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중반 내 직업은 야식배달부였다. 한 밤에 오토바이를 타고 출근해 밤새도록 근무하고 아침 늦게 퇴근하곤 했다. 허름한 옷에 배달통을 든, 흔히 거리에서 쉽게 마주 칠 수 있는 그렇고 그런 동네 청년이었다.
노래를 좋아했다. 거리에서 들려오는 노래를 따라 부르곤 했다. 오토바이를 타고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 헬멧을 쓰고 있으니, 크게 노랠 불러도 주위엔 잘 들리지 않았다.
‘네순 도르마’(공주는 잠 못 이루고) ‘오 솔레미오’(나의 태양) ‘물망초’ 등이 애창곡이었다. 고달픈 삶의 연속이었지만 노래 솜씨를 녹슬지 않게 하려는 생각이었다.
유명한 성악가 파바로티의 곡들을 오토바이를 타고 부를 때면 하늘을 날아갈 듯 기분이 좋았다. 한번은 오토바이를 타고 신호를 대기하고 있었다. 이날도 ‘오 솔레미오’를 불렀다. 그런데 아뿔사 이날따라 헬멧을 쓰는 것을 잊어버렸다. 오토바이가 한 대가 멈춰 섰다. 옆을 보니 인근 중국집 배달원이었다. 그는 나를 위아래로 한번 훑어 봤다.
“당신이 부르는 소리 맞아? 노래 꽤 잘 부르는데….”
그때 중국집 배달원의 놀란 눈동자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 순간 무안했다. 무슨 잘못한 일도 없는데 말이다. 그래서 신호도 무시한 채 오토바이 엑셀을 당기고 그곳을 재빨리 벗어났다.
며칠 뒤 저녁 높은 빌딩으로 음식배달을 갔다. ‘25층이니까 노래 1절 부르는 것은 문제 없겠군’ 생각하고 엘리베이터 안에서 성악곡을 불렀다. 배달을 마치고 1층까지 내려올 때도 노래를 불렀다. 하지만 울림이 컸나 보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니 사람들이 웅성웅성 대며 몰려 있었다. 그리고 엘리베이터 안을 들여다보더니 ‘누가 우리 건물 엘리베이터에 오디오를 설치했나’며 수근댔다. 부끄러웠다. 이날도 잽싸게 오토바이를 타고 도망치듯 빠져 나왔다.
사실 나는 성악을 전공하던 학생이었다. 1996년 한양대 음대 성악과에 입학했다. 단지 3개월간 레슨을 받은 것뿐인데, 하늘이 대학합격을 도왔다고 생각한다. 열심히 공부해 장학금도 받았다.
하지만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던가. 갑자기 집안 살림이 기울었다. 직장생활을 하며 집안 생계를 잇던 어머니가 뇌출혈로 쓰러지신 것이다. 충격이었다. 잦은 병원비와 생활비 등 돈이 많이 필요했다. 나는 졸지에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만 했다.
택배기사, 노점상, 대리운전, 휴대폰판매원, 어부생활 등 안 해본 아르바이트가 없을 정도였다. 외롭고 고달픈 시절이었다. 아무 것도 모르고 그저 학교와 집만 오가던, 세계적인 성악가를 꿈꾸던 성악과 학생의 신분에서 180도 뒤바뀐 현실은 정말 힘들었다. 하는 수 없이 다니던 대학을 자퇴했다. 그리고 사회에 첫 발을 내디뎠다. 하지만 무엇부터 어떤 일을 해야 할까 막막할 뿐이었다.
정리=유영대 기자 ydyoo@kmib.co.kr
약력=△1977년 경기도 수원 출생 △수원 삼일상업고 졸업. 1996년 한양대 성악과 입학 후 20년 만인 2016년 졸업 △SBS ‘놀라운 대회 스타킹’ 출연, 성악가 데뷔(2010) △앨범 ‘마이 스토리(My Story)’ ‘하나님의 은혜 Hymn’ 등 출시 △KBS 신년음악회, 폴포츠 내한공연 등 활발한 연주 활동 △경기도 평택 합정감리교회 집사
SBS 프로그램 ‘놀라운 대회 스타킹’에 출연해 ‘한국의 폴포츠’로 이름을 알린 성악가 김승일씨가 16일 자신의 삶을 간증하면서 환히 웃고 있다.
- 외로움 찬송가 부르며 달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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