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간증

3.1 절 유관순 열사를 기리며 . . . . 새벽마다 하나님 앞에 눈물의 기도

배남준 2017. 2. 28. 20:00

 

 

유관순은 어려서부터 성품이 활달하고 의협심이 강하고 매사에 적극적인 태도를 지녔다고 한다. 유관순의 어린 시절에는 그의 家風이 끼친 영향이 지대하였다. 앞서 유관순의 부친 유중권의 삶을 통해 볼 수 있었던 것처럼, 그녀의 집안은 전통적 가풍과 기독교적 가풍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이와 같은 전통적 가풍과 기독교적 가풍의 조화는 유관순의 "신앙을 통한 나라 사랑"의 배경 가운데 하나를 이루었다.

 

향리에서 학교와 교회에서 배움과 신앙생활을 하고 있던 유관순은 어느 일요일 지령리 예배당에 순회전도차 온 공주예배당의 사애리시(史愛理施, Alice J. Hammond Sharp) 선교사의 조용한 부름을 받았다. 유관순은 사애리시 선교사에게 "신앙이 든든한 소녀로 알려져" 그녀의 주선으로 공주 영명학교(明宣女學堂)를 거쳐 이화학당 보통과 3학년에 편입하였다. 유관순이 이화학당 보통과 3학년에 편입하기 위하여 서울에 도착한 것은 1916년 3월말 경이었다. 유관순은 4월 1일 보통과 3학년으로 편입하였으며, 당시의 담임은 金克培였다. 유관순은 이 곳 이화학당에서 교비생으로 공부하는 동안 기독교 교인으로서의 신앙 생활에 가일층 진보를 나타냈으며, 방학 때는 고향에 내려가 문맹 퇴치에 진력하기도 하였다.

 

유관순은 이화학당에서 배움을 통해 특별히 두 사람의 선생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게 되었다. 한 사람은 정동교회 손정도(1882∼1931) 목사이고, 또 한 사람은 박인덕 선생이었다. 유관순은 손정도 목사의 설교를 2년여 들으면서 하나님 사랑이 곧 나라 사랑임을 배우게 되었다. 유관순은 또한 朴仁德(1897∼1980) 선생으로부터 매우 강한 영향을 받았다. 박인덕은 1912년 이화학당 중학과를 졸업하고, 1916년에는 같은 학교 대학과를 졸업하였다. 그녀는 졸업후 이화여고보 교사로 1925년까지 9년간 재직하면서, 신앙의 에너지를 나라 사랑의 실천으로 승화시킬 것을 가르쳤다. 박인덕 역시 1919년 3·1운동과 관련하여 4개월간 옥고를 치른 바 있었는데, 서대문감옥에서 제자 유관순과 함께 수감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그녀는 또한 애국부인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유관순의 신앙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사료가 전무하므로 구체적인 서술이 용이하지 못하다. 따라서 우리는 유관순과 함께 신앙 생활을 했던 인사들로부터 유관순의 신앙에 대한 이야기를 간접적이나마 확인할 수밖에 없다. 특별히 유관순과 이화학당에서 신앙생활과 구국운동을 함께 했던 서명학의 증언은 유관순의 신앙의 면모를 살필 수 있게 하여 준다.

 

유관순

 

                    -이화학당 시절 -

 

서명학(후에 장로가 되었음)의 증언에 따르면, 이화학당에서 취해진 종교생활은 매일 같이 오전에는 학교 채플이 있었고, 또 성경 시간이 있어 성경을 공부하였는데, 학생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성경이 말하는 내용을 그대로 실천하려 애썼다고 한다. 또한 새벽마다 학내에서 새벽기도회가 열렸다고 한다. 유관순은 밤중과 새벽에 텅 빈 채플에 혼자 들어가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하루도 거르는 날이 없었다고 한다.

 

유관순은 이화학당의 이러한 신앙 프로그램에 누구보다도 열성적으로 참여하였다고 한다. 유관순은 새벽마다 조국의 광복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였다고 한다. 아울러 이화학당에서는 봄·가을 2회의 부흥회를 개최함으로써, 신앙적 연단을 추구하는 한편, 신앙의 비전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나기 얼마전 열린 부흥집회에서 유관순은 신의 비전을 보는 계기를 가졌다고 한다. 특별히 유관순은 김종우 목사 초청 부흥회를 통해서 신앙과 나라사랑의 고리를 잇게 되었다.

 

  신광철 (한신대 교수) -유관순의 신앙과 삼일운동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