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간증

[펌]아웅산 사고! 친구 김재익 경제수석을 잃은 정근모 장로의 슬픔

배남준 2016. 2. 2. 06:47

 

 

정근모 박사의 '나는 위대한 과학자 보다 신실한 크리스천이고 싶다' 간증문 중에서

 

아! 아웅산 아! 김재익

 

  내가 평생을 두고 가장 후회하는 일이 이듬해에 일어났다. 당시 대통령 경제수석 비서관으로 근무하고 있던 김재익 박사, 그는 나와 가장 절친한 친구였다. 경기 고등학교 동창이었던 그는 머리도 우수할 뿐더러 매우 양심적인 사람이었다. 내가 1학년을 마치고 서울대학교에 진학하자 김재익 박사도 2학년 때 검정고시를 거쳐 서울대학교에 입학했다.

 우리의 우정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더욱 깊어만 갔다. 진심으로 서로를 위하고 포용할 수 있는 사이였다. 내가 미국의 좋은 직장을 포기하고 귀국하기 까지에도 그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근모, 그동안 배운 것이 무엇을 위함이었는가. 이제는 우리가 힘을 합쳐서 일해야 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 조국을 위해 일한다는 것, 이보다 더 큰 보람이 있겠는가. 어서 돌아오게나".

 그의 진지하고도 진솔한 대화는 나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우리의 우정은 곧 가족간의 교제로 이어졌다. 그의 아내와 우리 가족들도 금세 두터운 정을 쌓아가고 있었다. 김재익 박사와 나는 서로가 너무나도 바빴다. 그렇다고 전혀 만날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충분히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없었기에 서로 대화의 갈증을 느끼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사랑하는 나의 친구, 가깝게 지내면서도 존경심을 가졌던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느 날 나는 슬그머니 이야기의 서두를 꺼냈다.

 "김박사, 오늘 들려주고 싶은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가 있어. 이것은 정말 심각하면서도 귀한 이야기야".

 서두를 꺼내놓고는 본론에 들어가지 못했다. 80년대 초 경제를 회생시키려는 정책토의에 더 열중하고 있는 그의 마음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이야기에 빨려들기 시작 하면서 나의 의도는 까마득히 잊혀지고 말았다.

 '다음에는 반드시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리라. 어떤 일이 있더라도...'.

 전도의 기회를 일단 유보했다. 오늘만이 전부는 아닐 것이기에.

 

 기다리고 기다리던 기회는 곧 찾아왔다.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중국 정부의 공식 초청을 받아 상하이에서 열리는 국제원자력학회에 참석하게 된 것이다. 당시만 하더라도 이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죽의 장막' 으로 불리는 중국에 한국인이 들어간다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 중국방문에 앞서 김박사를 만났다.

 "김 박사, 내가 이번에 중국에 들어가게 되었어. 세상이 참 많이 변했지".

 서두를 이렇게 꺼내자 그는 내게 축하의 악수를 건넸다. 환한 얼굴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나도 대통령을 모시고 동남아에 가기로 되어 있네. 매우 중요한 일이라서 걱정이 많다네".

 그날 우리는 참으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과학자와 경제학자의 만남. 그 만남은 국가의 미래를 염려하는 진지한 자리였다. 그는 유난히도 한국의 경제위기에 대해 염려했다.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모르게 지나가 버렸다.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당초의 계획을 또 다시 뒤로 미뤄야만 했다.

 '다음에 또 기회가 오겠지'.

 그와 헤어지면서 몹시 마음이 무거웠다. 뭔가 중요한 것을 빠뜨린 것처럼 홀가분하지가 않았다. 왜일까.

왜 정작 의도했던 말은 한 마디도 못했을까. 후회스러웠다. 좀더 과감한 전도를 못한 나를 탓하며 며칠 후 중국 출장길에 올랐다. 계속되는 모임과 회의로 인하여 아무 생각도 못한 채 중국에서의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아웅산 폭발사건"

 상하이에서 나는 이 소식을 들었다.

 "아 김재익 박사. 그도 대통령을 수행하지 않았던가. 김재익 박사. 그는 어찌되었을까?"

 나는 모든 회의를 미루어놓고 그의 생사를 확인하는 일에만 매달렸다. 그러나 나의 가장 친한 친구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국가의 장래를 누구보다도 염려했던 그는 먼 이국 땅에서 삶을 마감한 것이었다.

 

 중국의 한 호텔 방에서 마음을 찟으며 통곡했다. 서로의 해외여행을 염려하며 나누었던 그날의 우정이 우리의 마지막 만남이 될 줄이야. '다음 기회'는 영영 오지 않는 것을. 왜 나는 그에게 정작 중요한 이야기를 꺼내보지도 못했던 것일까.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다면 그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어쩌면 아주 쉽게 받아들였을 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그런데 나는...

 가슴이 찟어지는 것 같았다. 울고 또 울었으나 조금도 자책감이 줄어들지 않았다. 생각하면 할수록 자신이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 친구는 누구보다도 선한 사람이었다. 

 "예수를 믿어 거듭나지 못하고도 천국에 갈 수 있을까?"

 이 질문은 오늘날도 끊임없이 나를 괴롭히고 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디모데후서 4장 2절>

 말씀이 비수처럼 날카롭게 가슴에 와 박혔다. 이 말씀을 떠올리며 오열했다. 더 이상 중국에 남아있을 수가 없었다. 급히 귀국하여 사랑하는 친구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후회의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다음 기회는 영원히 오지 않는 것을. 왜 나는 그날 친구에게 복음을 전하지 못했던가. 그를 만나러 갈 때만 하더라도 '중요한 이야기'를 하겠다고 몇 번이나 다짐하지 않았던가. 모든 일에는 우선 순위가 있는 법.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 것보다도 소중한 일이 과연 무엇이었단 말인가. 인간의 힘으로는 안 되는 일이 얼마나 많은데. 인간의 능력으로는 알 수 없는 불가사의한 일들이 얼마나 많은데. 하루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우리가 아니었던가".

 그의 영정을 보면서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

 "여보게, 왜 내게 진작 그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았나. 좀 일찍 내게 말해주면 안되었나?"

 마치 그가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미안하이. 나의 태만이었어. 좀더 적극적이지 못한 것이 이렇게도 후회스럽다네".

 그와 무언의 대화를 나누었다. 김 박사와의 마지막 만남은 가슴속 상처처럼 나의 기억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그 경험을 통해서 나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반드시 전도해야겠다는 결심을 새롭게 하기에 이르렀다.

 "사랑하는 친구여. 이제 자네의 가족을 위해 기도하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