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려
박사(1911-1995)
소천20주기를
맞아 고신교회와 부산,
울산,
경남과
그 밖의 여러 지역 교회들,
기관들과
개인들의 협력으로 한국고등신학연구원(김재현
원장)이
장기려 박사의 신앙과 삶에 대한 기획세미나를 5차에
걸쳐 진행 중이다.
세
번째 기획세미나로 장기려 박사로부터 오랫동안 전문의 수련을 받은 일반외과전문의 이건오 장로(참좋은친구
박애병원 원장)를
모시고 일반에게 알려지지 않은 장기려 박사의 신앙과 삶에 대한 깊은 이야기를 들어보는 시간을 가졌다.
다음은
서울시민교회에 출석하는 이건오 장로를 통해 들은 장기려 박사의 신앙과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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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기려 세미나가 진행되고
있다. |
장기려와
이건오의 예상치 못한 만남
제가
부산 침례 병원에서 인턴을 마치고 일반외과를 전공하기로 했는데 어느 날 제가 전도한 절친한 친구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건오야
내가 외과를 전공하고 싶다.
네가
양보해 줄 수는 없겠니?”
그
당시에는 외과전문의가 인기가 제일 좋았던 시절이고 2월이
되어서 전공과목이 다 정해졌는데 이제 와서 전공을 바꾸겠다고 양보를 해달라고 하니 남감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가 전도해서 이제 막 교회에 출석하게 된 절친한 친구가 양보를 해달라고 하니 쉽게 거절할 수 없어서 하나님께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기도하면
할수록 제 마음에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저
친구가 너 보고 예수 믿는데 이런 것 하나 양보 못하면 뭘 보고 예수 믿겠냐?”
2월
15일경이
되었고 이제 3월부터는
외과로 출근해야 되는데 외과를 양보하고 다른 과로 갈 수도 없었지만 친구를 불러서 이야기 했습니다.
“친구야
네가 외과를 해라.”
그
친구는 걱정스런 눈빛으로 “너는
어떻게 할래?”라고
묻는 것입니다.
걱정스러우면
부탁을 하지 말았어야지요!(웃음)
그래서
제가 “나는
군대 갔다 와서 3년
후에 외과 전공 할 테니 지금은 네가 해라”고
말했습니다.
지도교수님에게
군대 간다고 인사하러 갔더니 자세한 이야기를 들으시고는 어디론가 전화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장기려 박사였습니다.
지도교수님이
제가 양보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장 박사님께 이야기를 잘 해 주신 것입니다.
3월
1일
부로 복음병원 장기려 선생님 밑으로 들어가서 공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믿는 영혼을 위해서 나의 중요한 것을 양보했을 때 장기려 선생님 같은 엄청난 스승을 붙여 주셨습니다.
장기려
선생님은 나의 인생의 가장 중요한 터닝 포인트가 되었습니다.
부산
복음병원에 가보니 예정에 없던 학생이 갑자기 장기려 선생님 제자로 들어오게 되니까 낙하산으로 찍히고 찬 밥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원장님 직속으로 온 나를 경계하던 레지던트들 대신에 모든 당직일과 허드렛일을 다 했습니다.
두
달 정도 지나니까 제가 복음병원에서 필요한 존재가 되었고 문제는 해결되었습니다.
선생님이
누구냐는 것은 너무 중요합니다.
침례병원
외과 과장님도 세브란스 출신의 뛰어난 분이셨는데 장기려 선생님과는 차이가 많았습니다.
장기려
선생님과 같이 공부하면서 느낀 것은 현장에서 가르쳐 주시는 것이 교과서 보다 더 정확하고 실용적이었다는 것입니다.
본인이
잘 아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과 잘 모르는데 교과서를 참조해서 가르치는 것 하고는 많이 다릅니다.
신앙적인
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분명히 아는 사람이 예수를 가르치면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장기려
선생님이 보시기에 제가 성경공부 모임에도 잘 따라다니고 열심히 한다고 생각하셨는지,
수술이
없는 저녁에 집으로 부르셔서 대학 노트에 적은 ‘나의
후손에게 전하노라’
라는
글들을 보여주시기도 하시고 대화도 나누어 주셨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더 많이 배우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을
한국의 슈바이처라고 표현하는데 장기려 선생님은 슈바이처의 아류가 아닙니다.
슈바이처는
선교지원금을 받아서 가난한 자들을 위해 선교하신 분이라고 하면 장기려 선생님은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 가난한 자들과 함께 사신
분이십니다.
자기도
가난하면서 가난한 자를 위해 헌신했습니다.
영도에서
천막치고 같이 굶고 살면서 이런 일을 이루어갔기 때문에 유럽 교회의 도움을 받은 슈바이처와는 전혀 다른 사역을 하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마땅한 비유가 없어서 한국의 슈바이처라고 부르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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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의하는 이건오
장로 |
하나님
앞에서 어린아이같이 살아간 장기려
장기려
선생님과 일반인들 즉 나와 다른 점이 무엇일까?
라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첫
번째 차이점은 장기려 선생님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우리와는 달랐습니다.
하나님의
실존 앞에서 사신 분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너무 어린아이 같이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장기려
선생님은 당뇨병을 이기기 위해서 테니스를 했습니다.
보통
점심시간에 잠깐 치는데 선생님의 파트너는 보통 저였습니다.
장기려
선생님이 테니스를 잘 치셔서 경기가 빨리 끝나고 시간이 남았습니다.
두
번째 게임을 하기에는 시간이 모자랐지만 한 게임 더하자고 하셔서 점심시간이 조금 지난 시간까지 테니스를 지게 되었습니다.
점심시간이
5분에서
10분정도
지나갈 때 테니스를 치던 장기려 선생님이 미끄러져서 무릎이 조금 까졌습니다.
그랬더니
장기려 선생님이 테니스를 치다 말고 이러시는 겁니다.
“이제
그만하고 가자 욕심 부리니까 하나님이 벌주셨어.
그만하자!”
우리가
보기에는 너무 웃긴 유머같이 들렸지만 그분은 그게 진심이었습니다.
늘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신 분입니다.
어느
날 장기려 선생님이 끌과 같은 수술기구로 척추를 긁어내는 척추 결핵수술을 하다가 끌이 미끄러지면서 환자의 척추 신경이
끊어졌습니다.
보통
수술하기 전에 이런 합병증이 생길 수 있다고 다 사인하고 수술을 받습니다.
다른
의사들은 이런 경우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면서 책임을 회피합니다.
그런데
장기려 선생님은 환자와 보호자들에게 끌이 미끄러져서 척추가 끊어졌고 이 사람은 더 이상 걸을 수 없다고 말씀하시면서 이 사고는 내 실수니 앞으로
이 사람의 인생은 내가 책임지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장기려 선생님이 병원 돈으로 생활비를 지불 할 줄 알았는데 자신의 월급에서 매달 생활비를 떼어서 장기려 선생님이 직접 들고 찾아가서 그 청년
환자에게 전해 주시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 청년이 장기려 선생님 얼굴도 안 봤습니다.
자신의
인생을 망친 의사라고 악한 마음으로 대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마음을 열고 그 청년이 예수를 믿기 시작한 것입니다.
장기려
선생님이 출타 중이실 때 선생님의 심부름으로 제가 생활비를 대신 전달하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그 청년에게 “장기려
선생님을 이제 미워하지 않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청년이
대답하길 “처음
몇 달이나 길어야 1,2년은
오겠지 그러고 나면 안 오겠지 그러면 내 인생은 어떻게 되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 장기려 선생님을 미워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3년
4년
계속해서 정확하게 생활비를 가지고 오시어서 위로해 주고 힘을 주시니까 나중에는 이분이 나의 은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그래서
이제 장기려 선생님을 존경하게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이런
일들을 행하면서도 장기려 선생님은 내가 누구를 돕는다고 생각하신 분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셨습니다.
장기려의
학문적 탁월함
두
번째로 장기려 선생님은 학문하는 자세도 달랐습니다.
그
당시는 한국에서 가장 실력 있다고 알려진 일본인 외과의사도 간 수술은 하지 못하는 시대였습니다.
간이
핏덩어리인데 거기다 칼을 대는 것 자체가 무식한 일이라는 이야기를 듣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 장기려 선생님은 간 대량절제술 같은 간의 3분의
2를
들어내는 수술을 실시했습니다.
그는
학문도 하나님 앞에서 했기 때문에 간도 틀림없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질서가 있을 것이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연구를 계속 해서 간 수술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장기려
선생님이 한국에서 간 수술을 실시하고 조금 지나자 미국,
유럽에서
간 수술에 관한 최신 연구 논문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대한외과학회에서 장기려 선생에게 간 수술에 대한 연구보고를 맡겨서 발표하게 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연구비도 지급하지 않고 이런 일을 맡겼습니다.
장기려
선생님은 부산대학교 외과 과장으로 있으면서 자신이 직접 개발한 실험 방식으로 190여건
정도 실험을 해서 간의 구조를 밝혀냈습니다.
그래서
피를 많이 흘리지 않고 간을 절개할 수 있는 수술법을 개발했습니다.
장기려
선생님은 대한민국 간 대량 절제술 1호
외과 의사였습니다.
간에도
하나님이 주신 질서가 반드시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간 수술을 가능하게 했고 학문적인 측면에서도 하나님 앞에서 라는 철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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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미나 현장
모습 |
시공간을
초월한 장기려의 신앙생활
세
번째로 다른 점은 장기려 선생님은 뚜렷한 심판관과 내세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천국은 분명히 존재한다고 분명하게 믿었습니다.
천국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주 구체적으로 믿고 성경의 약속대로 천국에 가는 것으로 믿었습니다.
이런
천국에 대한 확신은 평양과 부산의 시공간을 초월하여 사모님과 영적 교제를 하며 살 수 있게 했습니다.
주변에서
수없이 재혼을 추천했지만 끝까지 재혼 안하고 사모님을 바라보며 사랑할 수 있었던 것도 시공간을 초월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새벽에 일어나서 기도하는 시간에 아내는 평양에서 기도하고 그 기도시간에 우리는 서로 만나고,
하늘나라에
가면 내 아내를 만나게 될 거라고 늘 말씀하셨습니다.
시공간을
초월하여 하나님 나라에 사는 분이셨습니다.
어느
날은 수술하다 마시고 “죽었나봐,
죽었나봐”
하시는
겁니다.
“환자는
이상 없이 수술 잘 받고 있는데 무슨 말씀이십니까?”
물었더니
그 전날 밤에 꿈에 소복을 입고 사모님이 나타나셨다는 겁니다.
그
이후로 그 날에는 외출도 안하고 집에 있으면서 기도하고 추도하는 시간을 가지셨습니다.
그러다가
미국 교민들이 북한에 들어가기 시작할 때 미국 교민들이 장기려 선생님 사모님을 찾았습니다.
사진을
찍어서 보냈는데 시골의 할머니와 같은 모습의 사모님 사진을 보냈습니다.
그
이후로 사모님과 편지로 연락을 하면 지내셨습니다.
장기려
선생님 사모님의 편지에 보면 “새벽4시
당신이 기도하는 시간에 나도 일어나서 기도했습니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또
“아이들이
잘못된 길로 갈 때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까 하며 아이들을 키웠습니다.”
이런
점들을 보면 시공간이 두 분 사이를 갈라놓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
살면서 하나님 나라를 준비하신 분이십니다.
한번은
친하게 지내셨던 전종인 박사의 아들의 결혼식에 기도하기로 약속을 하셨습니다.
결혼식
일주일 전에 계단에서 헛디뎌서 깁스를 하고 걷지 못하게 되어 서울의 결혼식에 참석하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서울에서
사실을 알고 비행기타고 오시면 공항에 휠체어를 준비시켜서 결혼식 참석하고 부산으로 돌아오실 수 있게 조치를 다 취했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선생님
서울에서 준비다 해놓았다고 오시랍니다.”라고
보고 드렸더니 “내가
어떻게 가?”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서울에 연락을 해서 장선생님 다리 부상으로 서울에 못가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결혼식이 있던 날 “오늘
11시에
전종인 선생 결혼식에 기도하기로 했으니까 수술 스케줄 넣지 마.”
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나서 11시부터
12시까지
병원 기도실에서 결혼하는 부부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전종인
박사님이 섭섭하셨겠습니다.”라고
말씀드리니까,
화를
내시면서 “하나님이
서울에만 계시고 부산에는 안계시냐?”
장기려
선생님은 시공간을 초월해서 신앙생활 하셨던 분이셨습니다.
아이가
10달
배속에서 자라서 여기에 적응하도록 커서 나오는 것처럼 이 세상에서 70여년
살 동안에 하늘나라 갈 준비를 해야 한다고 늘 말씀하셨습니다.
장기려
선생의 무소유 정신은 내가 갖고 싶은데 안 갖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나라에서는
필요 없어서 안갖는 것입니다.
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분은
정말 돈에 대한 애착이 없었습니다.
제자들이
선물을 해도 한 달도 못가서 다 없어집니다.
언젠가는
제자들이 파카 금장 만년필을 아는 대한항공 기장에게 부탁해서 사서 드렸습니다.
한
달 지나고 나서 선생님의 만년필이 없어졌습니다.
물어보니,
기자가
와서 인터뷰하는데 모나미 볼펜이 잘 안 나와서 나는 별 필요가 없으니 기자 양반 쓰라고 주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믿는
대로 행동하는 단순한 삶
네
번째가 다른 점은 아는 대로 믿고 믿는 대로 행동하는 분이십니다.
너무도
어린아이같이 믿는 대로 실천하며 사셨습니다.
사랑에
대한 많은 글을 쓰셨는데,
“우리가
언제 사랑을 배웠냐?
아버지
어머니한테 사랑을 받기 보다는 야단만 맞았지.”
그
시절은 밥상에 둘러앉으면 야단치는 시대였고 사랑이라는 개념이 없는 시대였습니다.
특히
우리 세대는 아버지의 사랑이라는 개념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장기려 선생님은 예수님이 나와 아무 상관없는데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서 돌아가셨다는 그 말씀에서 사랑을 배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있으면 그냥 그대로 원수를 사랑하려고 애를 쓰셨습니다.
단순한
순종이었습니다.
아는
대로 믿고 믿은 대로 행동하는 단순한 삶을 사셨습니다.
이에
관한 여러 에피소드들 있습니다.
요한복음
강해하면서 생명의 본질은 사랑과 빛이라고 늘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자신의 몸을 주시고 희생하는 것이고 그 희생이 사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빛이라는
것도 한 자루의 초가 타면서 빛이 나오듯이 사랑과 빛은 희생이며 죽음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장기려
선생님의 일기를 보면 “오늘도
내가 죽고 싶습니다.
주여
오늘 나를 데려가십시오.”
이런
일기를 종종 쓰신 것을 볼 수 있는데 예수님의 사랑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죽으신 것처럼 나도 죽어야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셨습니다.
장기려
선생님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평생토록 지킨 사람입니다.
경성의전
들어갈 때 2등으로
들어가고 졸업할 때 1등으로
졸업하면서,
경성의전
들어 갈 때 했던 약속대로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평생 의술을 펼쳤습니다.
당대
최고의 의학 교수였던 백인제 선생이 대전 도립 병원으로 가라고 할 때 거부하고 가난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평양의 기홀 병원으로
갔습니다.
기홀
병원이(닥터
홀 메모리얼 병원)이
기독교 평양 연합병원이 되고 나중에 김일성 대학 병원이 되었습니다.
김일성이
장기려 선생을 김일성 대학의 교수로 부르기 위해서 불러서 김일성 대학 박일 부총장을 보냈습니다.
장기려
선생은 나는 기독교인이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거절했습니다.
박일
부총장은 “당신은
가난한 인민들을 위해서 일했고 우리도 가난한 인민들을 위해서 이 일을 하는 것이니 김일성대학에 와서 가난한 인민을 도우라”고
설득했습니다.
공산주의가
아니라도 우리와 1년만
같이 일하면서 가난한 인민을 돌보자라는 말에 김일성대학에서 근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주일에는 교회 가서 예배를 드렸고,
장기려는
진실 된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주일은 교회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런
정신으로 부산으로 내려와서도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살았던 것입니다.
장기려,
전세
비행기로 소풍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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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장기려
박사 |
부산
복음 병원이 크지 않았기 때문에 전 직원들 소풍을 종종 갔습니다.
1970년
어느 날 설악산 단풍 구경 가자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 부산에서 설악산까지 하루 만에 갈 수 있는 교통편은 비행기 밖에 없었습니다.
그
당시 제가 총무를 맡고 있어서 설악산 단풍구경을 위해 비행기를 전세 내서 가기로 하고 장기려 선생님께 보고를 했습니다.
보고하자마자
안색이 변하면서 “비행기
타고 어딜 놀러가!
그
돈이면 가난한 사람들 위해서 써야지.
내가
널 잘못 봤구나!”
하면서
호통을 치셨습니다.
더
이상 말도 못하고 나왔는데,
의사들이
아닌 일반 직원들이 다시 한 번 가서 말씀드려 보라고 부탁을 해서 용기를 내서 다시 들어가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선생님!
의사들은
앞으로 언제든지 비행기 타고 여행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병원의 청소원,
식당
종업원들은 이번에 비행기 안타면 평생 못 타봅니다.
그러니
이번에 비행기 타고 설악산 소풍 허락해 주십시오!”
장기려
선생님이 바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래
그러면 가자!”
이처럼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애착은 그의 삶에 흘러 넘쳤습니다.
복음병원에서
물러날 때에 유수한 대학에서 그분을 초빙했는데 다 거절하고 가난한 자들을 위한 청십자 의료보험 조합과 당시 가장 열악한 환경에 있었던 거제도
고현 보건소로 가셨습니다.
장기려
선생의 마지막 사역지도 가난한 자들을 위한 열악한 보건소였습니다.
장기려의
사회적 책임
장기려
선생님은 기독인은 예수님 믿고 예수님이 내 안에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기독인의
삶이란 내 안에 있는 예수님이 내게 명령하는 대로 순종해서 정직하고 거룩한 삶을 이루어 가는 것이고 내가 더불어 사는 사회를 하나님 나라로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기독의사는 무엇이냐?
기독의사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을 모시고 있는 의사다.
기독의사는
기도하고 개인을 고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우리나라 백성들로 하여금 질병에서 자유하게 하는 ‘지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의
말로 하면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했습니다.
하늘나라에
가서 하나님께서 네가 살던 곳에서 뭐하다 왔니 라고 물을 때 하나님께 대답할 것이 있어야 늘 말씀하셨습니다.
그
시절에 중요한 의료계의 숙제는 무의촌 문제였습니다.
의사가
없는 지역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의
문제가 심각했습니다.
“여기
의사 없어서 사람이 죽어갑니다.”
계속해서
보건복지부장관에게 보고해서 이런 장박사의 노력이 법으로 탄생한 것이 공중보건의 제도입니다.
무전층
문제가 또 다른 이슈였습니다.
의사는
있는데 돈이 없어서 치료를 못 받는 사람들의 문제였습니다.
보통
의사들은 “각자
해결하면 되지 우리가 어떻게 합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장선생님은 그냥 두어서는 안된다고 하시면서 돈이 없는 결핵환자들을 위해서 결핵환자수용소를 만들었습니다.
여기서
대한결핵요양소 제도가 생겼습니다.
또한
사회복지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건강할 때 도와주고 아플 때 도움 받자는 취지의 청십자 의료 보험 조합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대한민국 의료보험제도의 효시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원무과에서 병원비 안내고 도망가는 사람들 막으려고 병원 주변에 철조망을 치려는 계획서를 올렸습니다.
장기려
원장님이 결재를 안 해서 시행을 못하게 되자 직원들이 병원 문 닫아야 할지도 모른다고 걱정하기 시작했습니다.
수술하면서
이런 분위기를 말씀드렸더니 손을 펼치면서 “이거야
한 사람이 나가서 소개하면 다섯 명이 오는 거야.
한
사람을 예수님의 마음을 친절하게 하면 우리 병원을 모르는 사람 다섯 사람이 오는 거야.”
장기려
박사의 셈법이었습니다.
장기려
선생님이 원장 할때는 병원 적자가 없었고 오히려 후임 원장이 병원 경영 합리화 작업을 추진하면서 적자가 생기고 문제도
생겼습니다.
남
도와주고 착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창의성이 부족한데 장기려 선생님은 자연과학적인 창의성과 사회과학적인 창의성이 있었습니다.
이런
창의성은 가난한 자들을 사랑하는 사랑의 마음에서 생겼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잘못되는 것이 나의 책임이라고 느끼고 그 사랑이 승화되면서 창의적인 일들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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