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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부활과 독일 최고의 총리 아데나워

배남준 2016. 4. 17. 18:24

  1957년 선거에서 군중에게 환호하는 아데나워 수상

                 -  전후 초대총리 선출에 환호-    



미국  빌리그레함 목사가 서독을 방문했을 때 아데나워 수상과 자리를 같이하게 되었습니다. 인사가 끝나자 수상은 대뜸 빌리 그레함 목사님에게 물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이지요?"

잠시 당황한 목사님이 대답하기도 전에 그가 먼저 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면 세상은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예수님이 무덤에 계시다면 세상은 소망이 없습니다."

아데나워 수상은 그리스도의 부활이야말로  역사상 가장 믿을만한 사건이라고 말하며 은퇴한 후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과학적 증거를 수집하면서 여생을 보낼 작정이라고 말했습니다. 


[펌]전쟁의 폐허에서 기적을 일으킨 총리

콘라트 아데나워(Konrad Adenauer, 1876~1967)


 

정치가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용기

“가장 중요한 것은 용기입니다.” 1949년부터 1963년까지 14년간 독일연방공화국 총리를 맡았던 콘라트 아데나워가 독일 공영방송과의 고별 인터뷰에서 정치가의 덕목에 대해 한 말이다. 명연설가였던 그는 이 고별 인터뷰에서도 누구나 금방 알아들을 수 있는 간단명료하고도 설득력있는 연설로 국민을 매료시켰다.

41세에 최연소 쾰른 시장이 된 그는 뛰어난 업무능력과 참신한 아이디어로 이름을 떨쳤다. 쾰른을 서방의 정치적 중심도시이자 산업의 핵심도시로 만들어 정치권에서 라인지역 전문가로 통했다. 그러나 나치정권이 들어선 뒤 그는 히틀러를 국가의 수상으로 대접하지 않았고, 쾰른시에 나치의 깃발도 꽂지 못하게 했다. 화가 난 히틀러는 아데나워를 ‘인민의 적이요, 범죄자’라고 규정했다.

이후 아데나워는 쿠데타와 나치 암살기도 등에 연루돼 10년 이상을 가택연금과 투옥, 도피와 은둔으로 보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사랑하는 아내를 잃었으며 경제적 궁핍,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용기를 잃지 않았다. 나치가 등장할 당시 아데나워는 57세였다. 대부분의 사람이 은퇴를 결정할 나이에 나치정권의 탄압에 신념을 굽히지 않고 저항했으며, 재기에 성공해 마침내 전후 독일연방공화국 초대 총리의 자리에 올랐다.

 17년간 시장업무를 보면서도 청렴함을 잃지 않았다. 그는 공공재정을 허투루 쓰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술과 담배를 멀리하고, 밑창이 들린 구두를 신을 정도로 검소했다. 그리고 관용차량 한 대 외에 개인차량을 소유하지 않았다.

용기와 절제는 아데나워가 쾰른 시장을 거쳐 초대 재상이 되어 14년간 4번이나 연임하게 된 비결이었다.

 

라인강의 기적을 이끈 반공주의자

아데나워는 확고한 반공주의자였다. 그는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반대했다. 오히려 그는 시장경제를 바탕으로 공업 중심의 산업육성정책을 펼쳐 큰 성공을 거두며 ‘라인강의 기적’을 이끌어냈다.

경제전문가가 아니지만 독일 경제를 부흥시킨 인물로 항상 아데나워가 거론되는 이유는 에르하르트를 기용한 뒤 흔들림 없이 지원한 정치적 리더십 때문이다.

 아데나워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은 에르하르트는 해외수출을 적극 지원했고, 폭스바겐 등 자동차산업과 철강산업을 발전시키는 등 독일 산업의 기반을 강화했다. 또한 화폐개혁과 국영산업 민영화 등의 구조개혁을 통해 1950년대 연평균 7%대의 고속성장을 견인했다.

아데나워 또한 경제를 보는 안목을 갖고 있었다. 1920년대 쾰른 시장 시절 독일 최초의 자동차 전용도로인 쾰른에서 본 사이의 아우토반을 건설하고, 포드자동차 공장을 유치하였다. 1919년에는 대학을 세웠으며, 쾰른 박람회를 부활시켰다. 이 당시 건설된 아우토반은 훗날 박정희 대통령을 감동시켰고, 이를 계기로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한다.

아데나워의 선견지명은 외교 분야에서 특히 빛을 발했다. 그는 국가가 국민에게 자유를 보장해주고 안정된 치안을 제공해야 한다고 믿었으며, 이를 위해 전체주의·공산주의·사회주의를 배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공산세력과의 평화공존을 택하는 대신 미국과 프랑스 등 서방세력과 관계 개선에 주력했다. 200년간 25차례의 전쟁을 치른 프랑스와의 화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가입, 대미협력 강화 등의 정책을 펼치고, 프랑스의 드골과 함께 유럽연합EU의 기틀을 세웠다. 그 덕분에 서독에 자유민주주의가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었다.

그의 외교정책을 두고 독일 내의 중립주의자와 진보주의자들은 비판의 화살을 쏘아댔다. 그러나 그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들과의 굳건한 외교정책만이 독일의 통일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신념을 버리지 않았으며, 통일보다는 자유주의의 가치가 우선한다는 외교방침을 굽히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아데나워의 서방 외교정책은 독일 경제에 번영을 가져다주고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공고히 해 독일 통일의 기반이 되었으며, 선진국 대열에 진입할 수 있는 통로를 마련했다.

 

독일 최고의 총리, 아데나워

‘Stunde null’ 독일 국민은 전쟁 직후인 1945년을 ‘제로의 시간’이라고 부른다. 히틀러와 나치가 일으킨 세계대전으로 인해 대부분의 산업시설이 파괴되고, 천만 명 이상의 사람이 죽거나 다쳤으며, 영토의 25%를 잃게 되어 아무것도 없는 제로의 상태가 되었기 때문이다.

아데나워는 용기를 바탕으로 확고한 목표설정과 분명한 행동원칙, 그리고 넓은 안목으로 정치에 임했다. 그는 ‘실험은 없다’는 슬로건을 앞세워 강력한 리더십으로 폐허에서 절망하던 국민들에게 비전을 심어줬다. 그가 아니었다면 상처투성이의 독일이 불과 십수 년 만에 재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오늘날 선진국으로 당당히 자리잡게 한 지도자로 서슴없이 아데나워 총리를 꼽는다. 독일 국민들은 이런 그의 업적을 기려 주요도시의 도로에 그의 이름을 붙이고 동상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