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무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에서처럼 바다 안개는 섬 증도를 감싸고 있었다. 증도 증동리교회의 시멘트 포장 마당도 해무를 머금고 있었다. 가난했던 시절 남도의 그냥저냥한 섬이었을 증도는 근년 들어 ‘슬로 시티’라는 계관을 얻었다. 삶에 지친 도시인들에게 가난한 섬마을이 다정(茶亭)이 되었다.
전남 신안군 증도는 더는 섬이 아니다. 연육교가 들어서면서 뭍이 됐다. 병풍도 소악도 화도 등의 유·무인도를 포함한 33.62㎢ 면적의 면(面) 중심지가 증도다. 2014년 기준 1679명이 산다. 근년 들어 ‘한국의 가봐야 할 여행지’ 2위에 꼽히기도 했다.
크리스천에게 증도는 손꼽는 성지다. 순교자 문준경(1891~1950) 전도사의 발자취 때문이다. 문준경은 일제강점기 암태도 소작쟁의 사건으로 유명한 신안 암태도 태생이다. 그는 17세에 증도 총각과 결혼하면서 구속사적 삶을 살게 된다. 하나님께서 들어 쓰시려 한 것 같다.
지난 11일 신안군 증도면 문준경길 234 ‘문준경 전도사 순교기념관’은 평일임에도 관광버스를 대절해 찾는 순례객의 발길이 이어졌다. 개교회 중심으로 한 해 10만여명이 찾는 최대 기독교 성지가 됐다.
2007년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전남동지방노회의 문준경 전도사 순교기념관 건립 청원으로 시작된 건설사업은 2013년 5월 12일 대지 8418㎡에 본관 1395㎡와 생활관 1084㎡ 각 1동을 지으면서 마무리됐다. 기념관은 불과 400m 거리 해안의 순교지를 바라 볼 수 있는 언덕에 자리한다.
추모석 ‘우리들의 어머니’ 새겨
문준경은 한국교회의 자랑스런 순교자다. 구원의 확신과 이웃을 위한 희생으로 지상에서 ‘ 아름다운 죽음’을 맞았기 때문이다.
1950년 10월 5일 새벽. 증동리교회에서 800m 떨어진 바닷가에 죽창과 총으로 무장한 내무서원들이 중동리교회 교역자 문 전도사를 내팽개쳤다. 그가 딸처럼 사랑한 30대 초반의 백정희 전도사와 함께였다.
내무서원들은 다름 아닌 인민군, 빨치산, 자생 공산당원들이었다. 유산계급과 미 제국주의자 타도를 외치던 자생 공산당원들 대부분은 전쟁 전까지만 해도 한 마을에서 오순도순 살아가던 이웃이었다. 사탄의 이념 주입은 빠르게 공동체를 파괴했다.
“문준경, 새끼 많이 깐 씨암탉!”
그들에게 문준경과 백정희는 미 제국주의자의 앞잡이요, 종교라는 아편을 퍼뜨리는 인민의 적이었다. 특히 문준경은 증도를 중심으로 서남해안 인민에게 아편을 퍼뜨리는 수괴였다.
새벽 2시. 익숙한 갯냄새와 해송 바람소리가 문준경의 코와 귀에 닿지 않았다. 죽음이 눈앞이었다. ‘새끼 많이 깐 씨암탉’은 ‘유대인의 왕’이라는 로마 군병의 모욕과도 같았다. 하지만 대속의 면류관을 쓰려던 문준경에게 저주가 담긴 말은 티끌조차도 되지 못했다.
그들은 죽창으로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요 19:34)고 했던가. 그 고통의 와중에도 문준경은 “제발 백 전도사만은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그리고 숨을 거두기 전 “하나님 아버지, 내 영혼을 받아 주시옵소서”라고 나지막이 말했다. 죽어가는 목숨에 총대와 칼이 날아들었다. 처참했다. 확인 사살이 이어졌다. 단지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였다.
그 순교지는 67년이 지난 오늘 교계와 지방자치단체가 협력해 관리하고 있었다. 시신은 순교 직후 증동리교회 뒷산에 매장됐고 2005년 지금의 순교지로 이장됐다. 1964년 그의 신앙의 제자들은 ‘여기 도서의 영혼을 사랑하시던 문준경 전도사님이 누어 계시다’는 추모석을 세웠다. 추모석 뒷면에는 이렇게 새겼다.
‘…빈한 자의 위로되고 병든 자의 의사, 아해 낳은 집의 산파, 문맹퇴치 미신타파의 선봉자, 압해 지도 임자 자은 암태 안좌 등지에 복음 전도, 진리 증등리 대초리 방축리 교회 설립, 모든 것을 섬사람을 위하였고 자기를 위하여는 아무 것도 취한 것이 없었다. 그대의 이름에 하나님의 은총이 영원히 깃들기를. 우리들의 어머니.’
그는 죽임을 당한 그 자리에 누워 있다. 부활의 때에 그 자리에서 일어날 것이다.
순교터에선 그가 개척했던 증동리교회, 그리고 순교자기념관이 보인다. 그 뒤로 증도와 부속 섬들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산정봉이 완만하다. 문준경은 생전 산정봉 정상에 올라 기도를 했다. 남편으로부터 소박 아닌 소박을 맞은 여인, 자식 없는 어머니, 시집 귀신 되라며 내치다시피한 친정, 문맹에 고달픈 시집살이, 더구나 예수쟁이….
문준경은 염전집 귀한 딸이었다. 그럼에도 서당교육은 남자들에게만 해당됐다. 꽃다운 나이에 삼종지도의 길에 들어서야 했다. 부잣집 막내아들 남편은 결혼 초기부터 남과 다름없었다. 일본을 왕래하며 신문물을 접했던 남편에게 쪽진 머리의 아내는 구시대 여성이었을 것이다. 그는 홀로 시집살이를 하며 견디고 또 견뎠다.
시아버지는 문준경의 총명함을 알고 언문을 가르쳤다. 시아버지가 준 배움의 붓 한 자루가 유일한 희망이기도 했다. 여전히 남편은 외지를 나돌았다. 동네 사람들은 소박맞았다고 했다. 소실을 얻었다는 소리도 들렸다.
스물일곱 살이 됐을 때 가장 의지했던 시아버지가 죽었다. 삼년상을 치르고 시숙의 아들을 양아들로 삼아 사는 재미도 느꼈지만, 그가 결혼해 뭍으로 떠나고 나자 여전히 허전했다. 서른일곱 살 때 시어머니마저 죽자 그는 대처 목포로 나왔다. 그리고 북교동 단칸 셋방에서 삯바느질을 했다.
1927년 3월. 점잖은 부인이 삯바느질에 여념이 없는 그에게 “예수 믿고 구원 받으세요. 그래야 천국갈 수 있답니다”라고 말했다. “손님의 말은 하나도 못 알아듣겠으나 귀한 분이신 것 같아 뭔가를 알아보고는 싶습니다.” 그가 답했다.
그는 목포교회에 나갔다. 장석초 목사가 시무했다. 장 목사는 평생 고아 등 소외된 사람들을 돌본 목회자였다. 믿음이 생기자 허무한 인생이 걷혔고, 죽지 못해 살았던 인생이 소망을 갖게 됐다. 문준경은 이듬해 4월 세례도 받았다. 늦깎이 신자였다.
성령의 불길을 받은 그는 친정으로 향했다. 친정 식구들을 구원하고 싶어서였다. 화난 아버지는 수채 구정물을 퍼부으며 내쫓았다. 하나도 슬프지 않았다. 각오한 사도의 길이었다.
그는 목포교회 전도왕으로 불렸다. 그리고 지도와 압해도 등을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영적 기갈이 든 그는 1931년 5월 서울 아현동 경성성서학원(서울신대 전신)에 입학했다. 거기서 영적 스승 이성봉(1900~65․부흥사) 목사를 만난다.
신학교 입학 이듬해 문준경은 임자도에 진리교회를 설립했다. 임자도에는 남편과 소실이 살고 있어 박해가 심했지만, 그들마저 안고 구원의 길로 같이 가고자 했다. 진리교회는 이판일과 그 아우 판성씨가 기둥이 돼 주었다. 1950년 10월 각기 장로와 집사였던 두 사람은 가족 11명, 교인 35명과 함께 순교했다.
일제가 식민통치의 강도를 날로 강화하던 1935년 2월 증동리교회를 세웠다. 3월에는 대초리교회, 이듬해 재원리, 방축리, 우전리에 기도처를 열었다. 그러나 43년 말 일제는 모든 교회를 강제해산했다.
45년 해방과 함께 증동리교회를 되찾기 위해 경방단과 지난한 싸움을 해야 했다. 경방단은 일제가 방공(防空)을 이유로 세운 전국적 친일 민간조직이었다. 그들은 교회를 경방단 사무실로 썼다.
제자들에 의해 발굴된 순교자
문준경 생애의 절정은 반경 1~2㎞ 내에 있는 순교터, 증동리교회, 순교자기념관, 산정봉 정상 기도바위이다. 그는 남성 목회자 중심의 근현대기에 여전도사였기 때문에 묻힐 뻔한 인물이었다. 누구도 남도 섬 구석의 여전도사 순교를 깊이 들여다보지 않았다.
하지만 극적으로 살아남은 백정희 전도사와 마을 사람들의 증언, 경방단과 벌인 소송에서의 교회개척기 진술서 등이 ‘신화화’의 우려를 불식시키고 신앙의 역사가 됐다. 또 이성봉 이명직 장석초 김응조 목사라는 성결교의 스승들, 그 지역 신앙의 제자 김준곤(1925~2009·한국대학생선교회 설립자), 이만신(1929~2015·부흥사), 정태기(크리스찬치유상담대학원대학교 총장) 목사 등의 생생한 증언도 큰 역할을 했다.
12일 산정봉 기도바위. 누군가 마른 솔가지를 주워 바위 위에 십자가 모양으로 두었다. 문준경 전도사가 고난 받는 형제와 나라를 위해 기도하던 딱 그 장소다. 그 봉우리에선 멀리 한반도 지형과 꼭 빼닮은 숲이 보인다. 저 숲을 에스더와 같은 지혜와 담대함으로 살았던 문준경도 봤을 것이다.
문준경 제자 목회자의 증언
김준곤 “소화제니 먹으라고 주시고 때로는 아픈 부위를 만지시며 할머니가 손자의 배를 쓰다듬듯 하셨습니다. 그때 기도하는 모습이 제 마음에 확 박혔습니다. ‘이 자매는 돈도 없고, 약도 없고, 여기는 병원도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직접 고쳐 주십시오’라고 하셨죠. 신기하게 낫습니다. 신자 불신자 가리지 않고 치유하셨습니다.”
이만신 “어려서부터 이모할머니 문준경 전도사의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늘 가까이에서 뵈면서 그 분의 신앙지도를 받으며 성장했습니다. 제가 목회자가 된 것도, 그 분의 영성이 자리했던 것을 느낍니다.”
정태기 “문 전도사는 정씨 문중 어른인 제 할아버지께 인사드리러 우리 집에 자주 들렀습니다. 어린 시절 그를 만나면 울다가도, 시무룩하다가도 웃음으로 바뀌었습니다. 그가 계시는 동안 전 어른들 눈치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초등학교 6학년 어느 날 저녁 무렵 우리 집에 들렀다가 몇 시간 후 순교하시고 말았습니다.”
‘한국기독역사여행’ 전남 순천, 영광, 신안 편은 전남 기독교 순교길을 중심으로 지역 관광코스를 개발하고 있는 전남도의 협조로 이뤄졌다. 이 지역에 대한 답사는 전남도 관광과에 문의하면 된다(061-286-5243).
증도(신안)=전정희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jh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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