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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자 정범진 검사, 신앙의 승리- 現 뉴욕 최연소 부장검사에서 판사로

배남준 2016. 12. 18. 18:28

 정범진검사와.....

  -교통사고로 전신마비의 장애자 정범진 검사 (왼쪽)- 



[도전하는 신앙인]미국 브루클린 지검 정범진 부장 검사

중증 장애 고통 신앙으로 극복 미국 최연소 부장검사로 '우뚝'


뉴욕 브루클린 지방 검찰청. 마약, 살인 등 각종 형사범죄를 전담하는 이곳은 미국의

일류 검사들만 모이는 곳으로 정평이 나 있다. 이곳에 부하 검사 80여명을 통솔하는

최연소 부장 검사가 되어 현지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는

정범진(36, 알렉산더, 미국명 알렉스 정) 검사.

더욱이 그는 어깨 아래로는 전혀 감각도 없고 움직일 수도 없는 중증 장애인의 몸으로 모두가 부러워하는 자리에 오르는 일을 해냈다.

브루클린 지방법원 내 사무실을 찾아 그를 만났다. 휠체어에 탄 채 힘겹게 내미는

오른 손을 잡고 악수를 나눴다. 손은 감각이 없어서인지 찬 느낌이었지만 환하게 웃는 그의 얼굴과 마음은 햇살처럼 따뜻했다.

“저 같은 사람이 무슨 인터뷰 거리가 됩니까?”

점잖게 사양하던 그는 ‘한국의 장애인들에게 힘과 용기가 된다면’이라는 단서를 붙이고 어렵사리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았다.

9살 범진은 부모 손을 잡고 미국으로 왔다. 고대 법대를 졸업한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은 탓인지 어렵지 않게 조지 워싱턴 법대에 진학했다. 화려한 학벌, 키 176㎝의 미남에

만능 스포츠맨으로 남부러울 것 없었다. 결혼을 약속한 여자도 있었다.

그러나 하루 아침에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25살 되던 지난 91년 방학을 맞아 텍사스로 이사를 간 부모를 만나러 가던 범진을 교통사고가 덮쳤다. 의식을 찾고 몸을 움직이려고 했으나 손가락 하나도 말을 듣지 않았다.

차 지붕이 머리를 짓눌러 목이 부러지고 만 것이다.

“아버지를 비롯한 수많은 한인들이 미국에 정착하면서 법을 몰라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고 이들을 위해 일하려고 법대를 갔습니다. 졸업 1년을 남기고 꿈을 접어야 한다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치료 받으면 낫겠거니’ 했다. 그러나 꿈에 불과했다. ‘재활 가능성 제로’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사랑하던 여자마저도 그를 떠났다.

자살을 생각했다. 휠체어를 탄 채 병원 층계에서 떨어져 죽을까 하고 계단을 멍하니

쳐다보다가도 외아들만 바라보며 낯선 미국에서 고생하신 부모님 얼굴이 떠올라 발길을 돌리곤 했다. 퇴원 후에도 바깥 출입은 하지 않았다. 주위의 시선이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시절 뉴욕 퀸즈 한인성당에서 학생회장을 할 정도로 신앙생활에 충실하던

범진은 성당으로의 발길도 끊었다. 자신을 이렇게 만든 하느님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범진은 새로운 눈을 뜨게 됐다.

“퀸즈의 한 공동묘지를 지나던 길이었는데 문득 무덤 속의 비좁은 관에서 답답하게

사는 것보다 힘들지만 열심히 도전하면서 살아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피아노나 의학을 전공했다면 이런 몸으로 꿈을 이룰 수 없지만

검사는 휠체어를 타고도 할 수 있다는 자신이 생겼어요.”

‘동전 뒤집기’였다. 생각을 바꾸니 새로운 희망이 생겼다. 1년간 쉬었던

 학업을 다시 시작했다. 움직일 수 없는 팔에 고리를 채워 펜을 끼우고

 컴퓨터를 조작하는 방법을 터득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남들보다 세 배 네 배 이상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지만 희망이 그를 견디게 해주었다. ‘사회정의 구현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희망이었다.

“좌절 속에서 나를 다시 건져주신 분은 하느님입니다. 10년 넘게 지금껏 휠체어만 타고 살면서 하느님 원망도 많이 했지만 끊임없이 바치는 마음 속의 ‘기도’를

하느님이 들어주셨나 봅니다.

유아세례 이후 이어져 온 보이지 않는 신앙이 없었다면…”

그리고 1년 후. 그는 당당히 뉴욕 검찰청에 입성했고, 99년 33살 나이에

부하검사 80명을 거느리는 부장 검사에 올랐다. 검찰청 역사상 최연소다.

그는 여기에 머무르지 않겠다고 했다. 판사도 해보고 미국의 정치계에도

뛰어들 생각이다. 또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한국의 장애인들에게

희망을 심어주는 일도 할 계획이다.

사고 이후 ‘다리를 흔들어라’(shake-a-leg)라는 미국의 장애인 프로그램에 참가해 동료 장애인들과 수영, 말타기 등을 하면서 마음의 문을 열고 자신감을 키웠던 그는 한국에서 이런 일을 하고 싶어한다. 몇 년 전 한국에 왔다가 너무나 열악한 장애인편의시설과

극심한 편견 속에서 장애인들이 고통 받고 있는 현실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삶은 고마운 것이니까 낭비하지 마세요. 뭐든지 노력하면 이룰 수 있습니다.”
사무실을 나오는 기자에게 그가 한 마지막 말이다.

한국의 장애인들에게 전하는 말이기도 하다.


                                                            뉴욕=박주병 기자jbedmond@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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