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원짜리 핫팩을 100개, 모두 1만원어치 샀다. 칫솔과 치약도 그만큼 구입해서 핫팩과 함께 포장했다. 성경말씀을 적은 종이를 동봉한 뒤 남자친구와 함께 수원역을 찾았다.
지하철이 운행을 멈춘 시간, 역사 안은 고요했다. 신문지를 덮은 이들이 쓰러진 고목(枯木)처럼 누워있었다. 선물봉지를 건네자 죽은 나무가 살아나듯 차가운 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지난해 1월 30일, 김소연(22·여·수원 하늘꿈연동교회)씨는 양성수(21)씨와 연인이 된 지 500일이 되는 날을 이렇게 기념했다.
지난 18일 경기도 과천 별양로의 한 커피숍에서 만난 소연씨는 스테인리스 재질의 커플반지 2개를 양손에 하나씩 끼고 있었다. 성수씨는 현재 군복무 중이다.
◇수원역에 소풍 가서 만난 사람들=그날 이후 연인은 매주 금요일 수원역을 찾았다. 성탄절이나 발렌타인데이 같은 날에도 값비싼 선물을 주고받거나 좋은 레스토랑에 가는 대신 수원역으로 향했다.
둘 다 신학대에 다니고 있지만 사역은 아니었다. 그냥 수원역 노숙인들을 만나는 게 좋았다. “저흰 그냥 수원역으로 소풍가는 거예요. 이모 삼촌들에게 줄 선물을 고르는 것도 재밌고, 5000원짜리 국밥을 함께 먹는 것도 좋아요.”
‘천사 할아버지’는 첫날 만난 삼촌이다. 매번 “아휴, 우리 천사들 또 왔네”하며 반겨줘서 천사 할아버지라 부른다. 할아버지는 연인의 별명도 지어줬다. 소연씨는 ‘메이’. 마음이 5월처럼 따뜻하다는 의미다. 성수씨는 양을 치는 목동이란 뜻의 ‘대니’다. 천사 할아버지는 사업을 하다 지인에게 배신당한 뒤 거리로 나왔다고 했다.
‘새임 언니’는 걸을 수 없어 휠체어를 타고 다닌다. 오른손도 자라다 만 것처럼 작다. 금요일이면 다른 곳에 있다가도 연인을 만나러 수원역에 오곤 한다. 사람이 그리운 지 거의 매일 수신자 부담 공중전화로 전화를 걸어온다. 소연씨는 매주 언니를 데리고 화장실에 가서 소변보는 걸 도와준다. 언니는 교회를 다니다 헌금 내는 게 부담스러워 발길을 끊었다고 했다. 그런 그녀가 하루는 휠체어를 밀던 소연씨에게 기도를 해달라고 했다. 소연씨는 언니의 두 손을 꼭 붙잡았다.
“하나님이 언니 사랑하시는 거, 알았으면 좋겠어요. 언니가 갖고 있는 아픔을 치유해주실 분도 하나님뿐이니까, 주님께서 그 아픔 어루만져주세요. 하나님께서 이뤄주신 우리 만남이 계속 이어질 수 있게 해주세요.”
대식이 삼촌은 글을 참 잘 쓴다. 얼마 전엔 편지를 써줬는데 ‘오늘은 선물이다. 아름답게 가꾸어가는 삶이 되길 바란다’고 적혀 있었다. 한 러시아인은 비자 문제로 본국에 돌아가지 못해 수원역에서 생활했다. 신학대를 졸업했다는 남자도 만났는데 그와는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 악성림프종으로 8개월밖에 살지 못한다는 진단을 받은 뒤 모습을 감췄다.
소연씨가 ‘막내 삼촌’이라고 부르는 남자는 어렸을 때 겪은 사고로 눈 주변 살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소연씨는 그런 모습이 징그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어쩌면 남들이 자신의 장애를 아무렇지 않게 봐줬으면 하는 마음이 소연씨에게도 있기 때문일지 모른다.
◇‘메이’의 감사제목=소연씨의 왼쪽 눈은 의안이다. 어렸을 때 안구에서 암세포가 발견돼 적출했다. 얼마 전엔 오른쪽 눈마저 백내장 진단을 받았다. 그는 “어느 날 앞을 보지 못하는 상황이 오더라도 오늘을 살 수 있어 감사하다”고 했다. “어렸을 때 암세포가 퍼져버렸다면, 지금 저한테 없었을 오늘을 살고 있는 거잖아요. 그래서 오늘처럼 화창한 날씨에 거리를 걸으면 마음이 벅차요. ‘아! 내가 살아있구나’, 이런 생각이 들어요.”
소연씨는 하나님께 감사했던 일들을 그날그날 적어 놓는다. 최근엔 이런 감사의 고백을 했다. ‘수원역에 있는 이모 삼촌에게 ‘진심으로 따뜻하게 대해줘서 고마워’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렇게 느껴주시는 것만으로 더 감사했다. 사역이나 봉사가 아니라 그냥 이런 만남을 통해 행복하다고 느낄 수 있어서 참 감사하다. 감사해요 주님.’
- 2016 5, 30 국민일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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