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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계몽 운동가 최용신 (상록수 주인공)과 샘골교회

배남준 2017. 4. 8. 15:03

[한국기독역사여행] 하나님 영광 위해 빈들에서 땅을 일구다 기사의 사진

안산 상록수공원 내에 최용신 관련 심훈문학기념비, 기념관, 샘골교회 모습(왼쪽부터). 기념관은 최용신이 건립했던 샘골강습소 자리에 세워졌다. 지금은 박물관과 교육관으로 쓰인다. 강습소 종탑도 복원됐다.




세월호 참사 비극의 도시 경기도 안산은 예상 밖으로 조용했다. 2년 전 이곳에 들렀을 때 거리 가로등마다 추도 현수막이 걸려 있던 것과 사뭇 달랐다. 지금 목포에선 인양된 세월호 선체 조사가 한창이다. 서울에서 지하철 4호선을 타고 안산 상록수역에 내렸다. 1980년대 전후 이 일대는 소위 반월공단으로 불리며 산업화와 발전의 표상이었다. 반면 공해가 극심했고, 공장 노동자의 인권이 보장되지 않았다. 서울의 대학생들이 위장취업을 통해 노동자들의 인권과 근로기준법 준수를 위해 대신 싸우던 시절이었다. 그 현대사의 질곡 속에서도 시민은 일상을 살아냈다. 시장에서 콩나물을 샀고, 자전거를 타고 출근했고, 아이들을 가르쳤다. 또 주일이면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교회로 향했다. 공단 노동자들은 자신의 삶이 고단했기에 자식에 대한 교육열이 남달랐다. 안산의 정체성을 한 단어로 규정짓자면 '상록수(常綠樹)'다.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심훈(1901∼36)의 소설 '상록수'의 주인공 채영신의 실제 모델 최용신(1909∼1935)이 바로 이 상록수역 일대에서 농촌계몽운동을 벌였기 때문이다.

함경도 원산 루씨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협성여자신학교(감신대 전신) 재학 중 YWCA 농촌사업부 파견으로 경기도 수원군 반월면 샘골(현 안산시 상록구 본오동)에서 헌신했던 크리스천 여성 최용신. 견고한 가부장제 틀 속에서 홀로 부임한 20대 기독활동가의 고단함이 어떠했으리라는 건 충분히 짐작이 간다. 더구나 조상 제사도 안 지내는 ‘야소교인’이라니. 

상록수 반월공단 시화호 세월호 

최용신이 1931년 샘골강습소를 세워 가난을 물리치려 했던 안산은 이제 공업도시에서 교육도시로 탈바꿈했다. 세월호 참사를 당했던 단원고 등 20여개 고교, 한양대 에리카캠퍼스 등 6개 대학이 있다. 공해로 죽은 호수였던 안산 시화호는 청정한 시민쉼터가 됐다. 교육도시의 영광은 최용신과 같은 선구자들이 실핏줄이 돼 한촌(閑村)에까지 예수의 이웃사랑을 펼친 결과이기도 하다. 그들은 야학당을 다니며 성경을 읽게 됐고, 어떻게 살아야 하고 왜 구원받는지를 알게 됐던 것이다.  


상록수역을 내리자 색소폰과 트럼펫 합주 ‘나를 사랑하신 주님’ 등의 찬송이 역사를 감돌았다. 베드로선교회(대표 김철수 장로·안양감리교회)가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안산 주요 지점에서 펼치는 거리전도를 겸한 공연이다. 구부정한 노숙인과 건들대는 고등학생 등이 건성으로 들었으나 전도자들은 성심으로 그들을 대했다. “예수 믿으세요.” 최용신도 그랬다.  

상록수역에서 남쪽으로 500m 지점에 상록수공원이 야트막한 동산에 자리한다. 1만2000㎡ 면적의 동산 안에는 샘골교회, 최용신기념관, 최용신 묘지 등이 들어서 있다. 2007년 안산시 주도로 조성됐다. 공원은 고층아파트가 둘러쌌다. 아파트공화국의 오아시스 같다. 

샘골교회와 최용신기념관(옛 샘골강습소 자리)은 최용신이 농촌계몽의 뜻을 품고 경성에서 내려온 1931년 무렵 위치다. 농촌 복음화를 위해 파견된 선교사가 그녀였다. 

최용신의 열정은 미션스쿨 루씨여고보를 졸업하던 무렵 굳건해진다. 신앙 안에서 중등교육을 받은 신여성. 그에겐 문맹 퇴치를 통한 농촌계몽이 이웃사랑의 실천이라는 확고한 신념이 있었다.

1928년 4월 1일자 조선일보 ‘새봄 맞아 교문 나서는 재원들-원산 루씨학교의 특출한 네 규수’ 기사가 실렸는데 이때 최용신이 이렇게 말했다. 

‘이제 우리는 교문을 떠나 사회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우리의 전도는 평탄하다고 할 수 없다. …조선 여성이 반만년 동안 암흑 중에 묻혀…중등교육을 받은 우리가 안락한 도시 생활만 동경하고 꿈꾸겠는가. 아니면 농촌으로 돌아가 문맹 퇴치에 노력하려는가.’ 

이 당찬 소녀는 신학교에 들어와서도 기독활동가로서 목표를 가지고 최선을 다한다. 1929년 3월 23∼25일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민영찬 별장에서 열린 ‘조선남녀학생기독교청년회 하령회’에 협성여자신학교 대표로 참석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이때 주요 참석자가 윤치호 신흥우 김활란 최현배 조만식 등 총 39명이었다. 이들의 주요 의제는 ‘조선 기독교의 진로’ ‘기독교와 농민’ ‘조선 기독학생운동’ 그리고 ‘신앙과 사업’ 등이었다. 기독여성 지도자로서 최용신의 위상을 부분적으로나마 보여준다. 

1931년 10월 10일 오직 기도와 사명으로 무장된 최용신은 비산비야의 가난한 농촌 샘골에 도착했다. 샘골교회(1907년 설립)가 유일한 위로였다.  

그러나 최용신은 2년9개월을 샘골에서 헌신하다 26세 젊은 나이에 천국으로 향한다. 훗날 심훈의 소설 ‘상록수’(1935), 영화 ‘상록수’(1961년, 1978년 두 차례)에서 스토리텔링되었듯 사랑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다 과로로 인한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 것이다.  

그 기간 공부와 신병 치료를 겸해 일본 고베신학교로 유학하며 학내 잡지 ‘푸른 하늘’에 기고한 최용신의 ‘나의 소감문’은 기독교적 가치 실현에 철저했던 그녀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이 세상 어디를 가 보아도 계급 차별이나 민족 차별, 빈부 차별로 인해 비극이 발생하고 있다. 그러나 학교 안에는 이러한 모습의 계급, 민족, 부귀, 귀천의 사상을 초월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이 발휘되고 있는 것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랑 없는 가정은 불행을 초래하고, 사랑 없는 민족은 멸망하게 되고, 사랑 없는 사회는 부패하며, 사랑 없는 국제 평화는 성립되지 않는다.’ 

하지만 최용신은 고베신학교에서 6개월여밖에 머물지 못했다. 병세가 위중해졌기 때문이다. 그는 고향 원산으로 돌아가지 않고 샘골강습소 아이들과 그곳 농민들 품에 안겼다. “내가 죽으면 샘골에 묻어주오.”

“예수사랑 없는 가정 사회 민족은 멸망” 

그의 희생과 헌신이 알려진 것은 1935년 1월 27일 독립운동가 여운형이 운영하던 조선중앙일보를 통해서다. ‘천곡(샘골의 일본식 이름)학술강습소를 설립하고 농촌 부녀들의 문맹 퇴치와 무산아동 교육에 많은 파란을 겪으며 노력 중이던 바 불행하게도 장중첩증에 걸리어 신음하다가…영원한 세상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뒤이어 5월 잡지 ‘신가정’이 8쪽 르포 기사로 그녀의 삶을 전하는데 그 기사 작성자가 심훈으로 파악된다. 기독교인 심훈은 더 나아가 이해 5∼6월 고향 충남 당진 집에서 최용신을 모델로 한 소설 ‘상록수’를 탈고한다. 심훈의 장질 심재영이 당진에서 농촌계몽활동을 했던 터라 소설의 주인공 채영신이 사랑한 인물로 끌어냈다.

이후 최용신의 스승 김교신(1901∼1945·기독교사상가)이 제자 유달영(1911∼2004·기독농촌운동가)으로 하여금 평전 ‘최용신 소전’(1939)을 출판케 함으로써 비로소 역사화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최용신은 1995년 8월 15일 국가독립유공자로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됐다. 

최용신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빈들에서 땅을 일궜다. 부유한 집안의 인텔리 여성이 출세하고자 했으면 결코 샘골 같은 곳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고자 하지 않았다. 다만 하나님의 일꾼들을 통해 상징적으로 드러났을 뿐이다.  

그녀를 도왔던 협성여자신학교 동창 김노득(1903∼1968), 지역 유지로 샘골강습소 부지를 선뜻 내주었던 박용덕은 수많은 믿음의 형제를 둔 천사들이었다. 2004년에는 최용신의 제자였던 고 홍석필옹이 강습소를 다시 만들어 달라며 1억5000만원을 안산시에 전달, 최용신기념관 설립 기금이 됐다.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딛 3:9)는 다툼을 낳는다. 요즘 한국교회는 자신들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선대의 변론과 족보 만들기에 과도한 힘을 쏟는다. 따라서 없는 사실을 변론하려니 신화가 되고 만다. 신앙인의 족보는 피가 아니다. 최용신은 후대가 없다. 다만 뒤따르고 싶은 발자취가 있다. 새벽기도를 하던 샘골교회, 학생 모집을 위해 다녔던 군포 둔대케노시스교회 그리고 당진 심훈의 필경사와 상록수교회를 돌아보며 ‘말씀’이 흐르는 곳이 족보임을 새삼 느끼게 된다. 


■최용신기념관 문화관광해설사 손경숙 "기독교에 대한 이해 없이 최용신 알 수 없어요"

"사랑이었어요. 사랑. 그리고 기도였어요." 

최용신기념관 문화관광해설사 손경숙(52·화성 진토리교회·사진)씨는 일반 관광객들에겐 선뜻 전하지 못한다며 이같이 말했다. 최용신의 삶에 관한 자료와 저술, 후대의 구술 등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것이 이웃을 향한 어머니와 같은 배려, 헌신이더라는 것이다. 특히 제자들에게 쏟았던 정성은 늘 자기 몸을 돌보지 않는 희생이 앞서 있었다고 했다.  

"크리스천들이 오시면 사랑과 기도를 금방 이해하시더라고요. 최용신 선생님이 여기 올 때 20대 여성이었잖아요. 순사들에게 받았을 조롱과 남성 중심 사회의 틀과 싸우느라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그는 늘 새벽기도로 이겨냈어요. 기독교에 대한 이해 없이 최용신을 알 수 없어요." 

손씨는 대학에서 관광학을 전공했다. 그는 기념관 내 전시된 당시 샘골교회와 샘골강습소 디오라마를 가리키며 "한국교회가 '믿음의 선대' 역사 현장을 복원하는데 힘썼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안산=글·사진 전정희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jhj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