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간증

[스크랩] 존 헤론 선교사 John Heron

배남준 2017. 8. 12. 14:43

◈존 헤론 선교사                               여러 자료 편집

       John Heron  1856~1890                       한국 이름은 혜론蕙論


이 분도, 조선 땅에 뿌려진, 하나님이 보내신 ‘한 알의 밀알’이었다.

토마스 선교사가 1866년에 순교,

데이비스 선교사가 1890.04.05.에 부산에서 전염병으로 순교하셨는데,

존 헤론 선교사도 같은 해 1890.07.26.에 한성부(서울)에서 이질로 순교하셨다.

 

 

 

▲주제 요약,

존 헤론 선교사도,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너무나 억울하고 안타까운 죽음이었다.


그는 미국에서 똑똑한 의사였다.

얼마든지 의사로서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29세에, 아무도 관심이 없었던 미지의 나라 조선에,

의료선교사로 자원했다.


그리고 조선 땅에서, 정말 감염의 위험을 무릅쓰고, 열심히 환자들을 돌보았다.

그런다고 돈을 더 버는 것도 아니고, 출세를 더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조선 땅에서 크리스천 의사로 섬기기를 5년, 한참 꽃필 나이 34세에,

그가 하나님께 받은 보상은 ‘순교’였다.


마치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니까,

하나님이 그를 세상에 두지 않으시고, 데려가신 것과 같았다. 창5:24


인간적으로, 상식적으로는.. 주님의 섭리를 쉽게 이해하기 힘들다.

열심히 섬기고 헌신할수록.. 하나님이 장수하게 해서, 더 오래 일하게도 하시고,

열심히 섬기고 헌신할수록.. 반대로 더 일찍 천국으로 데려가시는 분들도 있다.

하나님의 깊은 뜻을 우리는 다 알 수 없다.


다만 우리가 확실히 믿는 것은,

‘한 알의 밀알이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는 주님의 말씀이다. 요12:24


그럼 존 헤론 선교사가, 한 알의 밀알로 조선 땅에 떨어져 죽어서,

맺혀진 열매는 과연 무엇일까?

아래 글은, 그것은 <세브란스 병원과, 한국 근대 의술의 발전>이라고 밝힌다.


그가 헌신적으로 사역했던 <제중원>은,

좋은 병원이긴 하지만, 미치는 범위는 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순교와, 그 열매로 세워진 <세브란스 병원>은

그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 나라와 세계의 많은 환자들에게, 치료와 새 생명을 주는

‘치료자 예수님의 대리자’로서의 역할과 사명을 충실히 감당해 내고 있다.


기독교의 표지는 ‘십자가’이다.

기독교는, 예수 믿어서, 세상에서 출세하고 성공하는 것이.. 그 목표가 아니다.


기독교의 고상하고 숭고한 목표는.. 십자가에서, 예수님처럼, 죽는 것이다.

그러면 그 열매는.. 자기 자신이 얻는 것이 아니라   *자기는 죽고 희생할 뿐이다.

그 열매는.. 고스란히 다른 사람들이 얻는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들은.. 억울할지 모르겠다.

자기가 직접 열매를 얻는 것은 아니니까!

그러나 그에게 주님이 주시는 위로와, 천국의 평강이 넘칠 것이다.


오늘 우리는 지금까지 언급한

토마스, 데이비스, 맥켄지, 존 헤론 선교사의 빚을 지고 있다.

그분들이 십자가를 지셨고, 그 열매를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다.


오늘도, 그 누군가가 십자가를 지지 않는다면,

하나님 나라의 미래는 없다.

씨앗이 뿌려지지 않는데, 씨앗이 죽지(희생하지) 않는데.. 어떻게 열매가 맺히랴?


그래서 복음서는 4분의 1~3분의 1이 ‘십자가를 지고 죽는 이야기’에 할애되어 있다.

우리에게는 어쩌면 지루하기까지 한 그 이야기가,

4복음서에는, 가장 하이라이트로, 동시에 가장 많은 분량으로 자세히 다루고 있다.


바울서신도, 십자가를 포커스로 다루고 있으며,

사도바울 자신이, 누구보다도, 그 길을 모범적으로 걸어가셨다.


십자가 길의 상급과 열매는 ‘이 땅’이 아니라, ‘저 천국’에서 더 크게 주어질 것이다.

하나님은 공평하신 재판장이라서, 결코 그 자녀들을 억울하게 대하지 않으신다.

 

우리는 토마스, 데이비스, 맥켄지, 존 헤론 선교사들이

조선 땅에서 거둔 (그 후대들에게 주어진) 놀라운 열매들을 살펴보았지만,

천국에 가서는, 더 크게 놀라게 될 것이다.


정작 천국에서는, 그들에게 더 큰 상급이 주어지고,

하나님 나라에서 더 큰 열매가 맺어진 것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놀라운 ‘십자가의 길’은, 내가 원한다고 가는 것도 아니요,

내가 원치 않는다고, 뿌리칠 수 있는 길도 아니다.


주님이 강권적으로 나를 인도해 가실 때,

우리 각자는, 그저 믿고, 맡기고, 따라가는 것이다.

‘신적인 이끌림 divine driven’이라고 한다.


▲간략한 그의 생애 

1856년 영국 더비셔 주에서 태어나, 1870년 5월 가족들과 함께

미국 테네시 주의 녹스빌로 이주하였다.

테네시 주의 메리빌 대학 의학과를 졸업하고, 테네시 대학교 의과대학에 진학했다.


1883년 뉴욕 대학교 의과대학에 들어가, 블랙웰 아일랜드 병원에서 실습하면서

정식 의사자격시험에 합격하였다. (27세)


의사 시험 준비를 하던 중에 존은, 어느 부흥회에 참석하여 성령으로 거듭나는 체험을 했다.

그는 기도하는 중에 “이제 준비가 끝났으니 땅끝으로 가라!”는 음성을 들었다.

그는 극동아시아의 한 작은 나라 코리아의 의료선교사가 될 것을 결심했다.


1884.4월 그는 선교사로 자원했고, 미국 장로교 최초 조선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1884년 봄, 그는 해리어트 깁슨과 결혼식을 올리고, 미국에서 한국을 항해 떠났고,

1885년 6월 21일에 조선에 입국하였다.


      언더우드보다 먼저 한국으로 출발했으나, 일본에 오래 지체하는 바람에

      뒤늦게 출발한 언더우드 선교사가 한국에 상륙한 1호 장로교 선교사가 되었다.

      존 헤론은 먼저 일본으로 들어가, 이수정을 만나, 조선말을 배우고 풍속을 익혔다.


1885.06.21. 다른 선교사들과 함께 조선 제물포(지금의 인천)에 도착하였다.

1885.06.21. 한성부(지금의 서울)에 들어갔고,

다음 날인 선임 의사, 호러스 알렌의 집을 방문하였다. 


호러서 알렌은, 고종의 주치의까지 지내며,

광혜원廣惠院의 초대 원장이었다.   


조선 말기인 1885년 4월, 고종이 미국 선교의사인 호러스 알렌의 건의를 받아들여

서울 재동에 설립한 한국 최초의 근대식 병원이다.

광혜원은, 얼마 후에 <제중원 濟衆院>으로 명칭을 변경한다.


1887년 9월 호러스 앨런이, 외교관으로 직업을 바꿔 미국에 들어갔고,

헤론은, 알렌의 후임으로, 2대 <제중원> 원장으로 취임하였다.


▲조선 선교사로 자원한 계기

그가 조선의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1) 이수정의 편지 내용이 실린 한 선교 잡지를 읽으면서,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다.


"미국 사람들이여! 조선에 선교사를 보내주시오!

조선 백성들은 문명을 모르고 어둠 속 깊은 잠에 빠져 있습니다."


이 잡지를 읽고서,

헤론은 병들어 죽어 가는 가난한 나라에 가서, 생명을 살리는 운동을 해야 한다며,

미 북장로교 선교부를 방문해 한국 의료 선교사로 지원했다.


미 북장로교회는 깜짝 놀랐다. 장래가 촉망 받는 유능한 의사가

낙후된 곳에서 선교사로 사역하겠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마침내 1884년 4월, 26세의 나이로 미국에서 한국으로 파송하는

미국장로교 최초 한국 선교사로 정식 임명되었다.


그리고 일본에 도착해서 이수정을 만나 조선말을 배우고 풍속을 익힌 다음

1885년 6월 21일 다른 선교사들과 함께 제물포에 도착하였다.

 

2) 위에서 설명했지만,

의사 시험 준비를 하던 중에 존은, 어느 부흥회에 참석하여 성령으로 거듭나는 체험을 했다.

그는 기도하는 중에 “이제 준비가 끝났으니 땅끝으로 가라!”는 음성을 들었다.

그는 극동아시아의 한 작은 나라 코리아의 의료선교사가 될 것을 결심했다.

 

그래서인지, 그는 배에서 내려, 한국 땅을 밟고는, 한없이 울었다고 한다.

주님의 음성에 순종해서, 드디어 땅끝에 도착해서, 흘리는 감격적인 눈물이었다. 


▲전염병으로 사망하기 까지

광혜원의 제2대 원장이 된 헤론 선교사는

양반층뿐 아니라, 가난한 백성들(평민, 백정)의 질병을 정성으로 돌보아 주었다.


당시 조선의 위생 환경은 매우 불결하였다.

천연두나 장티푸스 같은 전염병이 연례행사처럼 창궐해서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수많은 목숨을 앗아 가기도 했다.


이러한 열악한 환경에 질려, 일부 선교사는 바로 자신의 나라로 되돌아가기도 하였다.

하지만 헤론은 제중원 입원 환자들을 간호사에게 맡기고,

따갑게 내리쬐는 햇볕 아래 진료가방을 챙겨 들고

100리 이상 떨어진 시골 지역을 다니며 전염병을 치료했다.


자신의 몸을 전혀 돌보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많은 환자들을 돌보던 헤론은

결국 자신이 전염병에 걸려 쓰러졌다.


헤론은 1890년 7월 26일 한국에 들어온 지 5년 만에

이질에 걸려, 34세의 젊은 나이로, 주님의 부름을 받았다.


그의 영혼이 천사의 인도를 받으며 세상을 떠나는 날

입원해 있던 한국인 환자도 울고, 동료 선교사들도 울었으며,

그를 알고 있는 정부 고관들도 울고 말았다.


그는 모든 고통을 자신을 구원한 예수님께 맡기고,

조용히 하늘나라를 바라보면서, 천사의 안내로 하늘로 향했다.

그리고 그의 시신은, 선교사로는 최초로 양화진에 묻혔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전, 자기 부인의 손을 잡고,

두 딸과, 제중원의 모든 한국인 환자들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예수님은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주님은 여러분을 위해 그의 생명을 바치셨습니다.

주님을 믿으십시오!"


왜 헤론은 의사로서 보장된 길을 버리고, 선교사의 길을 선택하였는가?

왜 그는 전염병이 창궐하던 가난하고 어두운 조선 땅을 찾아왔는가?

왜 그는 전염병에 걸려 자신이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많은 환자들을 찾아가 돌보다 전염병에 걸려 죽어야만 했는가?


그것은 사랑이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부은 바 된 하나님의 사랑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랑은 말이 아니다. 사랑은 관념이 아니다.

사랑은 철학이 아니다. 사랑은 희생이다. 사랑은 자기 생명을 주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그의 묘비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라고 쓰여 있다.


▲소천 후, 세브란스 병원이 세워지기 까지

헤론 선교사는, 제중원 2대 원장으로 섬기셨다.

(그런데 왜 이분을 우리가 많이 기억 못하고, 언더우드 아펜젤러만 기억하는가?

아마 1호 선교사가 아니기 때문은 아닐까?)


SBS에서 <제중원>이란 드라마도 방영되었다.

거기서 초대 선교사들의 사역이, 드라마로, 소상하게 소개된 바 있다.

드라마에서 존 헤론 선교사님이 순교하는 장면도 나왔다.


당시 전염병에 걸리면, 조선 사람들은 속수무책이었다.

존 헤론은 의사로서, 전염병이 창궐한 마을로 직접 찾아들어가서,

헌신적으로 환자들을 치료해주고, 전염병 예방법을 교육하셨다.


그런데 혼자서 그 수많은 환자들을 하루 종일 진료하시다 보니,

너무너무 과로하신 것이다.


우리 몸은, 과로하면 면역성이 떨어지게 되어 있다.

그래서 전염병 환자를 치료하다가, 오히려 전염병에 감염되어,

1890년 7월 26일 (34세) 순교하신 것이다.


그런데 더 가슴 아픈 것은,

이 분이 돌아가셨을 때, 서울(4대문 안)에 마땅한 묘지가 없었다.


그래서 미국 공사관 뜰에, 임시로 가매장을 했다.(현재 미국 대사관 자리)


그런데 당시 조선 사람들이, 미국 공사관 앞에 몰려가서, 진정appeal을 했다고 한다.

당시 우리나라는 왕의 시신도, 4대문 안에 못 묻는 문화였다.

왕릉도 다 4대문 바깥에 위치했다.

왜냐하면, 무덤에서는 귀신이 나온다고.. 사람들이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귀신도 무서워하는데,

존 헤론 선교사를 묻으면.. 거기서 서양귀신이 나오니까, 얼마나 더 무섭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선교사님들이, 고종 황제를 찾아가서, 묘지를 하사해 줄 것을 요청했는데,

그렇게 해서 하사받은 자리가, 지금의 그 유명한 <양화진>이다.


존 헤론 선교사가 묻히면서부터, <양화진>이 주한 선교사들의 묘지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존 헤론이 떠나고 나서, 언더우드 선교사는 가슴이 아팠다.

아주 가까운 동역자를 잃었기 때문이다.


1893년 언더우드는, 안식년에 미국에 돌아가서, 다른 의사를 초청해서 오게 된다.

그가 바로 토론토 의대출신의 에이비슨 의료선교사이다.

Oliver R. Avison, 한국 이름 어비신, 魚丕信

그가 <제중원> 4대 원장으로 부임하였다.


에이비슨이 <제중원>에 와서 사역해 보니, 일이 너무너무 힘들었다.

병원 관계자들이, 약을 몰래 빼돌리는가 하면, 시설이 너무 낙후되어 있었다.

 

그래서 선교사들이 세운, 현대적 병원이 필요하다고 판단을 내리게 된다.

그는 미국으로 안식년을 조금 일찍 떠난다.


에이비슨은, 뉴욕 카네기 홀에서, 조선의 상황에 대해, 선교보고를 열심히 나누었다.

그 카네기 홀에서, 에이비슨의 선교보고를 듣고서,

당시 미국의 사업가 세브란스는 크게 감명을 받는다.

그가 엄청난 헌금을 드렸다. 지금 시세로 1천억이 넘는 헌금이었다.


이 자금으로, <제중원>이 새롭게 증축된다.

그러면서 병원의 이름도 <세브란스 병원>으로 바뀐다.


지금도 서울역 맞은편 왼쪽에 ‘연세빌딩’이 있는데,

과거 <세브란스 병원>이 있었던 자리이다.

조선인 의사를 길러내기 위해, 세브란스 의대도 세워졌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조선에 최초의 대학 <연희 전문>을 세웠는데,

<희 전문>과 <브란스 의대>가 합쳐진다.

그래서 <연세 대학>이 탄생된 것이다.

 

★<제중원> 4대원장 에이비슨과, 당시 백정의 아들을 의사로 만든 이야기는 여기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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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한 글/ 존 헤론 선교사 양화진에 첫번째로 잠들다           출처


“땅끝으로 가라”는 명령을 순종하기 위해서 한국땅을 밝고 한없이 울던

존 헤론(John W. Heron)은 1856년 6월 15일 영국에서 태어났다.

영국에서 목회를 하던 그의 아버지는 존이 14세때 미국 테네시 주 녹스빌로 이민 와서

정착하고 목회를 했다. 존은 1883년 개교 이래 최우수 성적이라는 영예를 안고

테네시 의과대학을 졸업했다.


테네시 의과대학에서는 존 헤론에게 모교에 남아서

교수가 되어 후배를 양성하는 길을 택하라고 끈질기게 권유해 왔다.

그 길은 장래가 보장되는 안정된 길이기도 했다. 의미 있고 보람된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그것이 자신이 가야 할 길이 아닌 것 같았다.


존은 학교 당국과 스승의 권유를 뿌리치지 않을 수 없었다.

존은 테네시 종합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한 뒤 뉴욕종합대학교 의과대학에서 공부를 계속했다.


의사 시험 준비를 하던 중에 존은 어느 부흥회에 참석하여 성령으로 거듭나는 체험을 했다.

그는 기도하는 중에 “이제 준비가 끝났으니 땅끝으로 가라!”는 음성을 들었다.


그는 극동아시아의 한 작은 나라 코리아의 의료선교사가 될 것을 결심했다.

1884년 봄, 그는 해리어트 깁슨과 결혼식을 올리고,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 선교사로 임명받아 1885년 6월 21일에 코리아에 입국하였다.


▲광혜원에서 선교사 한 사람이 더 늘자 화제는 더 많아지고 활기를 더했다.

조선의 역사, 정세, 풍속부터 상감의 전의(典醫)가 된 알렌의 역할에 이르기까지 이야기꽃을 피웠다.


“왕이나 왕비를 진찰한 일이 있습니까?” “왕비를 진찰한 일이 있습니다.

물론 대면할 수는 없는 일이고 휘장이 무겁게 내려진 이쪽으로 내어민 왕비의 손으로

맥박을 짚어볼 수밖에 없었지요.

기이한 느낌이었지만 긴장할 대로 긴장하고 있어서 느낌이고 무엇이고 문제가 아니었어요.

왕비의 혀를 찰색해야 겠는데 참으로 난감하더군요.

그 구멍으로 왕비가 내민 혀를 볼 수밖에 없었지요.”


헤론은 호기심에 빛나는 눈으로 알렌을 쳐다보고 있었다. 헤론은 알렌의 병원일을 도왔다.

여러 가지 병과 갖가지 사연을 안고 오는 환자들이 병원에서 연출해 내는 일들도

또한 가지가지였다.


여자들이 병원을 찾아오는 경우는 ‘에라! 기왕 죽을 수밖에 없는 병이라면

병원에나 한 번 가보고 죽자’는 심정에서 마지막길로 알고 찾아오는 것이었다.


어느 날 헤론은 눈이 둥그레져서 알렌과 언더우드가 있는 방으로 들어왔다.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오늘만 두 번째 그런 부인 환자들을 보는데

혹시 조선의 부녀자들에게만 있는 무슨 특별한 병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헤론의 심각한 얼굴을 보고 알렌이 물었다.


“혹시 두 분께선 그런 여자 환자를 못 보셨습니까?

여자의 배꼽 밑에 화상(火傷)의 흉터가 있는 것 말입니다.

오늘 온 환자는 배꼽 둘레가 화농이 되어 있었습니다.”

언더우드가 나섰다. “그 원인이 무엇일까요? 그게 무슨 특별한 병은 아닐까요?”


알렌은 그러한 환자를 다룬 일이 없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배꼽병이라... 혹시 피부병의 일종이 아닐까요?”

“조선사람들에게 흔히 있는 피부병과는 달랐습니다. 화상 같기도 한 상처였습니다.”


헤론이 신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언더우드가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여인들의 무슨 풍습과 관련이 있는 것 아닐까요?

이것은 조선 사람들에게 물어봐야 풀릴 수수께끼입니다.”


언더우드의 추측이 들어맞았다. 여인들의 배꼽 화상의 흉터는 아들을 얻겠다는 집념에서

오는 것이었다. 온제종자법(溫劑種字法)이라 하여 뜨겁게 볶은 소금을 배꼽에 얹고

그 위에 쑥찜질을 한다는 것이었다. 이 소금뜸질을 2백 번 내지 3백 번 한 끝에

합방을 하면 아들을 낳는다는 것이었다. 헤론은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다.


▲남한산성에서 1890년 7월의 어느날 아침,

선교사 가족들이 여름 휴가차 남한산성을 향해 떠났다.

스크랜턴 가족, 아펜젤러 가족, 언더우드 가족, 헤론 가족 등등...광나루에서 한강을 건너고,

논밭 사잇길을 지나서 산길은 굽이굽이 구부러진 길이었다. 부녀자들은 가마를 타고 갔다.

산성 가까이에 오르니 한강이 멀리 내다 보였다.


남한산성의 성벽 둘레는 20리가 넘는다.

성 안에는 지휘관이 군대를 지휘하던 수어장대, 백제의 시조 은조왕을 모시는 숭렬전,

남한산성을 지키는 순사들이 무술을 연마하던 연무관 등이 있다.


헤론은 몇 사람 환자와의 약속과 치료중인 환자의 용태를 지켜볼 일이 있다면서

서둘러 하산 준비를 했다.


그의 나이 서른 넷이었다. 그는 병원과 남한산성을 오가는 그는 몹시 지쳐 보였다.

헤론은 닥터 스크랜턴을 따로 은밀하게 만났다.

닥터 스크랜턴은 헤론을 진찰하고 약을 지어주면서 치료를 서둘렀다.

헤론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별로 심하지는 않습니다.

그저 이질 기운이 좀 있으니 조심을 해야겠지요.

더위를 무릅쓰고 오가다 먹은 것이 소화가 잘 안 된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헤론이 앓고 있다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 했다.

휴가를 며칠 앞당겨 끝낸 닥터 스크랜턴은, 헤론을 앞세우고 서울로 돌아갔다.


헤론은 하던 일을 놓고 쓰러졌다. 동료 의사들이 정성을 다하여 돌보았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상태는 심각해졌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 때문에 서울로 돌아왔던 게일 목사는 덜컥 겁이 났다.


“닥터 스크랜턴, 어떻게 좋은 방법이 없을까요?”

“... 남한산성에 있는 부인과 아이들을 데려와야 하겠습니다.”

“오, 닥터! 헤론의 나이 이제 서른 넷입니다.”

“부인을 빨리 모시고 와야 합니다. 시간이 급합니다.”


게일은 눈물을 흘리면서 남한산성으로 헤론의 가족을 데리러 떠났다.

헤론의 병상을 지키고 있던 알렌도 침통해 했다.


게일이 남한산성에 도착한 때는 칠흑같은 한밤중이었다.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억수 같은 빗줄기에 바람까지 몰아쳤다.


게일이 헤론의 부인 해리어트를 데리러 온 것을 보고

아무도 그 길을 만류하지 못 했다.

가마 채비를 하랴, 초롱불을 밝히랴 모두가 허둥댔으나

휘몰아치는 비바람에 초롱불은 풍전등화였다.

횃불은 단 몇 분을 견디지 못하였다.


가마채를 잡은 교구꾼들 앞에 비바람이 무섭게 휘몰아쳤다. 횃불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길은 진흙의 수렁이었다. 후미진 곳이나 계곡에 이르면

교구꾼들은 가슴까지 차는 물살을 헤치며 나아가야만 했다.


불길하고 초조하기 이를 데 없는 밤길이었다.

칠흑 같은 어두움 속에서 내려 때리는 장대비를 밤새 맞으며

눈물의 행군을 감행한 하룻밤이었다.


서울에 이르러 집에 도착한 일행은 폭풍우의 지옥을 벗어난 듯 모두 주저앉고 말았다.

“최선을 다했습니다, 부인.” 닥터 스크랜턴이 해리어트 앞에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의 나이 서른 넷 헤론은 아내와 친구들을 둘러보며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한국과 한국 사람들을 더 뜨겁게 더... 더... 사랑하고 싶소.”

해리어트가 남편의 손을 잡았다. “당신은 하실 수 있어요. 하시게 돼요.”


“병원에서 나하고 일하던 친구들... 나를 아는 한국의 친구들을 다 불러 주시오.”

병원의 조수들, 집인일을 돕던 사람들 모두가 헤론의 침상 가까이 몰려들었다.


헤론은 그들을 따뜻한 눈길로 둘러보았다.

“나를 사랑해 주고 도와 준 친구들 감사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예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그것은 유언이라기보다 설교였다.

생명의 마지막 불꽃을 피워 외치는 복음 전파였다.


그리고 잠자듯이 눈을 감았다. 1890년 7월 26일의 일이었다.

젊은 아내와 두 딸, 그리고 그의 손을 거쳐간 많은 환자들과

지금도 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많은 환자들이 있었다.


▲슬픔과 충격 위에, 묘지가 결정되지 않는 근심이 모든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언더우드와 헤론이 성경 번역과 사전을 편찬하는 일을 하고 있는 집 한 채가 따로 있었다.


선비라고 불리는 조선인 조수들이 합숙을 하면서 일을 돕고 있었다.

언더우드는 그 집 한 쪽에다 무덤을 쓰자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하지요. 지금 사전 작업을 하고 있는 집 뒤뜰에 우선 가매장을 합시다.”

“그렇게 하기로 합시다.” 선교사들이 그렇게 결정을 내렸을 때

그 집을 쓰고 있던 서생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펄쩍 뛰며 달려들었다.


“아니 사람이 살고 있는 집 울타리 안에다 무덤을 쓰겠다구요?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한 사람이 입을 열자 모두가 한결같이 결사적으로 들고 일어났다.


선교사들은 또 숙의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헤론 박사댁 뒤뜰에 무덤을 쓸 수밖에요.”

헤론이 살던 집 뒤뜰을 묘지로 정했다.

그리고 오후 3시를 장례식 시간으로 정했다.


뜨거운 여름날 오후 3시에 장례식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천지가 무너지는 듯한 소리가 마을을 뒤흔들었다.

서생들이 울며 불며 옷을 잡아뜯고 머리를 쥐어뜯으며 몰려온 것이다.

그들은 벌벌 떨며 겁에 질려 있었다.


“아니 선교사 어르신네들, 왜들 이러십니까?

기어코 집안에다 묘지를 쓰실 작정이면 온 장안이 발칵 뒤집힙니다. 아니 됩니다.”


장례식은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남편의 시신을 묻을 땅 한 평 없는 고통으로

헤론의 아내 해리어트는 실신한 듯, 한 구석에 쓰러져 있었다.


▲영혼이 떠난 헤론의 육신은 더위 앞에 무력했다.

7월의 폭염이 사정없이 썩게 하고 냄새나게 했던 것이다.

“... 할 수 없습니다. 매장지가 결정될 때까지 시신을 밀봉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의사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밀봉을 했다.


그리고 조정의 처분을 기다리다가 안 될 눈치면 헤론의 집 뒤뜰에 매장할 각오를 굳히고 있었다.

이 땅에서 사망한 외국인은 제물포 근처 묘지에 매장하는 것이 관례가 되어 있었다.


서울 땅에 송장을 묻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제물포까지는 백여 리 길이었다. 교통수단이라고는 노새와 가마밖에 없는 형편에

시신을 메고 복더위에 백여 리 길을 걸어갈 일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그리하여 선교사들은 미국공사의 양해를 얻어

정동 미국대사관 경내에다 임시 묘자리를 정했다.


그러자 이것 때문에 말썽이 생겼다. 선교사들은 외교 공세를 취하였다.

알렌이 조정과 미국공사관을 수없이 드나들더니 어느날 희색을 띠며 나타났다.

“새로운 자리를 허락받았습니다.


설명을 듣기에 괜찮은 듯한 곳인데 우리 한 번 가보십시다.” 몇 사람이 서둘러 나섰다.

한국 조정에서 허락해 준 장소는 양화진 나룻터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였다.

언덕 밑으로 푸른 한강이 흐르고 강 건너편에는 모래밭이 온통 은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고요하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아아, 코리아- 그리스도의 복음을 안고 와서 젊음과 땀과 눈물을 뿌리고

고귀한 목숨까지 코리아에 묻고 간 의료선교사 헤론...

제물포로도 못 가고, 그가 살던 집 뒤뜰에도 매장을 못 하고

갈팡질팡 눈물을 흘린 결과, 이렇게 주어진 곳,

이것이 양화진 외국인 묘지 역사의 첫 장이다.

코리아를 사랑하던 헤론은 푸른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양화진 언덕에 고이 잠들었다.

출처 : 냉수 한 그릇
글쓴이 : 김지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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