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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망원동 '뚝방 마을의 성자' 이상양 전도사

배남준 2017. 4. 17. 20:45

쓰레기 더미에 심은 믿음과 희망의 씨앗 기사의 사진

11일 장로회신학대에서 추모예배를 드린 후 함께한 설교자 김기복 원로목사, 이 전도사의 부인 박영혜 장로, 임성빈 장신대 총장(앞줄 왼쪽 두 번째부터). 이상양기념선교회 제공




11일 오전 서울 광진구 장로회신학대 한경직기념예배당의 설교단에 김기복(부산 성광교회 원로) 목사가 올랐다. 서울 망원제일교회 담임목사를 지낸 그는 학생들을 한차례 둘러본 뒤 담담한 어조로 40년 전 세상을 떠난 고 이상양 전도사의 삶을 전했다. 짧은 설교 끝에 이어진 동영상에는 이 전도사가 걸었던 헌신의 삶이 담겨 있었다. 동영상이 상영된 13분여 동안 예배당에선 묵직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간간이 훌쩍거리는 소리만 이어졌다.

3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이 전도사는 망원동 뚝방마을의 성자로 불리는 인물이다. 망원동은 ‘망리단길’이라 불릴 정도로 젊은이들이 즐겨 찾는 동네가 됐지만 1970년대에는 일부러 찾아갈만한 동네가 아니었다.

이 전도사와 망원동 뚝방마을의 만남은 1972년 6월 스승인 주선애 장신대 명예교수로부터 시작됐다. 주 교수는 어느 날 남루한 옷차림의 아이들이 웃고 떠들며 어디론가 뛰어가는 걸 봤다. “저 모퉁이 지나도 사람 사는 곳이 있나”하며 따라간 곳은 믿을 수 없는 풍경들로 가득했다. 서울 곳곳에서 퍼온 분뇨를 개천으로 쏟아버리기 위해 서있는 트럭 수십대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 옆으로 수백 세대는 돼 보이는 판잣집이 가득했다. 그 속에서 아이들이 뛰어놀고 어머니들은 밥을 짓고 있었다. 주 교수는 “주님, 왜 보여 주셨습니까”라며 탄식의 기도를 했다.


이튿날 강의시간. 주 교수는 조심스럽게 뚝방마을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가 돌아봐야 할 삶과 신앙과 신학의 현장이 그곳이 아닐까”라며 여운을 남겼다. 강의 뒤 주 교수를 따라 나온 이 전도사가 말했다. “선생님. 한번 가볼래요.”

며칠 후 이 전도사는 친구들과 뚝방마을로 향했다. 처참했다. 현장을 본 이 전도사와 친구들은 공동화장실을 만들자고 의기투합했다. 누구보다 열심이었던 이 전도사는 아예 뚝방마을에 월세방을 구해 눌러앉았다.

주택건설도 시작했다. 개발의 광풍 속에 뚝방마을로 밀려나 완고해진 이들을 일일이 설득했다. 이들과 함께 푼돈을 모아 5600만원이라는 거금을 장만했다. 땅과 건축자재를 마련한 뒤 주민들과 함께 530세대의 주택을 지었다.

쓰레기 더미, 오물 속에서 동전을 찾는 아이들을 위해서는 보육사업을 펼쳤다. 보육원은 자연스럽게 야학으로 이어져 청년들에게 희망의 등대가 됐다. 망원제일교회의 전신인 애린교회를 세워 믿음의 공동체도 꾸렸다. 뚝방마을에서 불꽃처럼 살았던 5년. 마을 주민들이 ‘우리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키워갈 즈음 이 전도사의 지병인 폐결핵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됐다. 세 차례 대수술을 받았지만 병을 이기지 못하고 1977년 3월 23일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뚝방마을 주민들에겐 희망과 신앙의 씨앗을 뿌렸고 세상엔 두 살 아들과 부인을 남겼다.

임종 사흘 전 병문안을 온 주 교수에게 유언을 전했다 “선생님,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선생님은 제가 여기 와서 병이 난 줄 아시지만 전 여기 오기 훨씬 전에 죽었던 사람입니다. 지금까지 덤으로 살았던 거예요. 부러울 게 없습니다.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싶어요. 죽는 건 두렵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다 죽게 된 게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사후에 공개된 이 전도사의 일기장엔 ‘왜 보여 주셨습니까’라는 질문의 답이 적혀 있었다.

‘주님이 보여주신 건, 가라는 것이다. 즉시 행동하라는 걸 말한다. 그리고 내가 너와 함께한다는 약속인 것이다’라고.  

                                                                                                                       글·사진=장창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