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약궤의 비밀
회막의 휘장
하나님의 영광을 상징하는 불기둥은 성막에 비쳤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회막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지성소입니다. 불기둥은 지성소에 비쳤습니다. 이 지성소는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장소였습니다. 오직 일 년 중 7월 10일 하루만 지성소에 사람이 들어 갈 수 있었습니다. 다른 날 그곳에 들어가면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것도 대제사장만 그곳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성경은,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년 일차씩 들어가되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이 피는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것이라”(히 9:7)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지성소는 금지구역이었고 신성구역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불기둥을 봤지만 그 불을 직접 쬘 수는 없었습니다. 대제사장이라고 할지라도 일 년에 하루밖에 못 들어갔기 때문에 충만하게 불기둥을 쬘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셨을 때 성소의 휘장이 둘로 갈라졌습니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마 27:51)
회막은 성소와 지성소로 구분이 되어 있었는데 그 가운데 휘장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휘장을 둘로 찢으신 것입니다.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히 10:20)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육체는 바로 휘장이었습니다. 오직 일 년에 하루밖에는 못 들어가는 지성소를 가로 막는 휘장이었습니다. 오직 대제사장만이 들춰서 들어갔던 두껍고 무거운 휘장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휘장이 둘로 찢어진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몸이 둘로 갈라진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몸이 둘로 쪼개진 것입니다. 마치 짐승이 쪼개지듯이 두 조각으로 쪼개진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셨던 하나님께서 스스로 쪼개진 짐승 사이로 지나가신 것을 상상케 합니다.
“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햇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창 15:17)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세우실 때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고대근동지방에서의 계약체결의식을 보면 원래 약한 자가 쪼갠 짐승 사이로 지나가야 옳은 것입니다. 그래서 언약을 파기할 경우엔 쪼갠 짐승처럼 쪼개짐을 당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대신에 스스로 쪼갠 짐승 사이로 지나가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스스로 휘장이 되셔서 당신의 몸을 두 조각으로 쪼개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큰 사랑이며 큰 은혜입니다.
지성소의 은혜
이것은 매우 기쁜 소식입니다.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는 지성소가 모든 사람에게 공개된 것입니다. 그것도 일 년에 하루만 허락되었던 지성소가 언제든지 누구에게나 항상 열려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하나님을 뵙는 것은 죽음을 뜻했기 때문입니다(출 10:28).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갈 수 있겠습니까? 예수께서 성소와 지성소의 휘장을 갈라놓으셨으므로 가능해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우리는 언제든지 지성소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지성소는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는 곳입니다. 이곳은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장소가 아닙니다. 이곳에선 오직 한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곳엔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이 있습니다.
세상의 근심 걱정을 가져와선 안 됩니다. 대제사장도 이곳에 들어올 때는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대하는 것을 불경하게 여겨 향로의 연기를 자욱하게 만들어 직접 보지 못하게 한 후에 들어갔습니다.
“향로를 취하여 여호와 앞 단 위에서 피운 불을 그것에 채우고 또 두 손에 곱게 간 향기로운 향을 채워 가지고 장 안에 들어가서 여호와 앞에서 분향하여 향연으로 증거궤 위 속죄소를 가리우게 할찌니 그리하면 그가 죽음을 면할 것이며”(레 16:12-13)
언약궤의 구조
지성소에는 오직 언약궤만이 있습니다. 어떤 성경학자는 아래 구절 때문에 금향로와 언약궤가 함께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지성소에는 오직 언약궤만이 놓여 있습니다.
“금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비석들이 있고”(히 9:4)
히브리서 기자가 지성소에 금향로와 언약궤가 함께있다고 설명한 것은 이 땅의 지성소를 가리킨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늘의 성막을 가리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히 8:5)
모세가 성막을 지었을 때는 그 누구도 지성소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오직 대제사장만이 일 년에 하루 동안 들어갈 수 있었을 뿐입니다. 누구든지 함부로 지성소에 들어가면 죽임을 면치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금향로는 지성소 휘장 앞에 놓여져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늘의 성막에는 금향로가 언약궤와 함께 있는 것이 옳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성도의 기도가 하나님의 영광을 상징하는 언약궤와 함께 함이 옳지 않겠습니까?
언약궤는 하나님의 실체입니다. 언약궤 안에는 증거판과 만나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들어 있습니다.
언약궤를 지상에서 바라 봤을 때의 의미와 천국에서 바라봤을 때의 의미는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지상에 있는 언약궤 속의 성물들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돌 판은 말씀이신 주님을 상징합니다.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부활이신 주님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금 만나 항아리는 생명이신 주님을 상징합니다.
하지만 천국에서 바라본 언약궤의 성물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돌 판은 인간의 구원의 계획을 위해 하나님께서 선언하신 모든 말씀을 상징하며 그것은 곧 언약을 뜻합니다.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없는 것을 있게 하며 죽음을 생명으로 만드는 믿음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금 만나 항아리는 백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극진하신 사랑하심을 상징합니다. 언약과 믿음, 그리고 사랑은 천국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입니다. 왜 언약궤 안에 이 세 가지가 들어 있는지 아시겠습니까? 하나님 나라에 가장 중요한 것들입니다. 우리는 성경 전체를 통해 이 세 가지 내용이 가장 중요한 내용임을 알 수 있습니다.
언약궤의 구조를 생각해 볼 때 더 놀라운 영적 비밀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언약궤의 구조는 간단합니다. 가로 2규빗 반과 세로 1규빗 반 높이 1규빗 반으로 만들어진 박스입니다. 한 규빗을 45cm로 계산했을 때 언약궤의 크기를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조각 목으로 궤를 짓되 장이 이 규빗 반, 광이 일 규빗 반, 고가 일 규빗 반이 되게 하고”(출 25:10)
사람이 직접 그 궤를 들고 갈 수 없습니다. 물론 짐승을 통해서 이동해서도 안됩니다. 사람이 함부로 만지면 죽게 되었습니다.
“저희가 나곤의 타작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의 잘못함을 인하여 진노하사 저를 그곳에서 치시니 저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삼하 6:6-7)
웃사는 레위지파 사람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함부로 언약궤를 만져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언약궤에 사람의 손이 닿으면 그 사람은 죽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언약궤를 맬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그 채를 궤 양편 고리에 꿰어서 궤를 매게 하며”(출 25:14)
언약궤는 세 가지로 분리되어 있습니다.
“그가 또 증거 판을 궤 속에 넣고 채를 궤에 꿰고 속죄소를 궤 위에 두고”(출 40:20)
언약궤 그 자체가 하나이고 언약궤를 덮는 것이 그 하나입니다. 그리고 언약궤를 들을 수 있는 양쪽 막대기가 그 하나입니다. 언약궤를 덮고 있는 것은 속죄소입니다. 이는 언약궤를 덮고 있는 속죄소가 매우 큰 의미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속죄소에서는 짐승의 피를 뿌렸습니다. 대제사장을 위해 피를 뿌렸으며 백성의 죄를 위해 피를 뿌렸습니다. 그리고 그 속죄소는 두 그룹이 날개를 치켜 세운 형상으로 지성소를 감싸고 있습니다.
“그룹들은 그 날개를 높이 펴서 그 날개로 속죄소를 덮으며 그 얼굴을 서로 대하여 속죄소를 향하게 하고”(출 25:20)
언약궤와 불기둥
하나님의 불기둥은 정확하게 이 속죄소의 피를 통해 언약궤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속죄소가 의미하는 바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습니다. 속죄소는 예수님의 피 흘림의 상징입니다.
성경은,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나아갈 자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권능을 취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고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히 9:11-12)
그렇다면 왜 하늘의 불기둥이 지성소에 비쳤을까요?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불기둥은 지성소 안에 있는 언약궤에 비춰진 것입니다. 하늘의 하나님이 이 땅의 하나님의 실체와 불기둥으로 연결되었음은 놀라운 사실이 아닙니다.
성막의 구조에서 설명 드렸듯이 회막은 네 개의 덮개로 덮어져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소와 지성소는 어둠 그 자체입니다. 다행히 성소에는 정금 등대가 있습니다. 1년 365일 켜져 있어야 했기 때문에 성소는 항상 밝습니다. 하지만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는 휘장이 가로 막고 있기 때문에 성소와 달리 지성소는 어둠뿐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여 성막을 만들 때 성소는 밝게 하고 지성소는 어둡게 했을까요? 지성소는 인간의 빛이 필요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성소는 하늘에서 직접 내려 온 불기둥에 의해 항상 밝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빛이 필요 없었던 것입니다.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 피 뿌리는 의식을 행할 때에도 빛을 내는 도구를 가지고 가지 않았습니다. 그저 향단의 연기를 자욱하게 뿌린 후 자신과 백성의 죄를 사하기 위해 송아지와 염소피를 뿌렸을 뿐입니다.
“향로를 취하여 여호와 앞 단 위에서 피운 불을 그것에 채우고 또 두 손에 곱게 간 향기로운 향을 채워 가지고 장 안에 들어가서 여호와 앞에서 분향하여 향연으로 증거궤 위 속죄소를 가리우게 할찌니 그리하면 그가 죽음을 면할 것이며 그는 또 수송아지의 피를 취하여 손가락으로 속죄소 동편에 뿌리고 또 손가락으로 그 피를 속죄소 앞에 일곱번 뿌릴 것이며 또 백성을 위한 속죄제 염소를 잡아 그 피를 가지고 장 안에 들어가서 그 수송아지 피로 행함 같이 그 피로 행하여 속죄소 위와 속죄소 앞에 뿌릴찌니”(레 16:12-15)
언약궤의 축복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기 위해선 우리의 모든 것을 내려 놔야 합니다. 심지어 하나님께 집중해야겠다는 마음도 내려놔야 합니다. 호흡도 조용히 하십시오. 잡생각이 나지 않도록 깊은 집중에 마음을 놓으십시오. 이와 같은 방법은 세상의 것들과는 다른 것입니다. 세상의 집중은 그들 스스로 하는 것이지만 우리가 하는 집중은 하나님과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집중은 마음을 비우는 것이지만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은 고요함 속에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집중하게 되면 모든 근심과 걱정과 불안과 공포와 두려움이 사라지게 됩니다. 추운 곳에서도 따뜻함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집중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언약궤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앞서 설명했듯이, 지성소가 중요한 것은 그곳에 언약궤가 있기 때문입니다. 지성소에만 거하더라도 하나님의 큰 영광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언약궤 안에 들어 갔을 때 더욱 큰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할 수 있으며 영광의 빛을 쬘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충만을 느낄 수 있으며 성령의 불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름부음이며 성령충만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언약궤가 중요한 것은 언약궤를 덮고 있는 속죄소와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속죄소에는 짐승의 피가 뿌려졌습니다. 그 피는 예수님의 피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새롭고 산 길이 되셨습니다.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히 10:20)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그 누구도 하나님의 영광체험을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할 수 있는 새롭고 산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만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예수님의 피를 상징하는 속죄소를 통하지 않고는 그 누구도 언약궤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속죄소가 중요하기 때문에 언약궤가 중요한 것입니다. 당신이 성령의 불을 받기 원한다면 반드시 언약궤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반드시 속죄소를 거쳐야 합니다.
속죄소를 통한 언약궤기도
나는 날마다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할 때 이 언약궤 안으로 들어갑니다. 이 말은 육체적으로 들어간다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언약궤에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언약궤 안으로 들어가면 가장 먼저 언약궤 위에 놓여져 있는 속죄소를 인식합니다. 그리고 그곳에 뿌려져 있는 예수님의 피를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피를 생각할 때 예수님의 보혈은 온 몸에 뿌려집니다.
예수님의 보혈이 온 몸에 뿌려질 때 중요한 점은, 그 보혈의 능력을 완전히 인정하고 받아 드린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혈을 내 몸에 뿌린다는 것은 보혈을 지난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듯이 나도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그런 죽음까지도 불사하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것입니다. 그저 단순히 능력 받기 위해 형식적으로 행하는 그런 피 뿌림이 아닙니다.
어느 날 성령님은 제게 가시면류관 쓰신 예수님을 바라보라고 하셨습니다. 영의 눈으로 바라보았더니 실제로 제 앞에 예수님이 가시면류관을 쓰신 채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은 가시면류관의 독성분 때문에 퉁퉁 부어있었습니다. 어찌나 로마군인들이 가시면류관을 힘있게 눌러 씌웠던지 가시면류관은 예수님의 머리껍질을 뚫고 들어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가시면류관 때문에 예수님의 얼굴은 온통 피 투성이었습니다.
좀더 자세히 예수님의 얼굴을 보기 위해서 십자가에 몸을 가까이 다가섰는데 그만 내 이마가 가시면류관에 찔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 찔림과 아픔이 고스란히 내게 전해졌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께서 저를 향해 눈을 뜨셨습니다. 순간 저는 깜짝 놀랬습니다. 나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눈이 온통 빨갛게 물들었기 때문입니다. 피가 흘러 내려서 빨개진 것이 아니라 눈의 실핏줄이 터져서 그렇게 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나를 바라 보신 예수님의 눈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고통이 그 눈을 감기게 하기는 예수님의 의지가 너무나 강렬하고 크신 것이었습니다. 마치 내게 무슨 할 말씀이라도 있는 것처럼 감으시지 않고 또렷이 나를 쳐다보셨습니다. 나는 예수님의 눈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미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
나는 십자가를 짊어 질 것입니다. 나를 위해 짊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을 위해서 그리할 것입니다. 나의 인생문제로 십자가를 지지 않을 것입니다. 나의 자녀 문제로도 그리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주님의 영광을 위해 십자가를 짊어 질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것임을 압니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원하는 것이 될 것도 압니다.
언약궤 안으로 들어가라
영의 기도를 하기 위해선 언약궤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언약궤는 지성소 안에 놓여져 있습니다. 이미 말슴 드렸듯이 지성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언약궤가 중요한 것입니다. 언약궤 없는 지성소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내게 음성을 처음 들려주신 다음 날부터 특별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영아, 언약궤로 들어가거라”
성령님의 말씀은 내게 혼란을 가져왔습니다. 그 당시에 나는 언약궤가 무엇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알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성령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성령님, 무슨 말씀이신지요?”
성령님은 나의 마음의 혼란을 아시고 구체적으로 언약궤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성령님께서 말씀하신 언약궤는 지성소 안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자신의 성막에다 언약궤를 만들었고 그 언약궤를 보관했습니다. 그 크기가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정도가 아니라는 것은 짐작이 가시죠? 그런데 어떻게 언약궤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요? 성령님의 말씀은 육적인 해석이 필요치 않은 영적인 것이었습니다. 성령님의 말씀을 영적으로 들어야 이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과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계 11:19)
우리가 사모하는 천국에는 성전이 있습니다. 모세가 지었던 성막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였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그렇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노아가 하나님의 지시하심에 따라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한 방주를 만들었던 것과 같은 것입니다.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히 8:5)
하늘의 성전에는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습니다. 이것은 언약궤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언약궤 안에는 세가지 성물이 들어 있습니다. 그것의 중요함은 이미 우리가 언급한 것처럼 두 돌판과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만나 금항아리입니다. 이것의 의미하는 것이 언약과 믿음과 사랑이라고 이미 말씀 드렸습니다. 이 세 가지 성물의 의미하는 바가 천국을 대표하는 내용이라고 이미 언급했습니다.
하늘의 성전에 언약궤가 놓여있고 마치 지상의 성전에 핵심으로 자리하듯이 천국에서도 그리 하다면 우리가 날마다 언약궤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대답히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천국에 가면 알게 되겠지만 우리는 매일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이 당에서 예배 드리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끔찍한 일이 되겠지만 천국에선 매일 예배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친히 거하셔서 우리와 함께 찬양을 하고 예배를 받으실 것입니다.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계 21:3)
언약궤 기도를 통한 영광체험
성령님은 나로 하여금 언약궤 안으로 들어가게 하셨고 실제로 나는 언약궤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안을 들어가는 순간에 하나님의 영광체험은 아주 빠르고 급속히 내게 임하였습니다. 사실 지성소는 언약궤 때문에 폼 나는 것입니다. 언약궤가 없는 지성소는 빈방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언약궤가 중요한 것이지 지성소가 중요한 것이 아님을 이제는 이해하셨을 줄로 믿습니다.
나는 날마다 언약궤로 들어갑니다. 성령님께서 언약궤 안으로 들어가라고 말을 할 때는 나는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라는 신호임을 알아챕니다. 성령님께서 내게 언약궤 안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신 이래로 지금껏 나는 단 한차례도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지 못한 적이 없습니다. 물론 나 자신이 정결하지 못하고 거룩하지 못했을 대 하나님의 영광체험을 경험하지 못했던 적도 있습니다.
언약궤로 들어가기 위해선 먼저 예수님의 피를 몸에 뿌리는 과정에는 여러가지 체험이 있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만나기도 하며, 예수님의 눈을 바라보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의 당하신 고난을 몸소 체험하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십자가 밑에서 뚝뚝 떨어지는 예수님의 피를 느끼기도 합니다.
이러한 피 뿌림의 과정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하늘의 문이 열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과정은 영적으로 행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의지로 체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
하늘의 문이 얼리게 되면 그 열린 문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이 충만하게 밀려옴을 느낍니다. 영광의 구름은 언약궤 속을 꽉 채우기 시작하며 당신의 몸은 그 구름에 잠기게 될 것입니다. 영광의 구름으로 채워진 당신의 몸은 그 어떤 나쁜 영도 침범할 수 없게 합니다. 사탄 마귀의 권세는 완전히 당신과 구별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이 언약궤와 당신을 가득 채울 때 예수님의 빛이 하늘에서 당신 가슴으로 내려옵니다. 그 빛은 속죄소의 보혈을 통과하게 될 것이며 당신 영혼과 육신을 치유하는 빛이 될 것입니다. 빛이 비춰질 때 당신 몸 안에 있는 모든 악한 영들이 물러나게 될 것입니다. 만약 당신의 몸에 질병이 있다면 그 빛을 질병 있는 곳으로 비추도록 하십시오. 당신의 뜻대로 그 빛은 질병에 비춰지게 될 것이며 당신은 치유 받게 될 것입니다. 질병 치료를 위해서 그 빛은 레이저광선처럼 강하고 단단한 빛이 될 것입니다. 말라기 4장 2절은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빛이 내리 쬐는 그 시각에 성령의 불이 가스 불처럼 당신 가슴에서부터 일순간 확 타오르게 될 것입니다. 성령의 불은 당신 영혼과 육신의 더러운 생각과 죄들을 태우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님의 빛과 성령의 불을 서로 다른 것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 세 가지는 하나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세 위격으로 하나이듯이 영광과 빛과 불은 하나입니다.
이 세 가지의 권능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당신 영혼을 세 권능에 일치시키십시오. 그럴 때 당신 몸의 변화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당신 몸은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게 될 것이며 빛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성령의 불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 세 가지는 모두 똑 같은 변화를 가져옵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을 체험하는 것이나 그리스도의 빛을 쬐는 것이나 성령의 불을 받는 것은 모두 같은 내용입니다. 저는 이와 같은 일련의 과정을 성령의 불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성령의 기름부음이라고도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성령 충만 이라고도 말합니다.
출처: 국제성경연구원
'기독교 >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CBS 올포원 2강 부부로 함께 산다는 것 / 김병삼 김문훈 김동호 (0) | 2018.11.15 |
---|---|
[스크랩] 언약궤의 비밀 (이다윗 목사) (0) | 2018.11.13 |
CBS '하나님은 누구신가'한가지주제로/김동호,김병삼,김문훈목사 세분의 서로 다른 관점은 (0) | 2018.11.10 |
죽기전 마지막 설교를 한다면 무엇을 전할까? /박보영 목사 (0) | 2018.11.04 |
탈북자 강철호 목사 (0) | 2018.11.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