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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다저스 야구팀 최강마무리 켄리 젠슨 - 아버지의 기도

배남준 2017. 7. 18. 18:36





2009년 WBC서때 네델란드 대표팀 포수로 뛰던 모습. 왼쪽은 벤덴헐크다.

기로에 선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2009년 WBC였다. 네델란드 대표팀 주전 포수였던 그가 본선 무대서 ‘앉아쏴’를 선보였다. 윌리 타베라스, 라이언 브론 같은 주자들을 연거푸 2루에서 잡아냈다. 그 장면을 본 다저스 프런트는 그를 설득했다. “투수 한 번 해봐.” 설득은 4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어깨만큼은 자신 있던 그는 싱싱한 공을 뿌려댔다.

이때 생각지 못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 불펜 포수였던 마이크 보젤로였다(현재 시카고 컵스 포수 코치). 그의 공을 받던 보젤로는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 이 공 어디서 배웠니?” “배우기는요. 그냥 던지는 건데요.”

“이거 리베라 공이랑 비슷한데.”

보젤로는 양키스 불펜에서 10년을 일했다. 마리아노 리베라의 전성기 시절 공을 누구보다 많이 받아본 사람이다. 그는 잰슨의 패스트볼이 리베라의 커터와 매우 흡사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더불어 리베라가 어떻게 그 공을 활용하는 지, 어떤 루틴을 거쳐 경기를 준비하는 지 등등을 상세하게 개인 교습해줬다.

그의 등번호가 74번인 이유

퀴라소의 어린 시절은 불우했다. 아버지는 건설 현장의 노동자였다. 성실한 일꾼이었지만, 크게 다치는 바람에 자리에 눕게 됐다. 켄리의 나이 12살 때였다. 3형제를 포함한 5식구의 생계는 어머니의 몫이 됐다. 하지만 여행사 가이드 수입으로는 연명조차 힘들었다.

매일 교회에 가서 울며 기도하는 게 일상이었다. 유일한 희망이 야구 선수가 되려는 막내 아들이었다. 그는 어머니를 꼭 끌어안고 이렇게 약속했다. “엄마, 날 믿어. 우리 가족은 반드시 승리할 거야. 내가 엄마를 호강시켜줄게(you will enjoy our life).”

몇 년 뒤 그는 다저스에 입단했다. 마이너리그의 형편 없는 계약이었지만 월급을 받는 족족 고향으로 보냈다. 메이저리그에 올라가서도 마찬가지였다. 첫 풀타임을 뛰며 41만 6천 달러를 받게 됐다. 메이저리그에서는 최저 연봉이었지만, 그와 가족들에게는 엄청난 액수였다.

어머니가 퀴라소에서 울면서 전화했다. “이제 됐으니, 그 돈은 네가 좋은 차 사고, 멋진 옷을 입는 데도 쓰도록 하렴.” 하지만 셋째 아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페이 체크(급여 수표)는 고스란히 집으로 송금했다. 그 돈으로 퀴라소의 집 값(융자금)은 모두 갚을 수 있었다.

그의 가족들은 이제 시즌 중이면 LA의 넓은 저택에서 지낼 수 있다. 매일 다저 스타디움을 찾아 막내를 응원한다.

하지만 시즌이 끝나면 모두 퀴라소로 돌아간다. 막내가 페이 오프(pay offㆍ완불)해준 그 집을 찾는다. 그곳 주소가 윌렘스타드 카야 코코리시 74번지다. 바로 그가 그 시절을 잊지 않기 위해 등번호로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야구는 구라다]중에서   백종인 / 칼럼니스트 前 일간스포츠 야구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