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간증

탈북 김명 -감동의 간증과 오카리나 특송

배남준 2018. 1. 3. 13:00





롤러코스트 같은 드라마틱한 삶을 살아온 새터민 김명(본명 김정우·25)은 탈북청소년 대안학교에서 오카리나 연주 ‘고향의 봄’을 듣자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심금을 울리는 오카리나 연주에 상처가 씻은 듯이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그때부터 오카리나를 독학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런 그가 최근 경기도 김포에서 대구로 삶의 터전을 옮겨 왔다. 생면부지의 낯선 땅 대구로 그를 이끈 것은 오카리나 연주자로 성공하겠다는 절박한 꿈이었다.

◇ 오카리나 연주자 되기 위해 희망의 땅 대구로…

김명은 독학으로 오카리나를 배운 이후 7년 동안 서울 청계천과 인사동에서 틈틈이 버스킹을 해왔다. 처음 버스킹을 시작했던 시기는 10대 후반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관객들은 탈북 청소년의 호기어린 열정 정도의 가벼운 시선으로 격려해주곤 했다. 하지만 성인이 되면서 격려의 박수는 냉정한 평가로 바뀌었다.

- 반응이 달라진 이유가 무엇이었나?

“처음에는 탈북청소년의 장기자랑 정도로 봐 주셨던 것 같다. 하지만 성인이 되자 실력으로 평가하기 시작했다. 언제까지나 애교로 봐 줄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 무엇이 문제였다고 진단했나?

“독학으로 오카리나를 배웠기 때문에 기초적인 연주력에 머물렀던 것 같다. 더 이상의 성장에 한계가 온 것이다.”

- 25살의 청년이 생면부지의 대구에 혼자 오는 것은 쉽지 않다.

“부족한 연주력을 극복해서 프로 연주자가 되겠다는 꿈이 있어 가족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올 수 있었다. 좋은 선생님이 있는 대구에 오는 것은 그 꿈에 한 걸음 다가가는 길이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 꿈을 실현시켜 줄 선생님은 누구인가?

“오카리나 연주자이자 대신대 플루트학과 교수인 김준우 선생님이시다. 클래식을 전공하고 오카리나 연주를 하셨기 때문에 음악성도 높고 경험도 풍부하시다. 음악교육을 전혀 받아본 적 없는 내게는 꼭 필요한 선생님이다.”

- 김준우 교수가 김명의 연주를 어떻게 평가했나?

“혹평과 호평이 엇갈렸다. 내가 독학으로 공부한 연주법이 정통 오카리나 연주법이 아니라고 하셨다. 처음부터 다시 공부해야 한다고도 하셨다. 반면에 심금을 울리는 정서를 오카리나에 십분 살려낸다는 긍정적인 평도 해 주셨다.”

-대구에서 얼마동안 머물 예정이며, 계획은 무엇인가?

“일단은 대신대 플루트학과 입학을 목표로 올 한해 레슨을 받을 예정이다. 내년에는 대신대에 진학해서 전문 오카리나 교육을 받고 싶다. 적어도 대학 졸업 때까지는 대구에 정착할 예정이다.”

◇ 영화보다 더 영화 같았던 탈북 과정

탈북 새터민 김명. 그에게서 사선을 넘어온 탈북자의 아픔은 감지되지 않았다. 나이보다 어려보이는 동안(童顔)인데다 고생이라고는 안 해 본 것 같은 훈훈한 미소와 부드러운 외모가 친근함을 더했다. 하지만 그의 입을 통해 들려준 탈북 사연은 영화보다 드라마틱했다.

김명은 5살이던 1997년에 가족의 손에 이끌려 첫 탈북을 감행했다. 외할머니와 외삼촌, 이모, 그리고 그의 어머니와 함께였다. 이들의 첫 번째 탈출은 대한민국행에 오르지도 못한 채 중국 심양에서 멈췄다. 중국공안을 피해 심양에 있는 곳곳의 한국교회에 피신해 다녔다. 하지만 그마저 오래 가지 못했다. 중국인의 신고로 공안에 의해 북한 정치범 수용소에 끌려가서 갖은 고초를 겪어야 했던 것.

- 수용소에서 어떻게 됐나?

“고초를 겪다가 결국 이대로는 모두 죽을 것 같아 탈출을 감행했다. 그러나 그만 중국에서 공안에게 붙잡혔다. 그때 외할머니가 이모와 나와 어머니가 탈출할 수 있도록 중국공안을 붙잡으며 시간을 벌어주셨고, 우리는 다시 중국의 인근교회로 피신할 수 있었다.”

- 외할머니와 외삼촌은 어떻게 됐나?

“북한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가 비참하게 지내다가 돌아가셨다고 들었다.”

- 아버지는 왜 함께 가지 않았나?

“내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셨다.”

그들의 두 번째 탈북도 순조롭지 못했다. 셋이 함께 움직일 경우 자칫 모두 또다시 북한으로 끌려갈 수 있다는 위기감에 김명을 단동에 남겨두기로 한 것. 결국 그의 이모와 어머니만 먼저 대한민국으로 넘어오고 김명은 곧바로 브로커를 통해 데려올 작정이었다. 하지만 운명은 또다시 김명의 편이 아니었다.

- 5살에 탈북해 12살에 북한으로 끌려갔다 다시 탈북해 중국 단동에 혼자 남겨졌다. 어떻게 됐나?

“공안에 의해 다시 북한으로 끌려가 수용소에 수감됐다. 수 개월 후 풀려나 고향으로 내려갔지만 어머니와 연락을 할 방법이 없었다. 4년을 혼자 연명하다가 16살에 가다가 죽더라도 어머니를 만나야겠다는 신념으로 탈북을 감행했다.”

- 16살의 청소년이 국경을 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인데…

“일단 국경으로 가는 기차를 몰래 탔다. 표를 검사하는 승무원에게 들킬까봐 기차 위 난간과, 계단 틈에서 죽음과 사투를 벌였다. 국경까지 가는데 꼬박 열흘이 걸렸는데 그 기간 동안 오롯이 굶었다. 기차 위에서 죽음과 싸워야 했고 열흘을 굶으며 지옥을 보았다.”

- 열흘을 굶고도 살아남았다니 기적이다.

“사나흘 굶으면 아무 생각이 안 난다. 그 뒤로는 사람이 음식으로 보인다. 정신이 몽롱해지고 사리분별을 할 수 없어 살아도 산 목숨이 아닌 상태다.”

- 그 후 어떻게 됐나?

“기차에서 내려서 탈진해 철길 옆에 쓰러졌다. 다행히 국경 근처의 북한주민이 나를 데려다가 따뜻한 아랫목에 눕히고 먹을 것을 주어 몸을 추스르게 해 주었다. 그분이 고맙게도 탈북경비로 쓰라며 돈까지 주셨는데, 북한 돈으로 5천원이었다. 한국 돈으로 10만원에 해당된다.”

◇ 대한민국에서 새로운 꿈을 꾸다.

김명은 탈북과 북송을 반복하다 16살에 대한민국 품에 안겼다. 5살부터 탈북과 정치범수용소 감금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제도권 교육은 받지 못했다. 학벌 사회인 대한민국에서 무학인 그의 이력은 치명적인 결점이다. 김명은 정규교육기관에서 공부를 한다는 것은 어렵다고 판단하고 검정고시를 준비하고 고등학교 과정을 졸업했다.

그는 학교 공부보다 사회경험으로 잃어버린 10년을 채워가려 했다. 그러면서 대한민국의 직업이라는 직업은 가리지 않고 경험해 나갔다.

- 어떤 일을 해 봤나?

“어린나이에 북한에서 혼자 끼니를 해결 해야 했다. 그때 내가 요리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남한에 와서 식당 설거지, 전집이나 족발집, 중식당 주방 등에서 요리를 하기도 했다. 컴퓨터를 고치는 것도 좋아해서 마이크로 소프트사 한국지사의 견학도 해봤다.”

- 원양어선도 탔다고 들었다.

“돈을 벌어 성공하고 싶어 원양어선을 타기도 하고, 신축빌라 매매를 중개하는 부동산 중개사도 해보고, 작은 돈으로 주식투자도 경험했다. 북한에서 혼자 있을 때 농사도 지었기 때문에 농사에 자신이 있어서 과학농사일도 해 봤다. 대한민국 직업은 다 경험하며 자본주의를 공부하려 했다.”

김명은 자신의 나이를 10살이라고 했다. 대한민국에 입국한 날 새로 태어났다는 의미다. 아직은 채 10살 밖에 안된 미숙한 존재라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 북한 체제와 대한민국 체제가 그만큼 다르다는 뜻도 된다. 적응이 쉽지 않았지만 악바리처럼 몸을 아끼지 않았다.

한국에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사회적인 편견이었다. 그는 “대한민국은 인맥이 그물망처럼 얽혀 있는 사회다. 인맥이 없는 북한 출신인 우리 새터민에게는 불리한 사회일 수 밖에 없다”며 “가족 외에는 기댈 곳이 없다. 관계망도 없지만 새터민을 바라보는 사회적인 편견도 우리를 힘들게 하고 있다. 새터민에게는 뿔이 달리고, 피부가 빨갛다고 할 정도로 편견이 심하다”고 힘겨웠던 지난 시간을 떠올렸다.

- 북한과 달리 대한민국에서는 돈이 중요한 사회다. 왜 돈보다 오카리나를 선택했나?

“처음엔 돈을 목표로 했다. 하지만 오카리나 연주를 듣고 물질보다 정신적인 충족이 더 행복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머니와 이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감행한 대구행, 혼자 힘으로 해내고 싶은 욕망이 컸다. 그는 오카리나 공연과 강연 등으로 생활비와 학비를 조달하겠다고 했다. 자신의 인생을 주제로 브랜드 공연을 만들겠다는 꿈도 내비쳤다.

“내 이야기를 스토리로 하는 브랜드 공연을 만들고 싶다. 그 브랜드 공연으로 기업체나 학교에서 강연해 볼 생각이다. 서울과 대구를 오가며 버스킹 공연도 계속할 것이다. 어렵지만 하나 하나 극복해 나가겠다.”

- 어떤 연주자가 되고 싶나?

“음악적인 전문성과 감성적인 감수성이 균형을 이루면서도 사람들의 마음속을 파고들어 아픔을 치유해 줄 수 있는 연주자가 되고 싶다. 자유의 땅 대한민국에서 음악으로 남과 북의 마음을 잇는 감성충만한 오카리나 연주자가 되고 싶다.”

                                                                         황인옥기자 hio@idaeg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