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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천상병시인과 그의 아내 목순옥 여사.

배남준 2017. 6. 24. 16:24

*천상병시인의 부인 목옥순 여사의 인터뷰. 

 

그리움은 입으로 토해내는 것이다. 아무리 견디려 해도 참을 수 없다. 구토처럼 틀어막은 입을 비집고 나오는 것, 그게 바로 그리움이다. 기자는 어느 시인의 늙은 아내로부터 그 사실을 배웠다.


칠순이 지난 아내는 여전히 남편을 이야기했다. “그 사람은 술을 무척 좋아했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고왔다. 늦은 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성우의 목소리는 사람을 취하게 하는 마력(魔力)이 있다. 나이 든 아내의 목소리가 그랬다.


“어린 아이 같은 그 사람은 누구에게나 큰 소리로 말했죠. ‘난 내 마누라가 좋다!’ 그게 그렇게 듣기 좋았어요.” 아내는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서 작은 카페를 운영한다. 카페엔 남편의 사진과 그가 남긴 글들이 널려 있다. “그 사람의 글이 너무 좋아서….” 아내는 수줍게 남편의 글 솜씨를 자랑했다.


“그 사람을 기억하는 이들이 자주 찾아와요.” 아내는 다시 남편 이야기를 꺼냈다. 그리고 긴 시간 동안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그녀의 남편은 이 세상에 없다. 그는 이미 하늘로 돌아갔다. 이른바 귀천(歸天). 떠난 남편의 이름은 천상병, 남겨진 아내의 이름은 목순옥이다. 그녀의 나이는 72세다.

▲ 귀천의 작가, 천상병과 그의 아내, 목순옥. 젊은 시절 단란한 한 순간을 카메라에 담았다. 사진=김영관, 영상=한용호.

◆ 남편 천상병, 아내 목순옥


천상병은 소풍을 마치고 하늘로 돌아간 시인으로 기억된다. 병과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해맑은 동심과 웃음을 잃지 않은 사람. 그의 대표작, 귀천은 그런 천상병을 잘 설명하고 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 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 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천상병은 1930년 일본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소년은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자랐다. 아버지의 잦은 사업실패 덕분이다. 소년은 몸이 약한 대신 감수성이 예민했다. 마산중학교 재학 시절, 국어교사는 시인 김춘수였다. 스승은 소년의 재능을 눈여겨봤다. 1년간 혹독한 습작의 시간을 보냈다. 1950년, 소년은 스승과 유치환 시인의 추천으로 등단했다. 문학잡지가 청소년의 마음을 사로잡던 시절. 중학생이던 소년은 전국구 스타가 됐다. 그리고 전쟁이 터졌다.

▲ 목순옥(72) 여사는 남편 천상병에게 15년째 편지를 보내고 있다. 그동안 쓴 편지는 50여통. 그녀는 편지를 모아 연말쯤 '하늘에 띄우는 편지'라는 제목의 책을 발간할 계획이다. 사진=김영관, 영상=한용호.

1951년, 부산으로 옮겨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에 입학했다. 전쟁은 감수성 여린 소년에게 현실을 바라보는 눈을 선물했다. 대학에서는 평론가로 유명했다. ‘나는 거부하고 저항할 것이다’라는 다소 과격한 제목의 평론은 지금도 회자(膾炙)되는 유명한 글이다. 아내는 기억한다. “시 쓸 때와 평론할 때, 남편은 전혀 다른 사람이었어요. 아주 독하게 평론을 했답니다. 그의 매를 맞지 않으면 유명한 문인이 아니란 말이 나돌았어요. 때문에 은근히 남편의 평론에 오르내리길 바라는 분들이 많았죠.”


대학을 졸업하면서 한국은행에 입사할 기회가 주어졌다. 하지만 그는 거부했다. “시인은 배가 고파야지.” 그는 홀연히 대학을 떠났다. 그 시절, 아내는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이었다. 아내의 오빠가 시인의 친구다. 가끔 커피숍에서 만나는 시인은 그녀의 우상이었다. “그 시절엔 문인들이 함께 어울렸어요. 오빠 덕분에 시인을 만났어요. 당시엔 큰 소리로 잘 떠드는 분이셨죠. 가끔 술집에도 따라갔는데 시인은 제 자리에 술잔이라도 올려지면 당장 치웠답니다. ‘미스(Miss) 목은 술 마시면 안돼.’ 이러면서 말이죠.”


1967년, 시인에게 큰 시련이 닥쳤다. 동베를린간첩단 사건에 연루된 것. 대학동기에게 술값을 빌린 게 간첩으로 몰린 이유였다. 중앙정보부에서 전기고문을 세 번 받은 뒤 풀려났다. 시인은 몸이 극도로 쇠약해졌다. 잦은 폭음도 그의 건강을 해쳤다. 부산 형님 댁에 내려갔다 1년 만에 돌아왔다. 서울에 도착한 천상병은 그 길로 친구의 동생을 찾아갔다. “얼굴이 까맣게 변했더라구요. 커피숍에서 문학 이야길 하다 내일 보자며 헤어졌어요. 그런데 사라지신 거예요.”


그날 시인은 길에 쓰러졌다. 술에 취해서였다. 서울시립정신병원에 실려갔다. 천재 시인이 행려병자로 바뀐 것이다. 목순옥을 비롯해 시인의 친구들이 그를 찾았다. 허사였다. 그들은 울면서 친구의 유고 시집 ‘새’를 발간했다. 그의 죽음은 신문에도 실렸다. 병원장이 놀라서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천상병은 살아있습니다.”


목순옥은 매일 병문안을 갔다. 그녀의 뒷바라지 덕분에 시인의 몸무게는 40㎏에서 60㎏으로 불었다. 병원장이 말했다. “저 사람이 글을 쓰고 못쓰고는 당신에게 달렸습니다. 두 분이 결혼하면 어떨까요?”


 

◆ 남편의 재능을 사랑한 아내


둘은 부부가 됐다. “그냥 돌봐드려야겠다는 마음이 들더라구요. 깊이 들어가면 그게 사랑이겠죠?” 가진 것은 병과 가난 뿐인 남자. 그런 이를 사랑한 아내는 말했다. “나이가 드니까 잔소리가 늘었답니다. 지하철을 타고 가다 꼭 껴안은 젊은 남녀를 보면 잔소리를 합니다. ‘너무 붙어있지 마라. 빨리 뜨거워지면 금새 식는다.’ 서로 툭툭 치는 젊은 남녀를 봐도 지나치질 못해요. ‘서로 배려해야지. 함부로 대하면 안된다.’ 나이가 드니까 그런 것이겠죠?”


시인과의 결혼 생활은 힘들었다. 그래도 아내는 좋았다. 특히 시인의 아내만 즐길 수 있는 특권에 마냥 기꺼워했다. “시인이 정말 아이 같았어요. 가끔 집에 들어오면 다 써놓은 시를 베게 옆에 가지런히 놓고 잠든 척 했답니다. 저는 가장 먼저 시인의 글을 읽는 사람이 된 것이죠. 좋았냐구요? 그야 물론 너무 좋았죠.”


그녀의 남편 자랑은 이어졌다. “시인은 가만히 앉아 있다 제목을 정하면 한달음에 시를 썼어요. 단 한번도 다시 고치는 걸 보지 못했어요. 정제된 단어가 속에서 쏟아져 나오는 거죠. 그럼 시를 툭 보이면서 자랑했답니다. ‘이것 봐라, 아내야.’ 천재였던 거죠.”


그럼, 남자 천상병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천재 천상병을 사랑한 것 아닌가. “그랬을 지도 모르죠. 하지만 모든 걸 제게 의지하는 시인이 계셔서 행복했습니다. 사랑이란 가슴에 담아두기도 하고, 상대방을 이해하기도 하고, 내가 줌으로써 기뻐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 그녀는 시인에게 동생이고, 친구이고, 애인이고, 아내이고 동시에 스승이며 어머니였다. 하긴 그것이 사랑이다.

▲ 천상병의 아내, 목순옥(72) 여사는 아직도 남편을 그리워한다. 서울 인사동의 작은 카페 귀천에서 아내는 남편의 호흡을 맡고 있다. 사진=김영관, 영상=한용호.

◆ 남편의 유산(遺産)


천상병은 1988년부터 만성간경화증으로 고생했다. 친구가 의사로 재직하던 춘천의료원에 입원했다. 그래도 시인은 여전히 유쾌했다. “배가 산처럼 불러서 병원에 갔어요. 복수(服水)가 찬 것이죠. 일반인이라면 죽음을 앞두고 많이 두려웠을 거예요. 병원에 도착하니 친구인 정원석 선생님이 야단을 치시더군요. ‘야, 이 놈아. 배가 왜 이리 불렀냐?’ 시인이 대뜸 받아쳤어요. ‘내가 말이다. 임신을 했다, 임신을 했어.’ 그만큼 낙천적이었어요. 덕분에 많이 웃었죠.”


병원에서 아침을 먹이고 서울로 돌아와 카페 문을 열었다. 일이 마치면 다시 춘천으로 향했다. “춘천으로 가는 길이 참 예뻤답니다. 차 안에서 매일 기도했어요. 5년만 더 살게 해주세요. 딱 5년만.”


시인은 거짓말처럼 병을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5년 뒤. 다시 거짓말처럼 세상을 떠났다. “이른 봄이었어요. 방금 헤어져서 카페 문을 열고 물을 끓이고 있는데. 병원에 실려갔다는 전화를 받았죠. 마음이 덜컥 하더군요. 매일 춘천으로 갈 때, 5년이 아니라 10년을 살게 해달라고 빌 것을….” 시인의 나이 63세였다.


남편이 떠난 지 15년. 아내는 추억을 먹고 산다. 매년 의정부, 산청 등지에선 천상병을 기리는 문학제가 열린다. 시비(詩碑)도 세워졌다. 작은 카페엔 여전히 남편의 친구와 팬들이 찾아온다. 아내는 남편의 기념관을 세우고 억울하게 고문을 받은 간첩사건의 진실을 찾는데 여생을 보낼 예정이다. 그녀에게 의지했던 남편은 세상을 등지고도 아내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양이다.


“제게 남겨진 일, 모두 마무리하고 저도 떠나야죠. 하늘에서 다시 만나면 큰 소리를 칠 거예요. 제가 다 처리하고 왔다고 말이죠.”


 

남편의 그리움은 시가 됐다. 아내의 그리움은 이제 별이 되려 한다. 그들 부부가 서로를 그리워함은 여느 청춘의 사랑에 못지 않다. 문득 남편의 은사인 김춘수의 ‘구름과 장미’가 떠올랐다. 그의 시를 마지막으로 소개하는 것은 그런 까닭이다.


저마다 사람은 임을 가졌으나

임은 구름과 장미되어 오는 것

눈 뜨면

물 위에 구름을 담아 보곤

밤엔 뜰 장미와

마주앉아 울었노니

참으로 뉘가 보았으랴?

하염없는 날일수록

하늘만 하였지만

임은

구름과 장미되어 오는 것


*천상병시인과 목옥순 여사의 이야기.

 

 

한 평생 변함이 없는 사랑 ―시인 천상병과 아내 목순옥

천상병(千祥柄, 1930~1993) 천상병은

흔히 기인으로 불리었다. 1952년 『문예』에 시 추천이 완료된 후 “시인이면 그만이지 학력이 무슨 소용이냐”며 서울대 상대 4학년 2학기 등록을 하지 않고 그만둔 것부터가 기이한 행동이었다. 천상의 기쁨과 지상의 아픔을 노래한 시인 천상병이 술독에 빠진 것은 50년대 초반이다. 문인들과 어울려 늘 술에 취해 살았지만, 1967년 동백림사건으로 체포되어 고문당하기 이전까지그는 평필(評筆)을 휘두른 문학평론가이기도 했다. 술로 인한 웃지 못할 일화 중의 하나. 소설가 모씨의 안방에 있던 향수병을 양주병으로 알고 마셔 한동안 입에서 향수 냄새를 풍기며 다닌 것도 유명하지만 박재삼 시인이 살던 단칸방에서의 방뇨사건이 압권이다. 어느 날 대취한 박재삼과 천상병 두 시인은 어깨동무를 하고 박재삼의 집으로 간다. 재삼은 부인과 아이들을 한쪽 벽으로 밀치고 잠이 들었다. 부부가 소나기 오는 소리에 잠을 깨보니 천상병이 방에다 엄청난 양의 소변을 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고선 다시 드러누워 태평스럽게 잠을 자는 것이 아닌가. 박재삼은 그 사건 후 몇 차례 이사를 했지만 부인과의 약속 때문에 천상병에게는 집을 가르쳐주지 않았다고 한다. 천상병 시인과 목순옥 여사 천상병. 그는 수많은 일화를 남긴 기인이었고 뛰어난 시인이었다. 시를 즐겨 읽지 않는 사람일지라도 시인 천상병의 이름은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또한 인사동에 가본 사람이라면 ‘귀천’이라는 이름의 찻집을 보았을 것이다. 천상병 시인의 시 제목을 딴 찻집에는 시인이 살아 있을 때나 작고한 지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이나 시인의 아내 목순옥 여사가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서울에서 매일 수십 쌍이 결혼식을 올리지만 그날의 결혼식만큼 큰 박수가 울려퍼진 적이 없었다고 한다. 두 사람이 결혼을 한 것은 1972년 5월 14일이었다. 마흔세 살 노총각과 서른여섯 살 노처녀가 결혼했으니 그 당시로서는 드문 일임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장안의 화제가 되었던 이유는 그 결혼이 너무나 값진 사랑의 승리였기 때문이다. 시인은 1967년 6월 25일, 동백림사건에 연루되어 중앙정보부 안가에 끌려가 6개월 동안 세 차례의 전기고문 등 숱한 고문을 받고 폐인이 되다시피 한다. 동백림사건이란 독일 유학생 몇 사람이 베를린에 사는 동포의 주선으로 동베를린에 구경 간 것이 빌미가 되어 엄청난 간첩단 사건으로 비화한 사건이다. 작곡가 윤이상과 화가 이응로 등 유럽 거주 예술가들을 포함하여 수많은 사람이 체포되어 고문을 당했고, 유기형에 처해졌다. 천상병 시인의 혐의는 동백림사건의 핵심 인물이자 서울대 상대의 동기동창인 강빈구가 간첩인 것을 알고서도 신고하지 않고 그를 협박하여 돈을 뜯어냈다는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6개월 동안 갇혀 있으면서 전기고문 등 온갖 고문을 다 당한 끝에 집행유예를 받고 풀려난 천상병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1971년이었다. 고문의 후유증과 음주생활에서 오는 영양실조로 거리에서 쓰러진 그를 발견한 사람은 경찰이었다. 자신을 시인 천상병이라 말하면서도 시를 한 줄도 못 외는 것이 경찰로서는 너무 이상했다. 대소변조차 가리지 못하는 그를 경찰은 행려병자로 간주하여 서울시립정신병원에 입원시켰다. 천상병은 넋이 반쯤 나간 상태로 병원에서 몇 달 동안 있게 된다. 민영, 성춘복, 송영택 등의 친구가 행방불명된 시인을 찾다가 포기하고 돈을 모아 유고시집을 내준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다행히도 그 병원의 김종해 박사가 유고시집이 나왔다는 신문기사를 보고 그 천상병이 자신이 돌보는 환자임을 알고는 친구들에게 연락해주어 병실 문을 나설 수 있었다. 목순옥의 오빠 목순복은 천상병의 친구였다. 목순옥이 여고 2학년 때, 오빠의 소개로 명동의 갈채다방에서 천상병을 처음 만나게 된다. 천상병은 그때도 좀 이상한 사람이었다. 경북 상주에서 올라온 친구의 동생 앞에서 천상병은 콧구멍을 후비며 앉아 있다가 우스운 이야기가 나오면 다방이 떠나갈 듯이 웃곤 했다. 두 사람은 곧 오빠와 동생 사이가 되어 스스럼없이 지내게 된다. 그 무렵 천상병은 시인에게 대학 졸업장이 무슨 필요가 있냐며 서울대 상대를 중퇴하고 이 집 저 집을 떠돌아다니며 얻어먹고 지내고 있었다. 목순복은 친구의 재주를 아껴 시인의 술값을 수시로 갚아주곤 했다. 세월은 흘러 시인은 고문의 후유증을 술과 담배로 달래며 살아간다. 직업이 없었으므로 술값, 담뱃값 등을 주변 사람들이 대주고 있었다. 그러니 몸과 마음이 모두 황폐해져 서울시립정신병원에 1년여 동안 입원까지 하게 되었던 것이다. 목순옥은 병원에 있는 천상병을 헌신적으로 돌봐주며 병이 깊은 시인을 위해 남은 생을 바치기로 결심한다. ‘천 선생님은 내가 아니면 안 된다. 천 선생님이 편안한 마음으로 살아가시려면 내가 저분 곁에 있어야만 한다. 내가 곁에 없으면 천 선생님도 안정을 잃지만 나 역시도 저분을 등지고서 마음 편하게 살아갈 수는 없을 것 같다.’ 1972년 말에 시인은 퇴원을 했고 녹음이 푸르른 5월 14일, 김동리 선생의 주례로 천상병은 목순옥을 평생의 반려자로 맞이한다. 아니, 목순옥이 천상병을 위해 평생 간호사 역할을 하리라고 결심한다. 그때부터 목순옥 여사는 어린아이의 정신연령을 갖고 사는 남편을 위해 팔과 다리의 역할을 한다. 시인이 급성 간경화증으로 춘천의료원에 입원했을 때는 5개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춘천과 서울을 오르내리며 간병을 했다. 그때뿐만이 아니라 1999년 4월 28일에 남편과 사별할 때까지 목순옥 여사는 시 쓰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남편을 정성을 다하여 섬긴다. 매일 아침 세수는 물론이거니와 손발톱도 깎아주고 목욕도 시키는 등 목순옥은 아내이자 어머니의 역할까지 하며 헌신적으로 천상병을 도왔다. 또한 찻집 ‘귀천’을 운영하며 가계까지 책임져야만 했다. 이처럼 목순옥은 27년 동안 한결같이 오직 한 사람을 위해 사랑을 쏟아부었다. 천상병 시인의 중기와 후기의 시는, 자신을 지극 정성으로 돌봐준 아내가 없었더라면 결코 쓰지 못했을 것이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 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 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귀천> 전문 삶의 소풍을 끝내고 하늘로 올라가 삶이 아름다웠다고 말하는, 심금을 울리는 천상병의 시는 목순옥의 이타적인 사랑에 대한 아름다운 화답가(和答歌)이다.

 

 

출처 : 서울예대 극작과 예감 4조
글쓴이 : 안태경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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