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서평에 대한 최초의 자료는 백춘성 장로가 저술하고 대한간호협회가 1980년에 발간한 그녀의 일대기 《천국에서 만납시다》이다. 이 책에는 독일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교육 받고 개화기 조선 땅에 들어와 서울에서 활동하다가 3.1운동 이후 군산, 광주 등지에서 간호학교 설립, 육아사업, 윤락여성 구조, 빈민구제 등에 헌신했던 그녀의 업적이 자세하게 그려져 있다. 2017년 4월에는 다큐멘터리 〈서서평, 천천히 평온하게〉가 개봉되어 그녀의 진정한 사랑과 신앙의 삶을 세상에 전했다.
바람과 햇살과 숲을 사랑한 소녀
서서평(徐舒平)의 본명은 엘리자베스 요한나 셰핑(Elisabeth Johanna Shepping)이다. 1880년 9월 26일 독일 남부의 휴양도시 비스바덴에서 미혼모 안나 셰핑의 딸로 태어났다. 당시 숙박업소에서 청소부로 일하던 안나가 독일인 남성과 관계를 맺고 원치 않았던 아이로 태어난 것이다.
엘리자베스가 세 살이 되었을 때 어머니 안나는 딸을 버리고 혼자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버렸다.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엘리자베스는 할아버지 안드레아스 셰핑과 할머니 엘리자베스 화버의 품에서 자랐다. 그녀는 불우했지만 몹시 명랑한 성격이어서 고향의 부드러운 바람과 반짝이는 햇살, 녹음이 우거진 숲을 사랑했다고 한다. 그녀는 특히 쏟아지는 빗속에서 춤추는 것을 좋아했다.
아홉 살 때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엘리자베스는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하지만 그녀는 새로운 생활을 하고 있던 어머니로부터 배척당하자 마음에 상처를 담은 채 가톨릭 미션스쿨에 들어갔다. 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간호사가 되기 위해 성 마가병원 간호전문학교에 입학했다.
간호전문학교 졸업반이 되자 엘리자베스는 뉴욕시립병원에서 실습을 받았다. 그때 동료 간호사를 따라 장로교회의 예배에 참석하여 감명 받은 그녀는 전통적인 가톨릭에서 개신교로 개종했다. 간호전문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브루클린 주에 있는 이시병원에 근무하며 근처에 있는 유대인 요양소, 이탈리아 이민자 수용소 등지에서 봉사활동을 했다.
1904년부터 그녀는 뉴욕의 성서교사훈련학교에서 운영하는 ‘여행자를 돕는 선교회(Traveler's Aid Missionary)’에서 본격적으로 봉사활동에 나섰다.
1911년, 엘리자베스는 동료 선교사 포사이더(Forsythe)로부터 삶의 전환점이 되는 소식을 들었다. 태평양 건너에 있는 조선이란 나라가 있는데 의료시설이 부족하고 위생관념조차 없어서 수많은 환자들이 치료조차 받지 못한 채 길가에 버려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은 엘리자베스는 고통 받는 조선인에 대한 헌신이야말로 신이 자신에게 부여한 소명이라고 여기고 남장로회에서 파송하는 해외선교사로 자원했다.
간호선교사로 조선 땅을 밟다
32세 때인 1912년 2월 20일, 엘리자베스는 조선으로 향하는 여객선 코리아호(S.S.Korea)를 타고 20여 일 동안의 기나긴 항해 끝에 생면부지의 땅 조선에 도착했다. 그때부터 엘리자베스는 사람들과의 자유로운 소통을 위해 열심히 한국어를 배웠고, 본명과 발음이 비슷하게 서서평(徐舒平)이라는 한국식 이름까지 지었다.
입국 초기에 서서평은 선교회의 지시에 따라 서울에 있는 세브란스병원에서 간호사 양성과 기독교 선교 활동에 투입되었다.
1919년 거족적인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서서평은 일제의 만행으로 부상당한 조선인들을 치료해 주고 투옥된 독립 운동가들의 옥바라지를 해주었다. 그로 인해 일제로부터 서울 활동이 금지되자 광주에 내려가 선교부에서 운영하는 제중원의 간호사로 일했다.
그때부터 서서평은 전주와 군산, 광주 등지를 오가며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는 여성들에게 성경과 실과 등을 가르쳤다. 군산의 구암예수병원에 근무할 때는 뛰어난 기획력과 사업 수완을 발휘하여 다른 병원에 비해 한국인 조수, 입원 환자 수, 진료횟수 등에 있어서 월등히 높은 성과를 보였다.
‘큰 년’과 ‘작은 년’에게 이름을 지어주다
일제 강점기 서서평이 바라본 조선의 현실은 실로 비참했다. 그녀가 활동하던 광주와 전남 지역은 1930년 기준으로 볼 때 전체 45만 가구 220만 인구 가운데 빈곤층이 88만 명이었고, 걸인이 11만 명에 달했다. 당시 서서평은 남존여비의 그릇된 풍습으로 인해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고 있던 조선 여성들에게 주목했다. 그녀가 만난 많은 여성들이 질병에 시달리거나 굶주리고 있었으며 소박맞아 쫓겨나 오갈 데 없는 처지에 놓인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서서평은 그녀들을 구제하는 것은 물질이 아니라 교육과 신앙이라고 생각하고 1년 중 100여 일 동안 말을 타고 전라남북도는 물론 제주도까지 건너가 병자들을 돌보고 핍박 받는 여성들을 가르쳤다.
당시 서서평은 이름조차 없는 여성들에게 일일이 이름을 지어주고 한글을 가르치면서 인간으로서의 존재감을 일깨워 주었다. 1921년에 그녀가 내쉬빌 선교부에 보낸 편지에는 조선 여성들의 열악한 처지와 자신의 보람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이번 여행에서 만난 여성 500명 중 이름이 있는 사람은 열 명 뿐입니다. 조선 여성들은 ‘돼지할머니’, ‘큰 년’, ‘작은 년’ 등으로 불립니다. 그들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한글을 깨우쳐주는 것이 제 가장 큰 기쁨 중 하나입니다.
1922년 서서평은 미국인 친구 로이스 닐(Lois Neel)의 후원을 받아 1922년 한국 최초의 여성 신학교인 이일학교(Neel Bible college)를 설립했다. 이 학교는 현재 전라북도 완주에 있는 한일장신대의 전신이다. 그 후 서서평은 이일학교 학생들과 함께 농촌 봉사활동에 나서 매년 3만~4만 명의 여성들을 교육시켰다.
그녀는 또 부인조력회와 조선여성절제회, 조선간호부회, 여전도회연합회 등을 창설하여 여성의 권리와 보호에 진력함으로써 조선의 여성운동과 간호계, 개신교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1923년 조선간호부협회를 세운 뒤에는 일본과 별개의 단체로 국제간호협의회(ICN)에 등록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직시한 그녀는 조선 여성들에게 성경의 〈출애굽기〉를 가르치며 독립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려 애썼다. 훗날 한 일간지에서는 이런 그녀의 헌신적인 노력에 경의를 표하며 오만한 일부 선교사들과 신여성인 체하며 사치를 일삼는 여성들을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서 양은 생전에 ‘다시 태어난 예수’로 불렸다. 백만장자처럼 하인을 두고 차를 몰고 다니는 선교사들, 동족의 비참에 눈감고 개인 향락주의로 매진하는 신여성들이 양심에 자극을 받길 바란다.
조선의 여성운동에 앞장서다
서서평은 당시 동양인을 미개인 취급 했던 다른 선교사들과 달리 한국의 자연과 문화를 진정으로 사랑했다. 평소에 그녀는 옥양목 저고리와 검정색 통치마를 입었고, 남성용 검정고무신을 신었으며, 음식도 된장국을 좋아했다고 한다.
1925년 1월 17일 서서평은 광주기독교청년회에서 주최하고 반금정예배당에서 열린 인도(人道)문제강연회에서 3백여 명의 청중들에게 ‘금주 문제에 대하여’라는 제하의 계몽 강연을 했다. 1926년에 한 신문기자는 그녀에 대하여 ‘사랑스럽지 못한 자를 사랑스러운 존재로 만들고, 거칠고 깨진 존재를 유익하고 아름다움을 지닌 기독교인으로서 단련된 생명체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 서서평의 열정’이라고 썼다.
그 무렵 남장로회 소속 미국인 선교사들은 한 달 생활비로 3원을 받았다. 그런데 서서평은 자신을 위해 10전을 사용하고, 나머지는 모두 빈민과 병자, 여성들을 위해 사용했다. 그들을 위해서는 어떤 어려움에도 좌절하지 않았다. 광주 양림동에서 여성들의 자립을 위해 양잠업을 지도하던 중 시설이 비좁고 뽕나무가 부족하자 미국 선교부에 기금을 요청했고, 제주도에서는 빈민들과 함께 산에 올라가 고사리를 캐기도 했다.
1929년 서서평은 안식년을 맞아 미국으로 건너갔을 때 어린 시절 자신을 버리고 떠난 어머니 안나 셰핑을 만났다. 그런데 매정한 어머니는 가톨릭에서 개신교로 개종한 것도 모자라 고된 선교사 생활로 인해 거지꼴이 된 딸을 몹시 부끄러워하며 외면해 버렸다.
서서평은 평생 세 차례나 어머니로부터 버림받았다. 세 살 때 어머니는 그녀를 버리고 미국으로 이민 갔으며, 청소년 시절 미국에 건너가 어머니를 만나려 했지만 쫓겨났고, 선교사가 되어 잠시 귀국했을 때 어머니를 만났지만 초라한 행색의 딸을 어머니는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서서평은 그런 내면의 아픔을 신앙과 인간애로 승화시켜 조선의 자식들에게 더 큰 사랑으로 전해 주었다.
출생의 비천함과 소외감을 긍정적인 삶의 태도로 변화시킨 서서평은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그녀의 따스한 손길은 미혼모, 고아, 나환자, 노숙인 등을 가리지 않았다. 그녀는 또 수양딸 13명과 나환자의 아들 1명 등 한국 어린이 14명을 입양하여 훌륭하게 키워냈고, 시대가 외면하던 과부 38명을 자립시켜 새 삶을 살도록 해 주었다.
1932년 6월 10일 이일학교에서는 서서평의 선교 20주년 기념식을 열어 그녀의 노고를 위로했다. 1933년 그녀는 나환자 530명을 이끌고 서울에서 행진을 벌였다. 일제 총독부의 나환자 정관수술 정책에 반대하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총독부는 정관수술 정책을 폐기하고 소록도에 갱생원을 지어주기로 약속했다. 그때부터 서서평은 ‘나환자들의 어머니’가 되었다.
버림받은 자들의 어머니
1934년 6월 26일, 서서평은 광주에서 만성풍토병과 과로, 영양실조로 인해 5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동아일보는 1934년 6월 28일자 기사에는 ‘이국분투 25년 자선, 교육 사업에 일생 바친 빈민의 자모 서서평 양 장서’란 제하에 다음과 같이 그녀의 죽음을 애도했다.
조선의 여성운동에 앞장서다
서서평은 당시 동양인을 미개인 취급 했던 다른 선교사들과 달리 한국의 자연과 문화를 진정으로 사랑했다. 평소에 그녀는 옥양목 저고리와 검정색 통치마를 입었고, 남성용 검정고무신을 신었으며, 음식도 된장국을 좋아했다고 한다.
1925년 1월 17일 서서평은 광주기독교청년회에서 주최하고 반금정예배당에서 열린 인도(人道)문제강연회에서 3백여 명의 청중들에게 ‘금주 문제에 대하여’라는 제하의 계몽 강연을 했다. 1926년에 한 신문기자는 그녀에 대하여 ‘사랑스럽지 못한 자를 사랑스러운 존재로 만들고, 거칠고 깨진 존재를 유익하고 아름다움을 지닌 기독교인으로서 단련된 생명체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 서서평의 열정’이라고 썼다.
그 무렵 남장로회 소속 미국인 선교사들은 한 달 생활비로 3원을 받았다. 그런데 서서평은 자신을 위해 10전을 사용하고, 나머지는 모두 빈민과 병자, 여성들을 위해 사용했다. 그들을 위해서는 어떤 어려움에도 좌절하지 않았다. 광주 양림동에서 여성들의 자립을 위해 양잠업을 지도하던 중 시설이 비좁고 뽕나무가 부족하자 미국 선교부에 기금을 요청했고, 제주도에서는 빈민들과 함께 산에 올라가 고사리를 캐기도 했다.
1929년 서서평은 안식년을 맞아 미국으로 건너갔을 때 어린 시절 자신을 버리고 떠난 어머니 안나 셰핑을 만났다. 그런데 매정한 어머니는 가톨릭에서 개신교로 개종한 것도 모자라 고된 선교사 생활로 인해 거지꼴이 된 딸을 몹시 부끄러워하며 외면해 버렸다.
서서평은 평생 세 차례나 어머니로부터 버림받았다. 세 살 때 어머니는 그녀를 버리고 미국으로 이민 갔으며, 청소년 시절 미국에 건너가 어머니를 만나려 했지만 쫓겨났고, 선교사가 되어 잠시 귀국했을 때 어머니를 만났지만 초라한 행색의 딸을 어머니는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서서평은 그런 내면의 아픔을 신앙과 인간애로 승화시켜 조선의 자식들에게 더 큰 사랑으로 전해 주었다.
출생의 비천함과 소외감을 긍정적인 삶의 태도로 변화시킨 서서평은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그녀의 따스한 손길은 미혼모, 고아, 나환자, 노숙인 등을 가리지 않았다. 그녀는 또 수양딸 13명과 나환자의 아들 1명 등 한국 어린이 14명을 입양하여 훌륭하게 키워냈고, 시대가 외면하던 과부 38명을 자립시켜 새 삶을 살도록 해 주었다.
1932년 6월 10일 이일학교에서는 서서평의 선교 20주년 기념식을 열어 그녀의 노고를 위로했다. 1933년 그녀는 나환자 530명을 이끌고 서울에서 행진을 벌였다. 일제 총독부의 나환자 정관수술 정책에 반대하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총독부는 정관수술 정책을 폐기하고 소록도에 갱생원을 지어주기로 약속했다. 그때부터 서서평은 ‘나환자들의 어머니’가 되었다.
버림받은 자들의 어머니
1934년 6월 26일, 서서평은 광주에서 만성풍토병과 과로, 영양실조로 인해 5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동아일보는 1934년 6월 28일자 기사에는 ‘이국분투 25년 자선, 교육 사업에 일생 바친 빈민의 자모 서서평 양 장서’란 제하에 다음과 같이 그녀의 죽음을 애도했다.
광주읍 양림정에 있는 이일학교의 설립자이며 교장인 서서평 양은 지금으로부터 25년 전에 조선에 들어온 이후 선교 사업은 물론 많은 사람을 구제하는 사회사업과 교육 사업에 노력하여 오던 중 1922년에는 이일학교를 창립하야 우금 13년 동안에 성경과 36명, 과학과 37명의 졸업생을 내었으며, 방금 66명의 재적생이 있었다 한다. 이 학교는 이혼 당한 여자, 남편이 죽고 없는 여자, 학령이 초과한 여자 등을 교양하여 왔었는데 동 서서평 양은 학교 창설 이래 자기의 생활비 일체까지 학교 유지비에 바치었으므로 사생활은 극도로 곤란하였다 하며 무너진 주택을 수선할 여유조차 없었다 한다. 그러던 중 지난 26일 오전 4시에 드디어 이 세상을 떠났다는 바 그 장의는 전 광주기독교단체 연합장으로 성대히 거행하리라 한다
22년 동안의 헌신적인 삶을 접은 서서평의 유산은 담요 반 장, 동전 7전, 강냉이가루 2홉뿐이었다. 그녀는 임종에 앞서 자신의 시신을 의학용으로 기부하기까지 했다. 텅 빈 그녀의 침대 맡에는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다.(Not Success But Service)’라는 좌우명이 걸려 있었다. 동료 선교사들은 ‘한국의 메리 슬레서’를 잃었다며 몹시 슬퍼했다. 메리 슬레서는 나이지리아에서 고아들을 돌보다 숨져 ‘아프리카 어린이들의 어머니’로 추앙받은 선교사이다.
광주 최초의 시민사회장으로 치러진 서서평의 장례식에는 수천 명의 광주 시민과 나환자들이 참석하여 ‘어머니!’를 외치며 오열했다. 이일학교 여학생들이 운구행렬을 시작하자 수많은 여성들이 소복을 입고 뒤따랐다. 그렇듯 자신의 어머니로부터 버림받았던 엘리자베스 셰핑은 사고무친한 조선 땅에서 모든 버림받은 자들의 어머니가 되었다.
그녀의 일생이 다큐 영화로 제작되어 온 세계인들의 마음을 울렸다.
영화 ‘서서평, 천천히 평온하게’는 독일계 미국인 선교사 서서평(본명 엘리자베스 요한나 쉐핑/1880~1934)의 감동적인 일대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다. 서서평은 미국 장로교가 선정한 ‘가장 위대한 여선교사 7인’ 중 유일한 한국 파견 선교사로 1934년, 당시 전라남도 광주에서 과로와 영양실조, 만성풍토병으로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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