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마을에는 세 개의 다리로 걷는 할머니들이 많습니다. 여섯 개의 다리로 걷는 분들은 더 많습니다. 지팡이보다 유모차를 끌고 다니는 게 보행에 훨씬 안정적이기 때문입니다. 유모차가 갖고 있는 장점은 안정적인 보행 말고도 또 있습니다. 무언가를 담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고령의 할머니들은 유모차를 선호합니다.
겨울 경로당에는 할머니들의 유모차가 줄을 지어 정차돼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가끔 경로당에 카메라를 들고 나가 주차 단속을 나왔다고 너스레를 떨기도 합니다. 노인들은 경로당에 모여 화투를 치며 이야기꽃을 피우다가 해질 무렵 아궁이에 군불을 지피러 집으로 돌아갈 때에야 유모차의 시동을 겁니다. 그런데 남자 노인들은 아무리 허리가 굽고 걷기가 불편해도 절대로 유모차에 의지하지 않습니다. ‘노인용 보행 보조기’라는 그럴듯한 이름에도 불구하고 ‘유모차’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이름에는 아기를 낳고 젖을 물려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친밀성이 있습니다. 유모차는 이미 오래 전에 폐경기에 접어든 노인들에게 가임기의 건강한 여성성을 환기시켜 줍니다. 세월 앞에 형태도 없이 뭉개져버린 젊음과 여성성을 재생시켜 줍니다. 유모차는 할머니들을, 아이를 생산하고 키우는 젊고 건강한 여성으로 치환시킵니다.
유모차는 무언가를 담을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점에서 젊은 가임여성의 자궁에 대한 메타포가 되기도 합니다. 어머니가 늙으면 할머니가 됩니다. 하지만 어머니이거나 할머니이거나 아이를 낳아 본 여성은 의식과 무의식의 두 세계에 자식을 품는 주머니를 걸쳐두고 삽니다. 그것은 마치 캥거루의 주머니처럼 여성에게 주어진 정신적 특징입니다. 캥거루의 주머니는 비어있을지라도 그 빈자리는 새끼를 위한 자리이기 때문에 다른 것은 담을 수 없습니다. 유모차는 할머니들의 캥거루 주머니입니다. 그래서 할머니들의 유모차는 언제나 자식과 손주들에 대한 애정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유모차를 조금 거칠게 밀면 그 안에 있는 것들이 출렁거려 눈물샘이 넘치게 됩니다.
그런데 유모차를 밀면서 여섯 개의 발로 걷던 할머니들이 1년에 한두 번은 두 발로 걸을 때가 있습니다. 명절 때입니다. 명절이면 먼 곳에서 찾아오는 어린 손주들을 맞기 위해 두 팔을 활짝 벌리고 두 발로 뛰어나옵니다. 무기력하고 힘이 없던 노인들에게 물 만난 건미역처럼 생기를 주는 것은 역시 새끼들밖에 없습니다. 허전했던 캥거루 주머니가 충만해지는 때가 명절입니다.
토방 마루에 불을 밝히고 자식을 기다리는 어머니의 집, 이번 설날에도 그 캥거루의 주머니를 향해 벌떼처럼 자식들이 행렬을 지어 갈 것입니다. 고향 가는 길이 멀고 힘들어도 캥거루 주머니에 들어가면 달콤하게 잠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집으로 가는 행로에 있습니다. 그래서 삶이 힘들고 지쳐도 집으로 가는 이 행렬을 멈추지 않습니다.
김선주 <영동 물한계곡교회 목사>
경력=백두대간의 심산유곡인 충북 영동 물한계곡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목사 사용설명서' '우리들의 작은 천국' '할딱고개 산적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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