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천풍언 성자
인도의 간디, 독일의 슈바이처와 함께 20세기의 3대 성인으로 존경을 받고 있는 하천풍언은 1888년 7월, 일본 고오베에서 원로원 서기관의 첩이며 기생인 오가메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모친을 여의고 부친도 하천풍언이 15세 때 파산해 버렸다. 그때 얼마나 가난했던지 35전짜리 성경책 한 권도 살 수가 없었다. 자기 운명과 사회적 고통을 비관하여 몇 번이나 자살을 계획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하천풍언 자신의 고백에 의하면 자기의 기구한 운명에 얼마나 눈물을 많이 흘렸는지 항아리에 가득 넘칠 만큼 쉴새 없이 울었다고 한다.
명치학원 신학부 예과 2학년에 다니다가 폐결핵에 걸려서 신호신학교로 전학했다. 하천풍언은 19살 때 40일 동안 노방 전도를 하다가 심한 각혈을 하고 더 이상 살 소망이 없어져 임종이 가까운 줄 알고 서쪽을 향해 누워 있었다. 석양빛이 그의 얼굴을 비칠 때 순간 황홀한 경지에 들어가 하나님과 자신이 한 몸이 되는 느낌을 얻었다. 기적적으로 혈담이 나오고 열이 내려 사선을 넘었다. 그러나 의사는 3년 밖에는 더 못산다고 선언하였다. 그러자 하천풍언은 3년 동안 그리스도의 정신에 따라서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좋은 일을 하다가 죽고자 결심을 하고 고오베의 싱가와에 있는 빈민굴에 들어가게 되었다.
1909년(21세) 12월 24일 신학생의 신분으로 낡은 리어카에 이불이나 헌옷 몇 가지와 약간의 책들을 싣고 손에는 디킨슨의 『크리스마스 캐롤』 한 권을 들고 기침을 해가면서 혼자 리어카를 끌고 빈민굴에 들어갔다. 사글세방을 매일 7전씩에 얻어 자리를 잡았다. 그 방은 며칠 전에 불량배들끼리 싸움하다가 칼에 찔려 죽은 사건이 나서 귀신이 나타난다는 방이었다. 다다미 두 장 넓이의 좁은 방이 그에게는 예배당이고 서재이며 침실이었다. 여기서 하천풍언은 그리스도의 정신대로 한 알의 밀이 되고자 하였다. 이 빈민굴은 일본에서도 유명한 곳이어서 빈민이나 병자, 전과자, 도둑, 깡패, 소매치기, 창녀 등 세상의 쓰레기요 인간폐물들이 모여 매일같이 사고가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무시무시한 곳이었다.
하천풍언이 개척한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들이란 대부분 젊은 창녀들이었다. 할 일이 없을 때는 교회의 뒷자리에 앉았지만 저녁 무렵이 되면 골목길에 나가서 손님을 유혹하여 매음을 하였다. 때때로 하천풍언이 골목을 지나갈 때면 그와 마주친 창녀들은 양심의 부끄러움을 느꼈기 때문에 전신주 뒤로 숨으면서 '선생님, 빨리빨리 지나가세요. 부끄러워요'라고 했다. 그 교회의 어린이 주일 학교에서 길러낸 소녀들은 믿지 않는 부모들 때문에 나이가 들면 창녀로 팔려서 다른 지방으로 떠나가곤 했다. 그럴 때면 하천풍언은 '나의 비둘기들을 돌려달라!'고 하면서 예레미야와 같이 울며 빈민굴 거리를 헤맸다. 그는 사람들에게 눈물을 이등분하자고 하면서 우는 자들과 함께 울었다.
깡패들은 매일같이 칼을 들고 하천풍언을 위협하면서 돈을 내놓으라고 달려들었다. 돈이 없을 때는 그가 입고 있던 옷까지도 벗겨 갔으므로 한동안 옷이 없어서 여자 옷을 입고 밖에는 나가지 못하고 갇혀 있을 때도 있었다. 어떤 때는 심하게 매를 맞아서 온 몸이 멍이 들고 이까지 부러져 병원에 입원하기도 하였다. 그때 친구 목사가 문병을 왔다가 그 참혹한 몰골을 보고는 분개하여 "자네는 그 나쁜 깡패들을 왜 그냥 놔두는 건가?"라고 하였다. 그러자 하천풍언은 정색을 하면서 벌떡 일어나 "자네는 성경을 어떻게 보나?"라고 반문하였다.
한번은 길가에서 노방전도를 하다가 각혈을 하여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는데 정신이 들어서 눈을 떠보니 봄비가 내리는 가운데 자신은 길가에 그대로 누워 있었다. 아무도 일으켜 주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하천풍언은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을 한층 더 깊이 실천하고자 남의 밑까지 닦아주는 자기비하의 정신을 실천하였다. 그는 자신의 체험기록인 『사선을 넘어서』를 출판하고 그밖에도 많은 문서를 펴냈다. 하천풍언은 여러 가지 병이 있었다. 눈은 몇 번이나 실명했었고 축농증으로 고통을 많이 당했다. 또한 폐결핵으로 각혈이 심했으며 심장이나 간장도 나빴으나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느끼고 "우리가 약할 때 곧 강하다"는 사도 바울과 같이 생활했다.
그에게 인격적으로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은 선교사 마야스 부부였다. 그가 15살 때 마야스 선교사는 그에게 영어공부를 시켜주었고 그가 병들었을 때 40일 동안이나 품에 안고 잠자기도 했다. 19세 때 폐병으로 쓰러졌을 때도 마야스 선교사가 그의 목구멍에 손을 넣어 엉겨붙은 핏덩이를 긁어 내주었기 때문에 살게 되었다. 어느 어부 집 돗자리도 없는 방에서 여러 날 지새우며 간호를 해 준 사람도 마야스 선교사였다. 하천풍언이 처음 교회에 두 번 출석해보고 세 번째 주일에 당장 세례를 받은 것도 마야스 선교사의 인격에서 받은 감화가 컸기 때문이었다.
훗날 하천풍언은 고백하기를 "마야스 선교사는 내 신앙의 아버지이시다. 내가 가난할 때 언제나 돈을 얻으러 간 곳은 마야스 선교사 댁이었다. 내가 폐병을 앓고 있을 때 입원시켜준 분도 마야스 선교사였다. 내가 인생을 비관할 때 마야스 선교사는 손으로 내 얼굴을 들어 태양이 뜬 쪽을 향하게 하고 그날 석양빛에 눈물이 마르게 하는 방법을 가르쳐 준 분도 역시 마야스 선교사였었다. 나의 최초의 설교와 전도여행과 기도도 마야스 선교사와 함께 하였었다. 그분이야말로 복음적 사도였다!"고 말했다.
하천풍언은 빈민들과 일생을 함께 살면서 그들의 권리와 이익을 위하여 희생적으로 봉사했다. 여러 번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전국 주요도시의 공장지대나 빈민굴의 가난한 사람들과 노동자들을 위해서 산업조합, 소비조합, 영양식배급소, 예수단 등을 조직하고 '신국'이라는 신문을 발행하면서 활동했다. 그 외에도 쉴새 없이 순회강연을 다니고 많은 저서를 남겼다.
하천풍언은 예수님의 청빈생활을 본받으면서 말하기를 "나로 하여금 청빈을 찬미하게 해주십시오. 다다미 두 장 짜리 방에 살면서 10년 동안 문에다 열쇠를 잠가 본일 없는 나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입니까! 가난하다는 일이 얼마나 축복받은 생활이라는 사실을 나는 체험하고 느끼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소유한 것이 없는 몸이라 아무 것도 빼앗길 두려움이 없는 몸입니다. 나는 여름에도 겨울에도 입은 옷 단벌로 돌아다니므로 옷차림에 신경 쓸 필요가 없으니 얼마나 유쾌한 일입니까! 이처럼 길을 가다가 청소부의 쓰레기차나 똥차를 밀어줄 수도 있고 청소부와 함께 어울려도 꺼릴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양복을 차려입고 강단에 나서서 예의라는 마술적 도덕에 얽매이게 된 뒤부터는 청소부와 친교가 멀어지는 것 같아 서러웠습니다"고 말했다.
하천풍언은 기성종교를 통렬히 공격하여 말하기를 "현대의 종교들이 부잣집 아가씨들이나 큰 기업주 댁의 호강하는 도련님들과 같이 사람들의 노리갯감 노릇을 하는 꼴이 가련할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교는 돈의 힘으로 세워진 눈에 보이는 교회들을 때려부수고 돈으로는 세울 수 없는 심령의 천국을 세우는 운동이었다. 돈 돈 돈 모으는데, 기부금 모집하는데 분주한 종교인들에게 정떨어졌습니다!" 라고 탄식했다.
일본의 고오베에 있는 싱가와 빈민굴에 들어가서 외롭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일생을 바친 하천풍언은 50여년 동안 일본 땅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하다가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간 성자이다. 사랑과 눈물로 살았던 20세기의 대표적인 기독교 성자 하천풍언은 1960년 4월 23일, 그의 연령이 72세가 되었을 때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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