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잘못을 기억하지 말으소서/너무 아픈 채찍을 거둬 주소서/이대로는 한걸음도 더 나갈 수 없는/너무 많은 죄의 덫을 두들겨 부숴 주소서/저어도 아득하게 손닿지 않고/소리쳐도 너무 멀어 미치지 않고/몸을 던져 솟구쳐 봐도 너무 거센 풍랑/우리들의 이 시대/우리들의 오늘을 굽어 살피소서…우리들의 잘못을 기억하지 말으소서/우리들의 간구를 물리치지 말으소서.”(‘폭양에 무릎을 꿇고’ 중에서)
폭염주의보가 내려진 지난 8일, 경기도 안성시 보개면 동신리 사갑들판의 태양은 성난 황소처럼 이글거렸다. 그곳은 마치 저항할 수 없는 뜨거운 햇볕 아래 인간의 죄를 낱낱이 아뢰며 죄의 덫을 두들겨 부숴 달라고 기도하던 혜산(兮山) 박두진(1916∼1998)의 시작(詩作) 공간이었다. 차령산맥 줄기가 뻗어 내려오다 멈춰버린 벌판 마을. 지평선 끝자락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은 논밭 뒤로 청룡산이 서 있다.
소년과 해 그리고 사갑들판
박두진 시인이 태어난 곳은 지금의 안성시 봉남동 안성여자중학교 자리이지만 8세부터 18세까지 사갑들판 마을에서 자랐다. 그는 어린 시절 들판에 서서 막힘없이 불어오는 바람, 솟아오르는 해, 밤하늘의 별들을 지켜봤다. 어느 날은 청룡산에 올라가 해가 떠오르는 것부터 지는 모습까지 지켜봤다. 해는 언제나 맑았고, 살아서 윙윙대는 듯했다. 빙글빙글 웃어주는 듯했다. 또 인자롭고 엄위로웠다. 그는 훗날 이때 느낀 바람과 해, 그리고 청룡산을 생각하며 대표작 ‘해’를 썼다.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산 넘어 산 넘어 어둠을 살라 먹고/산 넘어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 먹고/이글이글 앳된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눈물같은 골짜기에 달밤이 싫여/아무도 없는 뜰에 달밤이 나는 싫여.”(‘해’ 중에서) 이 시는 8·15 광복의 기쁨을 상징적으로 노래한 시로, 광복 후 좌익과 우익이 분열된 혼란기에 민족의 화합과 사랑, 그리고 평화, 조화, 질서의 세계를 소망하고 있다.
자연을 통해 어두운 시대를 비판하고 기독교 신앙을 통해 세속적인 삶을 극복하고자 했던 박두진 시인은 39년 문장지에 ‘향연’ ‘묘지송’을 발표하면서 문학활동을 시작했다. 훗날 데뷔 당시 감정을 이렇게 밝혔다. “등단 당시 가슴이 벅차 미어지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흐느껴 울었습니다. 안마루로 가서 눈을 꼭 감았습니다. 하나님 하나님 하고 기도하는 것밖에는 더 나를 누를 수 있는 것이 없었어요. 그리고 기도했습니다. 만일 이 길로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일생을 도우셔서 이 길로 나가게 하소서라고 말입니다.”
‘묘지송’은 일제 강점기 민족말살 정책이 최악에 달한 39년에 쓰였다. 민족의 강렬한 동경, 죽음에서 생명, 죽음에서 부활을 노래한 것이다. “살아서 살던 주검 죽었으매 이내 안 서럽고, 언제 무덤 속 화안히 비춰줄 그런 태양만이 그리우리.”(‘묘지송’ 중에서)
신앙과 문학이란 선물
그에게 어질고 눈물 많은 누나(박만순)가 있었다. 그는 누나에게 두 가지 영향을 받았다. 첫째는 신앙이고 둘째는 글쓰기였다. 기독교인이었던 누나는 그보다 먼저 고향을 떠나 청주에 있는 제사 공장 직공으로 있으면서 동생에게 사흘마다 편지를 보냈다. 누나는 편지를 통해 복음을 전했고 그는 편지를 쓰면서 문학적 소양을 길렀다. 이후 기독교는 그에게 있어서 근원적인 자양분이 되어 비관적인 현실을 넘어설 수 있는 강력한 힘으로 작용했다.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로 나는 종교 신앙의 길을 택하기에 이르렀고 비 내리는 어느 주일에 스스로 찾아가 기독교 교회의 문을 두드렸다.”(산문 ‘나의 추천시대’ 중에서)
안성군청에서 일하던 그는 19세 때 서울 을유문화사(출판사)로 직장을 옮겼고, 그 무렵 스스로 교회를 찾았다. 그는 신앙을 통해 죽음이 인생의 끝맺음이 아니라 또 다른 인생의 ‘먼 여행’으로 인식하게 됐다. 그에게 신앙은 하나님이 부르실 때까지 한 치 흔들림도 없이 일관된 것이었다.
6·25전쟁 때 종군문인이었던 그는 4·19 당시에는 시위 선두에 서서 중앙청까지 행진했고, 5·16이 일어나자 이를 비판하는 글을 신문에 기고해 구속되기도 했다. 그 후 한일협정 반대, 유신반대운동을 하면서 내내 어려움을 당했다. 수형생활 중에도 매일 성경책을 들고 다녀 간수들 사이에서 ‘성경책’으로 불렸다. 그는 싸락눈 내리는 산속에 고고히 서 있는 학에 비유됐다.
-안성 시립도서관 앞에 세워진 박두진 기념비 -
하나님 자연 인간에 대한 사랑
그의 시에는 기독교 문학의 본질인 믿음·소망·사랑의 요소와 기독교 세계관인 창조·타락·구속의 관점이 명확하게 잘 형상화되어 있다. 또 밝고 힘찬 남성적 목소리로 기독교 세계관인 메시아 도래 사상과 부활 사상을 잘 드러내었다.
그의 시에 일관되게 흐르는 한 줄기 빛은 신 자연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감상에 대응하는 의지, 허무를 극복하는 긍정, 죽음을 정복하는 부활, 증오를 사랑으로 소멸 재생시킴으로써 약육강식의 악을 절대 부정하는 긍정적 선과 평화에 이르는 상상체계를 가졌다.
“별들이 뿌려주는 눈부신 축복과 향기로이 끈적이는/패배의 확증 속에/눌러라 눌러라 가중하는 이 황홀/이제는 미련 없이 손을 들 수 있다/누구도 다시는 기대하지 않게/혼자서도 이제는 개선할 수 있다.”(‘가시면류관’ 중에서)
그에게 죽음은 어둡고 절망적인 것이 아니라 따뜻한 보라색, 밝고 황홀한 분위기를 갖게 하는 부활이다. 그의 시세계는 인류가 가져야 할 영원한 소망과 꿈을 신앙으로 노래하며 모든 문제는 궁극적으로 신앙에 의해 해결된다는 데서 출발한다.
신앙시에 대한 개념이 드러나는 대표적 시는 대구로 피란 가서 쓴 ‘오도(午禱)’(낮기도) ‘거미와 성좌’ ‘사도행전’ ‘나 여기 있나이다, 주여’ ‘가시면류관’ 등이다. 그의 신앙시는 감상적이고 위축된 민족감정에서 과감히 탈피해 밝고 우장하고 힘 있게 부활을 노래했다. ‘오도’는 가슴 밑바닥에서 자신을 응시하고 뉘우치며 민족의 죄를 자신의 죄로 여겨 용서를 빌고 통회하는 시다. “눈물이 더욱더 맑게 하여 주십시오/땀방울이 더욱더 진하게 해 주십시오/핏방울이 더욱더 곱게 하여 주십시오…당신은 나의 힘/당신은 나의 주/당신은 나의 생명/당신은 나의 모두.”(‘오도’ 중에서)
그의 초기 시는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한 예술시 성격이 강했다. 6·25 이후 60년대 말까지는 역사와 현실, 인간 문제를 다뤘다. 70년대 이후 신앙시로 집중된다. 행동하는 기독 지성의 신앙과 정신을 그의 생애와 시작활동에 불어넣음으로써 연작시 ‘사도행전’을 비롯하여 숱한 신앙시를 탄생시켰다.
박두진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과 자연을 창조했고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자연 만물이 운행된다고 믿었다. 따라서 그의 자연에 대한 시작 행위는 하나님의 섭리에 바탕을 둘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와 소박한 자연과 시가 있어서 고독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늘 자연을 가까이했다. 안성시 금광면 금광저수지 인근 400년 넘은 아름드리 느티나무 두 그루가 서 있는 마을의 산길을 걸어 올라가면 혜산의 집필실이 있다. 마치 동화 속에 나올 듯한 아담한 집이었다. 그는 주말이나 방학기간에 이곳에서 조용히 묵상하며 집필에 집중했다.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은 그의 흔적은 안성시립보개도서관에도 있다. 3층 박두진 문학자료관에 육필 원고와 초판본 저서들이 전시돼 있다. 도서관으로 가는 언덕 입구에 박두진의 시비 ‘고향’이 세워져 있다.
■[박두진처럼 생각하기] 자연을 노래하는 것, 그분께 드리는 영광과 찬미
"내가 곧 빛이요 진리라는 성서 말씀의 구체적인 상징을 나는 햇빛에서 보고 느낀다. 그 빛 속에서 참 생명과 영원을 보고 그 햇살, 햇볕, 햇빛에서 나는 모든 죽음, 모든 어둠, 모든 악, 모든 불행을 치유하고 극복하고 부활시키는 영원한 의미와 실체를 찾는다.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의 희망, 의지, 꿈, 힘, 용기의 다함없는 원천이 되는 것이다. 언제나 나는 그 빛 속에서 사랑을 알고 그 빛 속에서 생명을 느끼고 그 빛 속에서 영원을 보기 때문이다."(산문 '햇살, 햇볕, 햇빛' 중에서)
청록파 시인 박두진(사진)의 시에 나타난 '자연'은 하나님께서 친히 창조하신 살아 있는 생명체이다. 그의 시 세계는 하나님이 자연을 창조하셨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또 모든 인생의 궁극의 목표는 신에게 영광을 돌리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자연을 노래하는 것도 신에게 영광과 찬미를 돌리기 위해서요, 인간과 사회를 주제로 쓰는 것도 다 궁극으로는 신의 긍휼과 자비와 그 빛을 증거하고 갈망하는 태세라야 한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산문 '고향에 다시 갔더니' 중에서)
그의 시는 반성과 자기부인, 신에 대한 갈망과 내맡김 등의 진정한 신앙고백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아내 이희성 권사와 매일 성경 한 장씩 읽고 함께 손잡고 기도를 드렸다. 그가 소천하기 얼마 전이었다. 아내가 누가복음 4∼5장을 읽자 병중이라 말투가 어눌했던 그는 그날만큼은 또렷한 음성으로 "예수님은 맑고 깊고 아름다운 분이요. 심오하고 이념적이고 인권을 중요시하는 분이요.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신 분이요"라고 말했다. 아내는 가족에게 남기는 유언으로 알고 이를 노트에 기록했다.
안성=글·사진 이지현 선임기자
jeeh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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