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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 최고의 테너, 카루소 (1904 )/ 전설적인 그 목소리

배남준 2017. 1. 11. 11:44


***** 카루소’라는 세기의 최고가수가 있었다.

카루소 ; 그는 20세기 초에 가장 유명한 가수였다. 카루소가 활약할 당시는 지금과 같이 상업적인 대중음악이 아직 발달하기 전이었다. 따라서 카루소는 지금에 비하면 ‘마이클 잭슨’ 정도의 세계적인 명성을 누린 가수였다. 따라서 돈도 따랐다. 개런티는 ‘백지수표’에 자신이 써넣으면 될 정도였다.

그가 생전에 레코딩으로 벌어들인 돈은 약 200만 달러. 그가 그토록 유명세를 누리며 경제적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그가 노래를 잘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아직도 ‘역사상 최고의 테너 가수’라는 칭호가 뒤따른다. 지금 들으면 19세기적 가창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지만 그의 노래에 담긴 희로애락의 현과 묘한 뉘앙스의 변화, 그리고 그의 목소리가 풍기는 카리스마는 ‘그의 노래 그 자체’ 외에 다른 무엇으로 표현하기 불가능하다.

카루소는 나폴리의 빈민가에서 7남매의 셋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창고 인부였다. 술주정뱅이였고, 음악은커녕 자녀들을 학교에 보낼 생각도 안하던 사람이었다. 10세부터 공장에 나가 자신의 밥벌이를 해야 했던 카루소는 저녁시간에 몰래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15세가 되어 정식 음악수업을 시작한 그는 베루지네라는 성악 코치에게서 배웠다. 베루지네는 카루소의 타고난 재능을 간파하고 그를 이용해 돈을 벌려 했다.

1894년, 베루지네가 성급하게 데뷔시키려 했던 무대에서 망신만 당하고 내려선 카루소는 이듬해 다행히 나폴리 테아트로 누오보에 별 무리없이 데뷔했다. 지휘자 빈센초 롬바르디를 만나며 인생의 행로를 바꾸게 되었다. 베리스모 오페라의 신봉자이던 롬바르디는 카루소에게서 참다운 베리스모의 구현 가능성을 발견하고 그에게 많은 무대를 맡겼다. 빈민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카루소에게 베리스모 오페라는 체질적으로 잘 맞았을 것이다. 그의 가창도 목소리도 이를 계기로 새롭게 탄생했다.

1900년, 토스카니니가 지휘하는 스칼라 가극장 무대에 오른 그는 30세가 되던 1903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무대에 등장한 이후 절정기를 구가하기 시작했다. 1904년에 프로듀서 가이스버그에 의해 이루어진 유명한 레코딩은 레코드의 역사를 바꿔놓았다. 폭발적으로 팔려나가며 레코드를 상업성을 가진 매체의 자리에 확고히 올려놓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상업적인 성공과 대중적인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것이야말로 불행의 시작이었다.

당대의 스타들 중에서도 ‘황제 스타’ 격의 위치에 오른 그는 특급 호텔 한 층을 모두를 숙소로 쓰고, 수많은 보조자와 하인들을 거느렸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은 그의 개런티는 무대에서의 부담을 더해주었다. 그는 낙천적인 성격의 소유자였지만 음악에서만큼은 ‘개런티(출연료)에 걸맞는 훌륭한 연주를 해야한다’는 완벽주의를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메트로폴리탄에서 시즌에 한두 편 주역을 맡은 것이 아니라 ‘하나만 빼고 다 맡을’ 정도였다. 따라서 그는 방대한 레퍼토리를 소화해야 했고, 무대 하나하나에 최선을 다했기에 그에 따른 정신적·육체적 소진으로 너무 일찍 쓰러지게 되었다. 47세가 되던 1920년에 은퇴했지만 이미 늦었다. 이듬해 그를 늑막염이란 병으로 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카루소가 성악가로서의 자신을 얼마나 혹사시켰나를 보여주는 것이다

                                                 출처 :오카리나동호회 원문보기   글쓴이 : 박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