도 왜, 언제까지 이 고통을 참아야 하는지 하나님께 묻고 싶었다. 며칠 밤을 누워서 생각했다. 차라리 일찍 하나님께 가는 것이 좋을 듯싶었다. 어떻게 하면 남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조용히 생을 등질까도 생각해보았다. 나는 처음으로 기도원에 가보기로 결심했다.

어머니와 함께 버스를 타고 한적한 산 속에 있던 기도원에 갔다. 그곳에는 갖가지 병과 삶의 문제를 가진 채 찌들고 짓이겨진 사람들이 마지막 끄나풀을 잡으러 모여 있었다. 그들의 육신과 삶의 고통은 그들에게서 희망도 절망도 지워버려 아무것도 찾을 수 없는 백지 상태로 만들고 있었다. 어느 날 저녁 한쪽 구석에서 기도하고 있을 때 누군가 부르는 찬송가 소리가 내 가슴을 내리 찍었다.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라는 곡이었다. 그 순간 나는 하나님께 자복했다. 내가 얼마나 교만한 자였는가를. 작고 작은 피조물이 나의 육신의 질곡의 고통 때문에 창조주에게 목을 세우고 변론하였던 무례함을 회개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세상적인 얇은 지식으로 나의 존재 이유와 목적에 대해 하나님을 공격하였던 죄를 털어 놓았다. “주께서 무소불능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여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2∼5)

토기장이가 만든 토기가 토기장이를 책망했던 교만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다음날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부터 하나님께 기도했다. 주의 뜻대로 날 받으시라고. 하루에 6시간을 기도하며 하나님의 빚으심대로 나를 내어 드렸다. 욥이 드렸던 기도를 똑같이 드렸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로다.”(욥 23:10)


기적은 보이지 않지만 언제나 흔적을 남긴다. 하나님은 우리 모자의 기도를 들어주셨다. 담당 의사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구멍난 오른쪽 폐는 칼을 대지 않고도 말끔히 치료해 주셨다.

노모의 간절한 기도 덕분이었다. 어머니는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허리 디스크로 고생하시면서도 아들 뒷바라지를 위해 허드렛일을 마다 않으셨다. 아들보다 늦게 예수를 영접했지만 믿음의 깊이는 측량할 수 없었다.

학교를 휴학하고 1년 동안 투병생활을 통해 하나님은 육이 죽고 영이 사는 법을 가르치셨다. 기도하는 법, 성경 읽는 법, 아픔 가운데 하나님을 찬양하는 법을 배웠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가운데 바라고(hope against all hope) 하나님을 의지했다’는 것이 무엇 이었는지 조금은 알게 됐다. 소망이란 장밋빛 꿈이 아니라 절망의 순간에도 놓지 않는 강한 믿음이란 것을 깨달았다. 바울이 가난과 궁핍과, 죽음의 위험 속에서도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라고 고백했던 심정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바울의 고백은 어떤 상황에서도 나의 모든 것을 걸고 지키는 믿음의 존재론적 선언이 되게 하셨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뒤로하고 오직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그분 앞에 발가벗겨 서 있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나는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종종 ‘왜 나만 이런 시험을 당하는지?’ 이해하고 설명할 수 없을 때가 많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고통이 어디에서 오는지 말씀해 주시지 않고 우리와 같이 고통에 참여하신다. 이 세상을 아무 흠 없는 낙원으로 만드시기 위해 그의 전능의 막대기를 휘두르시기보다 당신 스스로 연약해지시고 겸손해지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고통을 말씀만으로 위로하신 게 아니라 온몸으로 막아주셨다. 거룩한 참예는 불멸이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지금도 나는 끊임없는 육신의 나약함에 노출되어 있다. 남들이 다섯 계단을 오르내릴 때 나는 한 계단에 겨우 닿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약하고 느리지만 막강해지는 법을 가르쳐 주셨다. 그리고 이 세상이 잠깐 있다 사라지는 안개와 같은 것임을 항상 깨닫게 하신다. 또한 이 땅의 것에 집착하지 않고 위를 보고 사는 법을 일러 주셨다.

혹독하게 아프고 나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의미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과 판단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명예와 자유로부터도 그렇다. 하나님의 십자가의 도 외에는 모두 아침에 피었다 저녁에 지는 나팔꽃 같은 인생이라는 것을 알게 하셨다.

산다는 것은 끊임없는 희망의 목마름 속에서도 절대로 물러서지 않는 것이다. 인생은 우리 영혼 속에 뿌리박힌 하나님의 본질을 찾아 전진하는 여정이다. 무지하게 고독하고 외로웠지만 그 때마다 보이지 않는 형제들이 내미는 사랑의 버팀목이 용기를 줬다. 그래서 난 눈물의 바다 속에서도 환하게 웃으며 그리운 서울대 캠퍼스로 돌아올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